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3화
오토가 숙소로 돌아간 뒤.
로웨나는 오토의 시중을 들었던 시녀를 잠시 불러다가 보고를 받았다.
오토가 저녁 식사에 초대받기 전에 뭘 했는지,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그, 그것이….”
시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는지, 로웨나의 물음에 제대로 된 답변을 내어놓지 못했다.
오토의 미모에 홀려 그만 보안사항을 위반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차마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말을 못하는 것이냐.”
로웨나가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시녀를 압박했다.
“대, 대공 전하!”
순진한 시녀는 로웨나의 그 무시무시한 압박감에 주저앉고 말았다.
거짓말을 잘 못하는 성격에다가, 로웨나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짓눌려 그만 겁을 먹고 말았던 것이다.
“너는 어찌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냐. 왜.”
“그것이… 대공 전하….”
“말해라.”
“죽여주시옵소서. 흑. 흑흑흑.”
시녀가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갑자기 왜 우느냐?”
“대공 전하… 소녀는….”
시녀는 오토와 나누었던 대화를 로웨나에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야기했다.
만약 여기서 단 한 마디라도 거짓말을 했다가는, 시녀 본인의 목숨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사형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여 소녀는 보안사항을 어기고 말았사옵니다. 소녀를 죽여 주시옵소서. 흑흑. 흑흑흑.”
“너는 어찌 우느냐? 내가 너를 죽이기라도 할 것 같으냐?”
“시녀로서 대공 전하에 대한 이야기를 외부인에게 흘렸으니, 소녀는 마땅히….”
“내 너에게 상을 내릴 것이다.”
“……?”
“너는 눈물을 그쳐라. 나는 화나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기특할 뿐이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녀가 어리둥절했다.
최소한 불호령.
심하면 감옥에라도 갈 줄 알았는데.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내게 관심이 있어 네게 물어본 것이 아니겠느냐?”
“그, 그렇사옵니다.”
“나 역시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에게 관심이 있다. 그러니 너는 나를 도와준 것이다.”
“……!”
“호호호! 만약 다른 사람에게 나에 대한 정보를 말했다면, 나는 너를 벌했을 것이란다. 하지만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에게는 예외다.”
“저, 전하….”
“네 덕분에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내게 어느 정도 관심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내 어찌 화를 내고 너를 벌할 수 있겠느냐?”
로웨나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시녀를 일으켜 주었다.
“내 너에게 상을 내릴 터이니, 앞으로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이곳을 방문하거든 그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모아 내게 보고해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무, 물론이옵니다.”
“그래, 그럼 되었다.”
시녀를 칭찬해 주는 로웨나의 입가에는 전에 없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조금 전 오토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댔다가 거절당한 것 때문에 속상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오토가 시녀에게 이것저것 꼬치꼬치 캐물으며 관심을 드러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로웨나의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그래. 동생도 내게 관심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에 대해 물어봤겠지. 나와 단둘이 있었을 때… 동생은 계속 땀을 흘리며 괴로워했어. 내 유혹을 참아내느라 힘들었던 거겠지.’
로웨나는 오토의 행동을 완전히 다르게, 자기 식대로 해석해 버리고 말았다.
‘엘리제 그 계집애에 대한 의리와 정조 때문에 나를 품고 싶어도 참은 거야. 하긴. 아무리 그 계집애가 예쁘다고 한들 나와는 다른 매력이니까. 우리 동생. 얼마나 힘들었을까. 한참 때라 혈기왕성할 텐데.’
로웨나는 오토를 걱정해 주는 한편, 엉뚱한 생각을 품었다.
‘그래. 엘리제 그 계집을 첩으로 밀어내려면… 황제 정도는 되어야겠지.’
안 그래도 꿈틀대던 야망이, 엉뚱한 계기로 인해 스멀스멀 피어오르며 로웨나의 황위에 대한 열망을 불살랐다.
‘내 반드시 황위에 올라… 동생을 내 정실 남편으로 만들고야 말 것이다. 기필코.’
그렇게 생각하는 로웨나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야망의 트리거가 눌려서, 비로소 본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 * *
다음 날.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로웨나가 오토에게 미소 지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협정서에 옥새는 직접 찍어야 할 테니까.”
협정서라는 게 무슨 시골 바닥에서 대충 써 갈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양측 실무자들이 서로 협의를 통해 상의하고 수정해서 마무리 짓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 끝은 국왕인 오토와 로웨나가 도장을 찍는 것.
결국, 오토와 로웨나는 가까운 시일 내게 다시 만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하하… 하하하….”
“다음 달에 봐. 완연한 봄이 왔을 때.”
“…알겠습니다.”
오토는 로웨나가 노골적으로 재회를 암시하자 매우 난감했다.
‘이건 100퍼센트다. 아도니스한테 향해야 할 감정과 집착이 나한테 온 거다.’
오토는 로웨나의 심경 변화를 확인하면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카심 경.”
“예, 전하.”
“에르제베트 왕국의 국경 마을로 가죠.”
“예?”
카심은 오토가 뜬금없이 에르제베트 왕국으로 가자는 이야기에 당황했다.
현재 에르제베트 왕국은 오토 일행에게 있어 적진 한복판이나 다름없는 곳이 아니던가?
“찾아야할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끼리 까막이만 타고 다녀오죠. 조용하게.”
많은 숫자의 와이번들이 떼 지어 몰려다니면 눈에 띌 게 분명했으므로, 오토는 까막이 한 마리만을 타고 소수 인원들로만 침투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목적 자체가 군사적 목적이 아니라 아도니스란 인물을 찾는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기에, 굳이 많은 병력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여기.”
오토가 지도를 가리켰다.
“목적지는 여기 이 마을인데. 좀 떨어진 지역에 내려서 까막이 기다리게 하고, 우린 걸어서 이동하죠. 목적지 근처에는 까막이가 몸을 숨길 만한 장소가 없으니까.”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오토 일행은 까막이를 타고 에르제베트 왕국으로 침투하고, 나머지 용기사들은 각자의 와이번들을 이끌고 이오타 왕국으로 복귀했다.
그로부터 몇 시간 뒤.
에르제베트 왕국에 침투한 오토 일행은 까막이와 핑이에게 산속에 숨어 있도록 한 뒤 걸어서 목적지로 향했다.
거리가 꽤 멀었지만 오토와 카미유, 카심의 이동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슉! 슈욱!
오토가 트릭스터의 재간 권능 중 하나인 축지법을 이용해 목적지까지의 거리를 압축시켰고, 그 덕분에 일행은 단순히 걷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빠르게 이동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던 그때.
“으아아아아아아악!”
“꺄아아아악!”
“사, 살려 주십시오!”
“모두 도망쳐!”
목적지로 향하던 오토 일행은 열 가구도 채 되지 않는 작은 시골 마을을 지나가다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검은 군복을 입은 병사들이 마을을 습격해서, 마구 학살을 저지르고 있었다.
“노인과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죽이고.”
검은 갑옷을 입은 죽음의 기사가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남자들을 포획하라.”
병사들은 그런 죽음의 기사의 명령에 따라 마을의 노인, 여자, 아이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는 한편 남자들을 생포해 왔다.
“후우우.”
기사가 잡혀 온 마을 남자들에게 죽음의 숨결을 내뿜었다.
“내, 내 몸이… 내 몸이….”
“으아아아악!”
죽음의 숨결에 노출된 남자들은, 빠르게 몸이 썩어 들어가며 살아 있는 시체가 되어 갔다.
‘모병관!’
오토는 마을 남자들을 죽음의 병사로 만들어 내고 있는 기사가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다.
부패여왕으로 부활한 바토리는 왕궁 지하에 잠들어 있던 에르제베트 왕국의 호국영령들을 일깨운다.
그런 호국영령들은 에르제베트 왕국에서 영웅의 칭호를 받았던 이들로서, 저마다 고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아퀴나스란 기사는 모병관이라는 자신의 권속들을 이용해 죽음의 병사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즉, 지금 마을 남자들을 죽음의 병사들로 만들고 있는 기사가 그 아퀴나스의 권숙 중 하나였던 것이다.
그렇다는 말은…….
‘바토리가 아퀴나스에게 죽음의 병사들을 만들어 오란 명령을 내렸어. 아퀴나스는 자기 모병관들을 인적이 드문 작은 마을들로 보내서 죽음의 병사들을 만들어내고 있는 거고.’
그때.
“어떻게 합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어떡하긴.”
오토가 검을 뽑아 들고 마을을 향해 내달렸다.
“도와줘야지.”
오토는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게다가 적진 한복판에 침투한 이상 조용히 넘어가는 게 최선이긴 했다.
하지만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끔찍한 학살을 모른 척 넘어갈 순 없었다.
“카미유, 카심 경.”
오토가 카미유와 카심을 돌아보았다.
“예, 여기 있습니다.”
“예, 여기 있습니다.”
카미유와 카심이 대답했다.
“한 놈도 빠짐없이 다 죽여 버리죠. 조용하게.”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냅다 내달려 가장 가까이에 있던 죽음의 병사를 반으로 갈라 버렸다.
* * *
오토, 카미유, 카심은 모병관과 죽음의 병사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정리해 버렸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오토 일행이 가진 마나의 특성 덕분이었다.
천둥산에서 얻은 기연 덕분에, 오토와 카미유, 카심의 마나는 기본적으로 명(明)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모병관과 죽음의 병사들은 언데드 계열 타입이라서, 명속성 에너지가 약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카미유가 익힌 검술도 명속성의 마나와 찰떡궁합이었고, 카심이 가진 네 자루의 명검 중 광명검도 명속성이었다.
그러다 보니 전투가 쉬운 건 당연했다.
특히나, 카심의 활약은 매우 눈부셔서 오토와 카미유가 딱히 나설 필요가 없을 지경이었다.
파지지지지지직!!!
카심이 가진 광명검으로부터 뿜어져 나온 전류와 빛은 모병관과 죽음의 병사들을 아예 녹여 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이, 이거 왜 이렇게 세???”
오죽했으면 광명검을 휘두른 카심조차도 그 위력에 놀라서 검을 떨어뜨릴 뻔했을까.
아무래도 천둥산에서 광명검을 피뢰침처럼 사용했던 것 때문에, 전기 에너지가 과충전 상태였던 듯했다.
“…….”
“…….”
오토와 카미유는 그런 카심을 보고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저 인간은 왜 뒤로 넘어져도 강해지는 거야?’
이쯤 되면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했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크으윽…!”
오토는 반쯤 녹아 쓰러진 모병관을 다가가 물었다.
“아퀴나스의 위치는?”
모병관이 있다는 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아퀴나스가 있다는 뜻이었기에 던진 질문이었다.
“그, 그걸 말할 것 같은ㄱ….”
“위치는.”
“……!”
“아퀴나스는 현재….”
오토와 눈을 마주친 모병관은 진실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오토가 영혼강탈의 권능을 사용해 죽어가는 모병관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강제로 진실을 말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모병관의 말에 따르면, 아퀴나스는 이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숲에서 대기하고 있다고 했다.
죽음의 병사들을 만들어 온 모병관들을 기다리면서.
“그럼 아퀴나스가 너희 모병관들에게 이 일대의 작은 마을들을 습격해서 병사들을 만들어 오라고 시켰나?”
“그렇습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
화가 난 오토가 모병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털썩!
두 동강 난 모병관의 시체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퀴나스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고, 모병관들이 움직이고 있다면. 아도니스의 고향 마을로 위험해. 서둘러야 돼.’
여기서 아도니스의 고향 마을까지는 고작해야 1.5킬로미터 남짓.
매우 가까운 거리라, 지금쯤 아도니스의 고향 마을도 모병관과 죽음의 병사들에 공격받고 있을 확률이 컸다.
최악의 경우 이미 아도니스가 죽음의 병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가자.”
오토가 카미유와 카심을 잡아끌었다.
“여러분들은 빨리 이 지역을 탈출해서 아라드 제국으로 도망치세요! 어서!”
오토는 마을 사람들과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눌 겨를도 없이, 카미유와 카심을 데리고 아도니스의 고향 마을로 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