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9화
“전하!”
에리얼 공작이 대표로 나서서 바토리를 향해 용서를 구했다.
그는 에르제베트 왕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인물이었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자고 주장했던 귀족들의 대표자 격이었다.
사실 에리얼 공작은 왕가의 방계 혈족 중 가운데 하나를 옹립하고, 그를 허수아비로 만들어 정권을 휘어잡을 계획이었다.
아직 미혼인 바토리에게는 후사가 없었기에, 왕가의 방계 혈족 중 하나를 대충 옹립하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에리얼 공작은 왕가의 방계 혈족 중 왕위 계승 서열 1위에 해당하는 나무꾼 청년을 하나 알고 있었고, 그를 국왕으로 점찍어둔 상태이기도 했다.
그런데 바토리가 떡하니 나타났으니, 에리얼 공작으로서는 최선을 다해 비는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어떻게든.’
에리얼 공작은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일단 어전회의까지만 무사히 넘기고 왕궁을 나서면, 에리얼 공작은 즉시 다른 나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이미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 했던 게 들통나 버린 이상 에리얼 공작의 정치적 생명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혹시나 바토리가 자비를 베푼다 한들, 속마음이 들킨 이상 언제 어느 때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파리 목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 자리만 벗어나면 된다.’
에리얼 공작은 이 위기를 벗어나면 즉시 다른 나라로 망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살아남는 것이 우선.
“전하! 저희들은 결코 역모를 꾀하려 한 것이 아니옵니다!”
에리얼 공작이 피를 토하듯 항변했다.
“저희들은 전하께오서 전투 중 전사하신 줄로만 알았사옵니다. 주변 세력들이 본국의 영토를 갉아먹고 있는 지금, 더는 왕위를 비워 둘 수 없어 의견을 내었던 것이옵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은 그저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랬을 뿐이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서 그랬다라….”
바토리가 에리얼 공작의 말을 되뇌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녕 그대들이 나라를 위해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 했던 것뿐이라는 것이냐?”
“한 치의 거짓도 없사옵니다! 전하! 믿어 주시옵소서!”
“물론.”
바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과인은 그대들의 충정을 의심치 않는다.”
“전하! 성극이 망극하옵니다!”
“전투는 패배했고, 친정에 나섰던 과인이 행방불명되었으니 그대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터.”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그대들의 충정이 이토록 간절하니, 과인으로서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겠지.”
그 순간.
오싹!
에리얼 공작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끼고 흠칫 몸을 떨었다.
바토리의 표정이 너무나도 무서웠다.
말은 감동했다 하는데, 바토리의 두 눈은 섬뜩하리만치 매서웠다.
“에리얼 공작.”
“예… 전하….”
“과인은 에르제베트의 국왕으로서 그대들의 충정을 인정하는 바이다.”
“서,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불길함을 느낀 에리얼 공작의 목소리는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가축 같았다.
“이에 과인은 그대들의 충정을 받아들일 것이며, 너그러이 용서할 것이다.”
“저, 전하!”
에리얼 공작의 얼굴이 환해졌다.
반역죄로 사형당할 줄 알았는데, 바토리가 자비를 베풀겠다니 죽었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에리얼 공작을 필두로,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던 신하들이 일제히 바토리를 향해 절했다.
“과인은 그대들의 충성심을 높이 사며, 그대들이 본국에 영원히 봉사할 수 있는 영광을 내리노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영원히 봉사해야 할 것이다, 영원히.”
그와 동시에 바토리로부터 죽음의 숨결이 뿜어져 나왔다.
그러자 에리얼 공작과 신하들의 몸이 빠른 속도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이게 무슨!”
“크으윽!”
“으아아아악!”
공포에 질린 에리얼 공작과 신하들이 비명을 질러 댔지만, 육체의 부패는 멈추지 않았다.
피부의 수분이 빠르게 사라지고, 몸 곳곳에서는 진물이 흘러내렸으며, 혈관 속 피는 시커멓게 죽어갔다.
“히이익?!”
“이, 이 무슨….”
“맙소사.”
나머지 신하들은 그런 에리얼 공작과 신하들이 실시간으로 썩어 가는 걸 보고 경악했다.
죽은 사람도 아니고, 산 사람이 썩어 가는 걸 보는 기분이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결국, 완전히 부패해 버림으로서 살아 있는 시체가 된 에리얼 공작과 신하들이 바토리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바토리가 가진 권능인 죽음의 숨결에 의해 육체가 부패해 버렸고, 이제는 그 권속으로서 영원한 충성을 바칠 수밖에 없는 노예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영원한 충성을 바칠 영광을 하사하겠다던 바토리의 발언은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 방식이 조금 달랐을 뿐.
“이, 이 무슨!”
“으아악! 으아아악!”
놀란 신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어전에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쾅쾅!
이미 어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깔깔깔깔깔!”
바토리가 도망치는 신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광기에 찬, 격앙된 웃음을 터뜨렸다.
* * *
한편, 오토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에르제베트 왕국을 공격하며 영토를 넓혀 나가던 주변 세력들은 큰 화를 입었다.
갑작스레 시작된 에르제베트 왕국의 반격은 무시무시했고, 그들은 병력을 모두 잃었으며, 넓혔던 영토를 순식간에 빼앗기고 말았다.
부패여왕 바토리가 죽음의 기사들을 보내 계속해서 공격해 들어오는 주변 세력들을 토벌해 버렸던 것이다.
반격에 당한 세력을 경영하던 군주들은, 즉시 이오타 왕국을 등지고 에르제베트 왕국에 외교관을 보내 용서를 빌었다.
강대국인 에르제베트 왕국이 진정한 저력을 보여 주는 것 같으니, 박쥐처럼 또다시 찾아가 납작 엎드리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외교관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산 사람을 부패시켜버리는 죽음의 숨결이었다.
“크아아아아악!”
“사,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바아아알!”
“으아아아아아아아아!”
박쥐처럼 굴었던 세력에서 온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바토리에 의해 부패한 시체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성물인 부패한 심장을 발동시킨 바토리는 분노의 화신이자 복수귀로 변해 있었고, 더 이상 외교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 괴물이 되어 버린 뒤였다.
정말이지 끔찍한 결말이었지만, 엄밀히 따지면 자업자득이었다.
오토의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에르제베트 왕국을 공격한 것으로도 모자라서, 박쥐처럼 또다시 바토리를 찾아갔으니 그에 따른 대가를 치렀던 것이다.
이 소식은 곧장 오토에게도 전해졌다.
“…하여간 말은 X나게 안 들어요.”
오토는 주변 세력들에서 보내온 외교문서를 읽고는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표리부동하게도, 그들은 이오타 왕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의 반격이 심상치 않으니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도와줘야죠.”
오토는 그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바토리가 제 발등을 찍고 있는데 저까지 그럴 필요 있나요.”
“끌끌끌. 옳은 결정이다.”
와지르가 오토를 칭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토의 선택은 매우 훌륭했다.
물론 오토도 사람이다 보니 말 안 듣고, 박쥐처럼 왔다 갔다 하는 놈들이 꼴 보기 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바토리와 똑같이 행동한다면, 동맹을 잃을 뿐이었다.
이럴 때일수록 기분이 나쁘더라도 너그러운 포용력을 발휘해 동맹을 늘려나가고, 적을 고립시키는 건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
바토리가 주변 세력들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낸 이상, 오토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던 것이다.
“일단은.”
오토가 말했다.
“지금 당장은 재정비하느라 바로 움직이진 않을 테니까, 천천히 대비해 보죠.”
“알겠다. 그리고 말이다.”
“네?”
“로웨나가 벌써 편지를 7통이나 보냈는데, 왜 아직 접대하러 가지 않는 것이냐?”
“뭐, 뭐라고요?”
오토는 와지르의 말을 듣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복귀한 지 얼마나 됐다고 편지를 7통이나 보냈을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로웨나는 인내심이 그리 깊은 상대가 아니니, 너무 기다리게 하는 건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닐 게다.”
“아, 알죠. 잘 알죠.”
로웨나 역시 100인의 군주 중 하나.
그런 로웨나의 성격을 오토가 모를 리 없었다.
“얼른 가서 접대하고 오너라. 끌끌. 로웨나를 상대로 밀당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야.”
“밀당이라뇨? 저 약혼녀 있는데요.”
“끌끌. 약혼녀가 하나가 아닐 수도 있….”
그 순간.
팟!
오토가 황급히 텔레포트를 사용해 와지르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는 혹시 주변에 누가 있나 싶어 사방팔방을 두리번거렸다.
“읍! 읍읍!”
“제발 그런 무서움 말씀 좀 마십쇼! 제발! 큰일 날 소릴 하시네!”
“읍! 읍읍읍!”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단 말씀도 모르세요? 엘리제 님 귀에라도 들어가면 어떡하시려고 그러세요? 예?”
“읍읍읍!”
오토는 와지르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막았던 입을 풀어주었다.
“이놈이?”
와지르가 눈을 부라렸다.
“감히 이 늙은이를….”
“엘리제 님 화나면 저만 죽을 것 같습니까? 예?”
와지르는 오토의 윽박지름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분노한 엘리제가 칼부림이라도 부리면, 제아무리 와지르 대공이라 한들 무사할 수 없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저는 일편단심 엘리제 님뿐입니다.”
“그, 그래야지. 암. 그렇고말고.”
와지르는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오토와 마찬가지로, 와지르 역시 자신의 말실수가 엘리제의 귀에 들어갈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아, 아무튼. 적당히 잘 접대하도록 해라.”
“예.”
오토는 귀찮았지만, 일단은 로웨나를 만나 보기로 했다.
만약 세계대전의 주범(?) 중 하나인 로웨나를 제어할 수 있게 된다면, 어쩌면 본래 계획보다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뭐라?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편지를 보내 왔단 말이냐?”
로웨나는 평소처럼 업무를 보다가 오토로부터 답장이 왔다는 보고를 받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대체 왜 이리 답장이 늦었다는 말이냐? 내 편지를 일곱 통이나 보냈거늘!”
“예, 대공 전하.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전하길 우르크 평원에서 복귀가 늦어지는 바람에 미처 답장할 수 없었다 하옵니다.”
“음. 그런 사정이 있었군.”
로웨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오토가 보낸 편지를 읽어 보았다.
편지 내용은 특별할 게 없었다.
그저 빠른 시일 내에 회담을 희망한다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로웨나는 그 편지 하나만으로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오늘 업무는 이만하도록 하겠다.”
“예, 전하.”
곧장 집무실을 등진 로웨나는 즉시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 시녀들을 닦달했다.
로웨나는 오토가 방문할 것에 대비해서, 최대한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아름답고 고혹적인 옷차림을 준비했다.
오토가 올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서 도무지 업무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