233화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무섭도록 퍼붓기 시작한 비.
“저, 전하! 크윽!”
카심이 까막이의 고삐를 움켜쥔 채 소리쳤다.
“비바람이 너무 거셉니다! 앞으로 나아가기가 힘듭니다!”
“귁! 귁귁귁!”
게다가 와이번 무리는 수십 톤에 달하는 바루나의 물기둥을 매달고 있었기에, 앞으로 나아가기가 더욱 어려웠다.
‘젠장.’
오토는 이를 악물었다.
‘방법이 없나?’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밑에는 수십만 마리의 괴수들이 득실거리는 중이었고, 하늘길은 휘몰아치는 비바람으로 인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
이대로라면 데우칼리온이 깨어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그렇게 되면?
‘대재앙이 펼쳐질 거다.’
설리번의 정보에 의하면, 데우칼리온은 일개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대홍수를 일으키는 악신(惡神)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 데우칼리온이 깨어난다면, 이오타 왕국만 위험한 게 아니었다.
어쩌면 대륙의 절반이 물바다가 되어서, 수백만 명이 익사하는 최악의 대참사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오토는 대학살의 서에 영혼에너지가 없는 걸 땅을 치고 후회했다.
만약 영혼에너지만 충만했다면, 대학살의 서에 담긴 마법을 이용해 바루나의 물기둥을 옮길 수도 있을 텐데….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결국, 오토는 지금 상황을 해결할 방법은 그게 유일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급한 대로 영혼에너지를 채우는 것 외에는 딱히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카심! 내려주세요!”
“예?”
“저만 내려주세요! 빨리!”
“하오나….”
카심은 오토의 명령에 따를 수가 없었다.
저 아래에는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괴수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만약 지금 상황에서 오토를 내려주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와이번에서 내린다는 건 사실상 자살행위였던 것이다.
“어서요!”
하지만 오토는 계속해서 카심을 다그쳤다.
“명령입니다. 내려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결국, 카심은 오토를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그륵! 그르르륵!”
“그르르륵!”
오토가 내리자마자 괴수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전하!”
놀란 카미유도 와이번의 등 위에서 뛰어내려 오토를 향해 내달렸다.
와이번에 타고 있던 마검사들도 일제히 내려서, 오토를 둘러쌌다.
“카심! 공중에서 바루나의 물기둥을 옮길 준비를 하세요! 카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예! 전하!”
오토의 명령을 받은 카심이 다시 와이번 무리를 이끌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오토는 카미유, 그리고 마검사들과 함께 덤벼드는 괴수들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 * *
질척, 질척!
질퍽대는 갯벌에서 벌어진 전투인지라, 움직이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오토, 카미유, 그리고 마검사들은 그런 악조건에 굴하지 않았다.
특히나, 이번 전투에서 오토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셨다.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 이래서는 오래 못 버텨.’
오토는 질퍽질퍽한 뻘 때문에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운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땅부터 어떻게 하자.’
오토가 지면을 향해 석화 광선을 뿜어내었다.
쩍!
쩌어억!
그러자 질척대던 갯벌로 이루어져 있던 일대가 딱딱한 돌 바닥이 되었다.
석화의 눈 권능을 공격에 이용한 것이 아니라, 필드의 성질을 바꿔 버리는 데 사용한 것이다!
덕분에 오토 일행은 질척질척한 갯벌이 아닌 딱딱한 돌바닥 위에서 싸울 수 있게 되었고, 그건 엄청난 이점이 되었다.
움직임이 자유롭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전투력이 족히 두 배는 올라간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다들 고개 숙여!”
오토가 버럭 소리치자 카미유와 마검사들이 일제히 바닥이 납작 엎드렸다.
스으으으으으으!
뒤이어 오토의 눈에서 맹독의 저주가 뿜어져 나와 덤벼드는 괴수들을 중독시켰다.
“그륵, 그르르륵.”
“그르르륵.”
괴수들은 맹독응시의 독성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레벨이 오른 만큼 맹독응시의 독성도 강해져서, 어지간한 잡몹들은 오토의 시선이 머무는 것만으로도 중독되었던 것이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괴수들이 쓰러져갈 때마다 경험치가 쑥쑥 올랐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중략)
[알림: 레벨이 올랐습니다!]
경험치가 오른 만큼 덩달아 레벨도 쭉쭉 올랐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사용할 수 있다.’
오토는 문득 자신이 가진 무적황제의 권능 중 새로운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상태창이 흐릿해졌지만, 느껴졌다.
야만용사의 함성.
그중 살육의 함성을 사용할 수 있음을.
“지금부터.”
오토의 입에서 나지막한, 하지만 모두에게 분명히 들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로 죽여라.”
다음 순간.
“그르륵!”
“그르르르르르르륵!”
괴수들이 서로 싸우며 죽고 죽이기 시작했다.
“……!”
“……!”
“……!”
카미유와 마검사들은 오토가 보여준 권능에 놀랐다.
적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만들다니….
‘된다.’
오토는 괴수들끼리 서로 싸우는 걸 보고 미소를 지었다.
무적황제의 권능 중 하나인 야만용사의 함성 종류는 총 다섯 가지.
아군을 강화시키는 용맹의 함성.
아군을 치유하는 불굴의 함성.
적들에게 슬로우 효과를 거는 야만의 함성.
그리고 적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만드는 살육의 함성.
아직 죽음의 함성까지는 사용할 수 없었지만, 살육의 함성만으로도 지금 상황을 해결해 나가기에는 충분했다.
셀 수 없이 많은 괴수들이 서로 뒤엉켜서 죽고 죽이는 광경이란, 오토의 입장에서는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큼 영혼에너지가 모이는 속도도 더욱 빨라졌다.
스으으으!
어느새 대학살의 서가 초록색 섬광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아직 부족해.’
그러나 괴수들이 주는 영혼에너지가 너무 적어서, 지금 상황을 해결하기란 불가능했다.
‘조금만 더 버티면….’
그때.
- 힘이 필요한가? 그럼 인간을 죽여라.
목소리가 속삭였다.
* * *
- 고결한 기사의 영혼이 얼마나 가치가 높은지 아는가?
‘……?’
- 고결한 기사의 희생 하나면 엄청난 권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고생할 필요 없지 않은가. 고결한 기사의 영혼을 바쳐 모두를 구해내면 되지 않겠는가.
목소리는 오토에게 카미유를 죽이라고 속삭였다.
카미유를 죽여서, 그 영혼에너지를 흡수하고, 대학살의 서를 이용해 사태를 해결하라고 유혹하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매우 달콤한 유혹이 될 수도 있었다.
오토가 이 사태를 막으려는 이유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럼 오토의 입장에서 카미유 하나를 희생해 모두를 구한다는 건 어쩌면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도 있었다.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를 구한다.
선한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을 딜레마에 빠뜨리는, 아주 위험한 유혹이었다.
…는 오토에게 그런 유혹이 씨알이라도 먹힐 리 없었다.
‘x까, 이 새끼야.’
오토는 의지의 힘으로 목소리의 속삭임을 차단했다.
‘어디서 말 같지도 않은 약을 팔고 있어.’
만약 카미유를 희생시킨다?
그럼, 오토는 그 길로 끝이었다.
카미유를 희생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밑도 끝도 없이 타락하게 될 테고, 결국 주변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될 터였다.
단 한 번 유혹에 넘어간 것을 시작으로, 완전히 타락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미안한데. 사람 잘못 골랐어.’
오토는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아무도 구하지 못한다 해도. 내가 우리 형을 죽이는 일은 없을 거다.’
오토는 마냥 선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자신의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오토는 목소리의 속삭임을 너무나도 쉽게 뿌리칠 수 있었다.
타고난 영웅이 아니라서.
그렇다고 마냥 사악한 악인도 아니기에.
그래서 오토는 스스로의 신념과 중심을 지킬 수가 있었다.
‘역시 위험해.’
오토는 대학살의 서가 얼마나 끔찍하고 위험한 물건인지를 다시 한번 되새겼다.
‘대학살의 서는 치트키가 아냐. 양날의 검이지.’
대학살의 서를 쓰면 쓸수록, 경각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게 대학살의 서의 역대 소유자들과 오토의 차이점이었다.
과거 대학살의 서를 소유했던 자들은, 그 전지전능한 힘에 매료되어 서서히 타락해 나갔다.
위대한 영웅이든.
희대의 악인이든.
결국엔 대학살의 서를 사용하다가 타락해 버렸고, 그 결말은 항상 비참한 죽음이었던 것이다.
‘언젠가 이 책은.’
오토는 다짐했다.
‘내 손으로 파괴해야 한다.’
대학살의 서와 같이 위험한 물건을 계속 지니고 있을 순 없었다.
오토 스스로도 계속해서 위험함을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이라면 오죽할까.
‘귀 기울이지 말자.’
오토는 그런 생각으로, 검을 휘두르며 잡생각을 떨쳐내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괴수들과의 싸움에 집중했다.
촤락!
촤라락!
검을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잡생각이 달아나고, 마음의 평온이 찾아왔다.
그렇게 베고, 베고, 또 베면서 괴수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 버렸다.
스으으으!
그러자 대학살의 서가 빛을 발하며 영혼에너지가 충만해졌음을 알렸다.
‘됐어.’
오토는 즉시 대학살의 서를 펼쳤다.
“전하를 보호하라!”
“예!”
카미유와 마검사들이 오토를 둘러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어 주었다.
대학살의 서를 펼쳐서 캐스팅하는 도중에는 제아무리 오토라 할지라도 무방비상태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아군의 보호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사이.
촤라라라라락!
대학살의 서가 펼쳐지고.
“अहं जानामि मा।.”
오토의 입에서 주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촤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카심이 지휘하는 와이번 무리를 저지하던 비바람이,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지금이다!”
“귁! 귁귁귁!”
카심과 펭이는 비행을 방해하던 비바람이 잦아들었음을 깨닫자마자 전속력으로 유적지를 향해 급강하했다.
바루나의 물기둥.
데우칼리온을 봉인하는 성물이 본래 있던 자리를 향해서.
* * *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이용해 카심에게 길을 열어 줌으로써, 사태는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촤아아아아아!
거대한 생명체의 머리가 솟구쳐 올랐다.
데우칼리온.
대홍수를 일으키는 악신의 머리가 갯벌을 뚫고 치솟아 오른 것이다.
- 크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
갯벌을 뚫고 올라온 데우칼리온이 거대한 포효를 내질렀다.
우르릉!
쾅!
천둥·번개가 내리치고.
쏴아아아아아아아아!
휘이이이이이!
거센 비바람이 휘몰아쳤다.
“크으으윽!”
“귁! 귁귁!”
유적지를 향해 급강하하던 카심은, 갑작스레 거세진 비바람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없었다.
오토도 그 광경을 보았다.
데우칼리온 최후의 발악이 카심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गा..”ज
오토의 입에서 또 다른 주문이 흘러나왔다.
번쩍!
뒤이어 새하얀 섬광이 온 세상을 집어삼키며, 한 줄기 번개가 내리쳐 데우칼리온의 대가리를 강타했다.
쾅!!!
모두의 귀를 멀게 만드는 굉음이 울려 퍼지고.
- ……!
포효하던 데우칼리온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우뚝 멎었다.
오토가 내린 천벌에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그러는 사이.
쿠웅!
카심이 기회를 틈타 바루나의 물기둥을 유적지 한가운데에 가져다놓았다.
그 결과.
슈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바루나의 물기둥이 힘을 발휘하며, 뒤틀린 황야의 모든 수분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