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2화
“진실이라. 췩.”
바그람이 오토의 말을 곱씹더니, 투박한 탁자를 가리켰다.
“나를 이렇게 찾아올 이유가 있을 테니. 취익. 앉아라. 췩췩.”
“역시 말이 좀 통하네.”
오토는 바그람이 자신을 경계하기보단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것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인물은 인물이야.’
바그람은 100인의 군주 가운데서도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캐릭터.
그는 오크 부족장답게 호전적이고 용맹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바그람은 매우 현명한 부족장이었을뿐더러, 유연한 사고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가치관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바그람은 오토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군주 중 하나였다.
친구가 되기에도 좋고.
동맹을 맺기에도 더없이 든든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렇듯 불쑥 찾아온 인간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있는 것일 테고.
“맥주 한잔 하겠나?”
“좋지.”
“우리 오크들의 맥주는 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하지. 취익.”
바그람이 커다란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오토에게 건넸다.
벌컥벌컥!
오토는 한 점 망설임 없이 커다란 잔을 단숨에 비워 버렸다.
“크으으!”
“어떤가? 췩!”
“어떻긴 뭘 어때. 끝내주지.”
오토의 말은 진심이었다.
이 세계에서 오크들이 만드는 맥주는 명주(名酒) 중의 명주였다.
오토가 살던 세계의 맥주들과 비교해 봐도, 오크들이 만든 맥주는 차원이 다른 맛을 자랑했다.
오죽했으면 맥주를 그다지 좋아하는 오토의 입맛에도 끝내준다는 평가가 나올까.
“그게 정말인가?”
바그람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에게도 우리의 맥주가 입에 맞나?”
“물론.”
오토가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듯 대답했다.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우리 인간들이 만든 맥주는 맥주도 아니야. 오크들이 만든 것에 비하면.”
“오?”
“만약 우리가 친해진다면.”
오토가 바그람에게 제안했다.
“혹시 오크들이 만든 맥주를 대륙에 내다 팔 수 있을까?”
“……!”
“공급만 해. 유통은 내가 할 테니까.”
“공급만 하라는 말의 의미가….”
“맥주 제조 비법 같은 건 관심 없어. 그냥 공급만 하라는 거야. 내가 내다 팔 수 있게끔.”
“……!”
“어차피 인간을 안 믿잖아? 제조법 공유는 바라지도 않아, 애초에.”
바그람은 오토가 제조 비법을 노리지 않는단 말에 솔직히 크게 놀랐다.
오토의 말마따나, 오크들은 인간들을 절대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꽤 괜찮은 인간일지도 모르겠군.’
바그람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오토에게 물었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뭔가, 인간이여. 취익.”
“말했잖아. 진실을 알려 주러 왔다고.”
“어떤 진실을?”
“이 땅의 오크들이 지난 수백 년 동안 싸워 온 이유.”
“……?”
“그리고 당신 동생이 갑자기 돌변한 이유.”
“그, 그게 무슨 소리인가? 취익!”
바그람의 눈이 위협적으로 빛났다.
오토가 나타난 이유가 심상치 않을 것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왜?
그러지 않고서야 이곳 우르크 평원에 인간이 나타날 리 없었으니까.
그것도 천둥발굽 부족의 족장에게.
하지만 오토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너무나도 위험하게만 들려서, 바그람은 무의식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무슨 농간이냐. 취익.”
바그람이 오토에게 물었다.
“말 그대로.”
오토는 바그람으로부터 어떠한 위협도 느끼지 않는다는 듯 태연하게 맥주잔을 내밀었다.
“진실을 알려 주러 왔다니까. 한 잔 더 줄 수 있나?”
“…….”
“한잔 더 주면 얘기해 줄게.”
“취익?”
“술값 낸다 치고 이야기해 주겠다고.”
오토는 여유로웠다.
경험상 바그람이 말이 통하는 상대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 * *
오토는 정말로 아무런 대가 없이 바그람에게 모든 비밀을 말해 주었다.
애초에 오토는 바그람과 거래하기 위해서 온 게 아니었다.
오토는 바그람에게 진실을 말해 주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둘도 없는 친구이자 혈맹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했다.
오토가 아는 진실이란 오크들이 꿈에도 몰랐던, 마치 판도라의 상자 같은 것.
그 진실을 알게 되면, 바그람은 오토를 위해 기꺼이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게 될 터였다.
“내가 말해 줄 비밀이 뭐냐면.”
오토가 운을 띄웠다.
“당신 포함 우르크 평원의 오크들이 가축에 불과하다는 거야.”
“취익?!”
바그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쒸익, 쒸익!
황금 코뚜레를 한 콧구멍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가축>이란 오토의 표현에 심기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췩.”
“말 그대로 가축이라고.”
“제대로 설명해 봐라. 취익.”
“우르크 평원의 정세는 에르제베트 왕국 정보부에 의해 조작되고 있어.”
“취이익?!”
“당신들이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서 싸운 이유가 사실은 에르제베트 왕국에서 벌인 공작 때문이라고.”
“그게 무슨 말이냐! 취익!”
바그람이 언성을 높였다.
“더 자세히 설명해 봐라! 취익! 어서!”
“그게 그러니까.”
오토의 입에서 에르제베트 왕국이 가진 가장 은밀하고도 위험한 비밀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수백 년 전.
에르제베트 왕국 건국 초기.
당시 에르제베트 왕국의 국왕 체호프 1세는, 남쪽에 자리한 우르크 평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오크들의 개체수가 점점 늘어나면서 국경을 침공해 오는 횟수가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르크 평원으로 쳐들어가 오크들을 토벌하자니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았고, 이에 체호프 1세는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체호프 1세는 기사들을 우르크 평원으로 파견해 갓 태어난 새끼 오크 몇 마리를 잡아 오도록 시켰다.
잡혀 온 새끼 오크들은 에르제베트 왕국에 의해 길러졌고, 세뇌되었다.
에르제베트 왕국에선 그런 오크들을 <오르쿠스>라 불렀다.
체호프 1세는 오르쿠스들을 우르크 평원으로 돌려보내 그들로 하여금 간첩 역할을 수행하게끔 했다.
결과는 놀라우리만치 고무적이었다.
각 부족의 핵심 인물로 성장한 오르쿠스들은, 에르제베트 왕국의 지령에 따라 우르크 평원의 정세를 어지럽혔다.
덕분에 에르제베트 왕국은 우르크 평원을 떡 주무르듯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오크들로 하여금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듭하게끔 만들었다.
그 뒤로 수백 년 동안이나.
“지,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취익!”
“쉿.”
오토가 검지를 세워 바그람에게 조용히 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조용히 얘기해. 다른 사람… 이 아니라. 오크들이 들으면 곤란해지니까.”
“취익…!”
“진정하고, 일단 들어.”
오토는 바그람이 날뛰지 않게 최대한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바그람이 제아무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라지만, 그 역시 오크는 오크.
특유의 다혈질적인 성격이 어디 가는 게 아니었다.
“에르제베트 왕국은 오르쿠스들을 이용해 여기 오크들을 조종해 왔다. 때론 오크들을 조종해서 주변국들을 공격하게 만들기도 했고.”
“취익, 취익!”
“10년 전쯤이었나? 여러 부족들끼리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된 적 있었지? 근데 당신 동생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평화협정은 무산되고, 다시 피바람이 불기 시작했지.”
“취이이익…!”
“왜 갑자기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오토가 바그람에게 물었다.
“왜 오크들은 서로 협력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싸워야만 했을까? 뭔가 이상하지 않아?”
“취, 취익!”
바그람은 딱히 무어라 대답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오토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사실 바그람 역시도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어 왔고, 때때로 석연치 않은 사건·사고들이 벌어질 때마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믿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오토는 바그람이 자신의 말을 믿을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시기쯤이면 바그람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오르쿠스들을 이제 갓 추적하기 시작할 때니까.’
바그람의 메인 시나리오는 오크의 이미지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오크가 주인공인 시나리오라면, 호쾌한 전쟁과 역동적인 결투를 떠올리기 마련.
하지만 바그람은 메인 시나리오는 그런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부수는 첩보 액션 스릴러였다.
부족 내 오르쿠스들의 존재를 감지하고, 감시하고, 추적하는 것이 바그람의 메인 시나리오였던 것이다.
“그대의 말… 사실인가. 취익.”
바그람이 오토에게 물었다.
“사실이니까 여기까지 왔겠지.”
“어떻게 알게 됐나. 췩, 취익.”
“우연치 않게 에르제베트 왕국의 기밀문서를 획득했다, 정도로 해 둘게.”
“증명할 수 있는가? 취익?”
“물론.”
오토가 여유 넘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토는 바그람의 세력 내 모든 오르쿠스들에 대한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이 오르쿠스라는 걸 증명할 수단과 방법도 모두 알았다.
그러다 보니 증명은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다.
“좋다. 췩.”
바그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대의 말을 믿어 보겠다. 취익. 하지만 거짓말이라면….”
“내 목을 내어놓지.”
바그람은 오토의 말에 만족했는지 더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물론 의심의 눈초리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지만.
“췩. 그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내 이름은 오토 드 스쿠데리아.”
오토가 바그람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자 천둥발굽 부족의 족장 바그람과 친구가 되길 원하는 자다.”
* * *
그 후 오토는 바그람과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했다.
오토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바그람의 경계심은 줄어들었다.
오토의 모든 말에는 근거가 매우 확실해서, 강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이 틀 무렵.
“에르제베트 왕국… 취익.”
바그람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메인 시나리오는 에르제베트 왕국의 음모를 파헤쳐 우르크 평원을 통일하고, 나아가 바토리와 승부를 겨루는 것.
즉, 바그람과 바토리는 서로 시나리오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는 숙적 관계였다.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취익.”
“그 복수에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돼선 안 돼.”
오토가 바그람에게 주의를 주었다.
“물론 오크들의 입장에서 인간을 증오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건 나도 안다. 취익.”
바그람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말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다. 내 목표는 에르제베트 왕국을 무너뜨리는 것이지, 인간들을 죽이는 게 아니다. 취익.”
“그럼 다행이고.”
“지금 에르제베트 왕국의 국왕이 바토리라고 했나? 취익?”
“그래.”
“나는 반드시 그 사악한 인간 여자를 쳐부술 것이다. 취익.”
“그 다음엔?”
“할 수만 있다면. 췩.”
바그람이 약간은 아련하게 들리는 말투로 말했다.
“우리 오크들과 인간들이 서로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 췩. 우리 오크들은 명예를 알고, 지성을 가진 종족이다. 취익. 결코 사악한 몬스터 같은 것이 아니다. 나는 보여주고 싶다. 췩. 우리 오크들도 인간과 잘 지낼 수 있다는 것을. 취익.”
바그람은 인간에 대한 증오로 가득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성군의 자질을 갖춘 위대한 오크 군주.
그 메인 시나리오의 끝은, 오크들과 인간들이 사이좋게 공존하는 세상이었다.
물론 그런 위대한 업적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난과 역경을 넘어서야 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나아가 곧 벌어질 세계대전에서 크게 활약해 오크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꿔야 했다.
오크들이 결코 사람을 잡아먹는 몬스터가 아니라, 용맹하고 호전적이면서도 순박한 면이 있는 종족이라는 것을 대륙에 각인시켜야 하는 것이다.
“내가 도와줄게.”
오토가 그런 바그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한 나라의 왕이야. 내가 다스리는 나라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취익?”
“차근차근 해 보자는 얘기야. 물론….”
오토가 덧붙였다.
“에르제베트 왕국부터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