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5화
같은 시각.
오토가 아도니스의 고향 마을에서 그의 전사 소식을 듣고, 핵심 인물인 아퀴나스를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무렵.
로웨나는 지난 전투에서 생포한 에르제베트 왕국군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로웨나가 이끄는 아라드 제국군은 오토가 우르크 평원에서 바토리를 끌어들이는 동안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토를 침공했다.
사실 그런 로웨나의 군사적 행동은 대규모 전면전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대규모 병력을 움직였다 뿐이지, 크게 전투를 치른 건 아니었다.
실제로 전투를 치른 건 소수 병력을 침투시켜 후방을 흔드는, 일종의 무력도발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무력도발에서도 아라드 제국군은 승리를 거두었고, 그 결과 꽤 많은 에르제베트 왕국군을 죽이고 몇십 명 정도의 포로를 생포했다.
오늘은 그 당시 생포했던 포로들에 대한 재판이었고, 로웨나는 아라드 제국군의 총사령관으로서 직접 판결을 내렸다.
“나, 아라드 제국의 황녀이자 공국의 왕 로웨나는.”
로웨나가 냉혹한 표정으로 에르제베트 왕국군 포로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피고인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형의 집행 방식은…….”
판결을 내리기 직전 로웨나의 두 눈에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피고인들에게 거열형, 능지형, 팽형을 선고한다.”
땅, 땅, 땅.
로웨나가 망치를 세 번 내리쳐 형을 선고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그냥 깔끔하게 죽여 줘도 모자랄 판에!”
“제발… 제발 자비를 베푸소서… 제발….”
사형수들, 즉 포로로 붙잡혔던 에르제베트 왕국군은 로웨나의 판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거열형은 사람의 팔, 다리, 머리를 소나 말에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
능지형은 갈기갈기 찢어 죽이는 형벌.
그리고 팽형은 사람을 산 채로 삶거나 기름에 튀겨 죽이는 형벌이었다.
포로로 붙잡힌 에르제베트 왕국군이 제아무리 아라드 제국군을 죽인 이들이라고 한들, 지나치게 가혹한 판결이었다.
전쟁에서 적을 죽이는 건 불가항력적인 것이라, 보통은 포로교환이나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 마련이었다.
또한, 죽이더라도 편안하게 갈 수 있게끔 참수형이나 교수형 같은 평범한 방법을 선택하는 게 관례이기도 했다.
그런데 에르제베트 왕국군의 고위급 장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범도 아닌 일개 병사들을 그런 식으로 죽이겠다니.
“저, 전하.”
“그건 너무 지나치신 것 같사옵니다.”
오죽했으면 로웨나의 측근들조차 조심스레 그녀를 말렸을까.
하지만 로웨나는 요지부동이었다.
“감히 내 판결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냐?”
로웨나가 살기등등한 눈을 빛냈다.
“저들은 대제국 아라드의 군인들을 죽인 놈들이다. 그런 놈들은 가만히 놔둘 순 없지 않겠느냐. 보여 주어야 한다. 감히 대제국 아라드의 군대에 대적하는 놈들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
로웨나는 사형수들을 본보기 삼아 아라드 제국의 적들을 공포로서 찍어 누를 생각이었다.
적들의 사기를 꺾기 위해서 말이다.
“형은 에르제베트 왕국군이 잘 볼 수 있는 곳에서 집행하라. 죄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과 비명이 잘 들리도록. 알겠느냐.”
“예, 전하.”
결국, 로웨나는 그 무시무시한 형벌에 대한 판결을 번복하지 않았다.
다음 날.
에르제베트 왕국의 요새와 가장 가까운 아라드 제국의 영토 안에서, 형벌이 집행되었다.
그곳은 에르제베트 왕국군과 아라드 제국군이 서로 군대를 주둔시켜 놓은 국경지대로서, 양측 거리는 불과 1.5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형수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정말이지 끔찍한, 형벌에 당하는 사람의 고통이 피부로 와닿을 정도로 처절한 절규가 울려 퍼졌다.
“저, 저런!”
“으으으으으으!”
“맙소사… 그만… 그만해… 그만…!”
에르제베트 왕국군은 그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치를 떨었다.
거열형, 능지형, 팽형에 당하는 아군을 보고 있노라니 너무나도 끔찍해서 완전히 질려 버린 것이다.
심지어 형을 집행하는 아라드 제국군 병사들 역시 차마 눈 뜨고 그 광경을 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단 한 사람.
씨익-
로웨나만은 그 광경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즐거워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은 아라드 제구그이 오랜 적이자 또한 로웨나의 적이었다.
로웨나가 마음 편히 반란을 일으키기에는 후방이 불안했으므로, 에르제베트 왕국이라는 강대국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과 동맹을 맺고. 에르제베트 왕국을 정벌한 뒤에. 동생과 힘을 합쳐 그 멍청한 자식을 황위에서 끌어내릴 것이다.’
로웨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고는 와인을 한잔 마시며 느긋하게 지켜보았다.
죄수들에게 가해지는 끔찍한 형벌을 안주 삼아서.
* * *
아도니스의 고향 마을을 나선 오토는 까막이를 타고 공중정찰을 실시하며, 아퀴나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왜?
아퀴나스가 모병관들만을 보냈을 리 없었으니까.
아퀴나스와 모병관들은 항시 붙어 다니기 마련이었고,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봐야 10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오토는 알고 있었다.
‘모병관들이 죽음의 병사들을 아퀴나스가 숨어 있는 곳으로 보냈을 텐데.’
죽음의 병사들을 대놓고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로 데려갈 순 없는 법.
그래서 아퀴나스는 이른바 <부패한 훈련소>라는 장소를 차리고, 그곳에서 언데드 병사들을 훈련시키며 더욱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를 하는 패턴을 지니고 있었다.
문제는 부패한 훈련소의 위치가 플레이어에게도 드러나지 않아서, 오토조차도 그걸 모른다는 것.
오토도 바토리로 게임을 플레이한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부패한 훈련소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애초에 게임에서 훈련소의 위치를 자세하게 묘사하지 않았고, 그저 에르제베트 왕국의 서쪽 어딘가라고 표현되어 있었던 것이다.
‘어디 숨어 있는 거냐.’
오토는 투시 스킬을 활용해 계속해서 일대를 정찰하며, 모병관들과 죽음의 병사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언젠가부터 강력해진 투시 스킬은, 사용하기에 따라 거의 확대경처럼 활용하는 것도 가능했다.
즉, 까막이에 탄 오토는 고성능 정찰기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비행하며 땅을 주시하던 오토는, 마침내 아퀴나스의 현재 위치를 파악하는 실마리를 얻었다.
저 멀리 한 명의 모병관이 수십여 명의 죽음의 병사들을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포착한 것이다.
그 결과.
“아.”
오토는 그제야 부패한 훈련소의 위치를 파악하고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병관과 병사들이 향한 곳은 과거 이 지역에서 전사한 아라드 제국군을 기리는 유적지였다.
아주 먼 옛날에는 아라드 제국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토가 되는 바람에 버려진 곳이었던 것이다.
‘지하다.’
오토는 모병관들과 병사들이 버려진 유적지로 들어가 자취를 감춘 걸 확인하고, 부패한 훈련소가 지상이 아닌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 많은 언데드 몬스터들이 감쪽같이 모습을 숨기는 게 불가능할 테니,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이제 어떻게 합니까?”
카미유가 물었다.
“음.”
오토는 잠시 고민했다.
‘저길 들어가는 게 자살행위긴 한데.’
생각 같아서는 마정석 폭탄을 잔뜩 투하해서 가루로 만들어 버리고 싶었고, 충분히 가능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외부에서 포탄을 떨어뜨려봤자 지하에 있는 시설물이 타격을 입을 가능성은 적었다.
공간이 무너진다 한들 다른 언데드 몬스터들은 파괴될지언정 아퀴나스까지 깔려 죽을 리 없었다.
공기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깔려 있다가 다시 기어 나오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폭파시키더라도 내부에서 폭파시켜야 돼.’
오토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가장 확실한 건 직접 아퀴나스의 목을 치는 거고.’
그렇다면…….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기어들어 가야 하긴 하겠지.”
“저길 들어가시겠단 말씀이십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알아.”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할 땐 해야 되는 거잖아.”
“하지만….”
“적들의 고급 병력 생산을 원천봉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야. 바토리 혼자서는 많은 언데드들을 만들어낼 수 없거든.”
“알겠습니다.”
“일단 여기서 대기하면서, 본국에 지원을 요청해야겠어. 폭탄이 많이 필요할 테니까.”
“예, 전하.”
결국, 오토는 언데드들의 소굴인 부패한 훈련소에 들어가기로 했다.
위험하긴 했지만, 작전에 성공했을 때의 이득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감수할 만한 메리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 * *
한편, 쿠란의 치매는 나날이 심해져만 가고 있었다.
하루 중 제정신일 때가 1시간이 채 되지 않을 정도로, 이 늙은 드래곤의 병세는 점점 깊어져만 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노환까지 들면서 늘 병석에 몸져눕기 일쑤였다.
올리브는 오토를 대신해 그런 쿠란을 정성껏 간호해 주었다.
“드래곤인 내가 이렇게 약해지다니… 정말 서글프구나….”
“아이, 참. 또 그러신다. 드래곤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나중에 하시고. 밥 드셔야죠. 자, 아.”
올리브는 쿠란이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녀는 고지식한 구석이 있어서,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런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믿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식사가 끝난 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새끼라도 한 마리 낳을 것을….”
“어르신은 자손을 보지 않으셨나요?”
“먼 옛날에 그럴 뻔한 적이 있었다네. 하지만 그러지를 못했지.”
쿠란이 서글픈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드래곤들에게 큰 재앙이 닥치는 바람에 그럴 겨를이 없었네. 슬프게도 말일세.”
“큰 재앙이요?”
사실 올리브는 쿠란이 멀쩡한 상태라고 생각지 않으면서도, 말을 받아주었다.
“먼 옛날. 다른 차원의 문명이 우리 세계를 침공해 오려던 사건이 있었다네.”
“그러세요?”
“우리 드래곤들은 이 세계를 지켜내기 위해 시공의 폭풍을 열고, 다른 차원의 문명을 그곳으로 끌어들여 전투를 치렀다네.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우리 종족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머, 그러셨구나.”
올리브는 쿠란이 제정신이 아닌 줄 알고 최대한 이야기를 받아주었다.
“갈 때가 되니 그녀가 보고 싶구먼….”
쿠란이 옛 연인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 전쟁이 끝나면… 다시 이 세계로 돌아와서 결혼하고 알도 낳기로 하였거늘….”
“많이 속상하시겠어요, 어르신.”
“그녀의 마지막을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게 못내 한이로구나… 그녀의 곁을 지키고 싶었거늘….”
생을 마감하는 시기가 다가옴에 따라서, 쿠란은 정신이 들 때면 옛날 생각을 할 때가 많았다.
드래곤들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자신이 마지막 남은 드래곤이 아니던 그 시절을.
“어르신. 조금만 참으세요. 곧 전하께서 어르신의 치매를 치료하실 테니까요.”
올리브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쿠란의 입가에 묻은 죽을 닦아주며 말했다.
“치료제의 개발은 이미 끝났고, 원료가 수입되는 대로 제조할 계획이라고 해요.”
“그, 그게 정말이냐!”
쿠란이 올리브의 말을 듣고 눈을 번쩍 떴다.
적어도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만큼은 맨정신에 삶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자 희망이 생긴 것이다.
“정말로 내 치매가 치료되는 게냐?”
“어머.”
올리브는 쿠란이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다가, 치매 치료에 대한 희망을 보이자 솔직히 좀 놀랐다.
‘치매가 아니더라도 정신이 이상하신 건가? 아니면 원래 허풍이 좀 심하신 성격이신가?’
쿠란의 진짜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올리브로서는 그저 아리송할 따름이었다.
“눈 감는 그날 제정신일 수만 있다면… 정말 그런 행운이 찾아온다면….”
“꼭 그러실 수 있을 거예요. 앞으로 한 달 정도만 기다리시면….”
“누구… 세용???”
“…….”
“응애. 나 애기 두래곤. 응애.”
올리브는 문득 피곤해져서 그 솥뚜껑만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며 괴로워했다.
아무리 정성껏 돌봐준다고 한들 이렇게 오락가락 대화의 흐름이 끊길 때면 힘이 쭉 빠지는 데다가 그 피로감이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