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1화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
솔직히, 오토는 교황의 치매를 치료해도 될지 말지 확신할 수 없었다.
‘원래 그냥 죽을 인물인데.’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교황의 치매는 치료되지 않는다.
애초에 치매는 불치병인지라 점점 더 악화될 뿐 좋아질 수 없는 질병이기도 했고.
교황은 벌써 수년째 치매를 앓고 있었고, 결국 발을 헛디뎌 뇌진탕으로 인해 사망할 운명이었다.
그로 인해 신성 아즈란 제국은 내전에 휩싸이게 되고, 그때부터 군주 캐릭터인 성검 미카엘의 본래 시나리오가 시작된다.
만약 본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기를 원한다면, 오토는 교황의 치매를 치료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가 교황의 치매를 치료하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다이애닌의 약효를 대륙에 알리는 것.
교황같이 유명하고 영향력이 큰 인물이 치료되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전 대륙이 다이애닌의 존재를 알게 될 터.
이는 알퐁달 어르신의 뜻을 받드는 것이기도 했고, 이오타 왕국의 재정을 크게 늘려 줄 것이었으며, 대륙인들이 다이애닌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치매 없는 세상이 만들어질 터였다.
둘째, 신성 아즈란 제국에는 오직 교황만이 다룰 수 있는 성물이 하나 있었다.
그 성물은 언데드들에게 매우 치명적인 권능이 담긴 것으로, 앞으로 에르제베트 왕국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오토에게 매우 유용한 아이템이었다.
즉, 다이애닌의 홍보 겸 성물 획득 겸 겸사겸사 교황의 치매를 치료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여긴 대륙 동부라 우리랑은 좀 멀긴 하지.’
게다가 신성 아즈란 제국은 이오타 왕국과는 매우 먼 곳으로, 뭔가 변수가 생긴다 한들 크게 영향을 끼칠 것 같지가 않았다.
‘일단 미카엘을 만나서 친분을 쌓고, 교황의 치매부터 치료하고. 변수가 생기면 그때 대응하자.’
살짝 걱정이 좀 됐지만, 오토는 일단 그런 생각으로 미카엘의 집으로 향했다.
미카엘의 집은 수도 외곽에 자리한 자그마한 신전이었고, 역사상 최연소 추기경이 운영하는 곳답지 않게 매우 소박했다.
사실 신전이라고 부르기에도 뭣한 것이, 미카엘이 운영하는 신전은 기도를 드리는 곳이라기보다는 그저 작은 고아원이었다.
미카엘은 이곳에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맡아 기르면서 생활하고 있었으며, 나라에서 받는 봉급의 대부분을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나눠 주는 데 쓰고 있었다.
뛰어난 무력.
투철한 신앙심.
그리고 개인의 부귀영화보다 세상의 평화와 안녕을 바라는 선한 마음.
미카엘은 아즈란 제국의 성스러운 검이란 칭호에 걸맞은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다.
단, 그런 인물이니만큼 상대적으로 플레이하는 입장에서는 재미가 좀 떨어져서 그리 인기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다.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캐릭터인지라 썩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시나리오가 탄탄한 편도 아닌지라 비주류 캐릭터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맹으로 끌어들였을 때는 최고지.’
비록 비주류 캐릭터였지만, 성검 미카엘의 진정한 가치는 다른데 있었다.
‘아군 치료에는 아즈란 제국군만한 동맹이 없지.’
아즈란 제국의 기사들은 모두 성기사들이었기에, 신성력을 이용한 버프 효과가 가히 대단했다.
비록 공격력은 동급의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다소 낮았지만, 그들이 가진 아군 강화 능력은 가히 최고였다.
게다가 응급조치에도 매우 뛰어나서, 전투 중에도 죽어가는 병사들을 살릴 수 있었다.
오죽했으면 아즈란 제국의 기사단을 성기사단이 아닌 좀비기사단이라고 부를까.
그러다 보니 많은 게이머들은 성검 미카엘을 직접 플레이하기 보다는 동맹을 만들고, 성기사들을 지원받는 걸 선호했고 오토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신전을 지키던 성기사가 오토 일행에게 물었다.
“저는 이오타 왕국의 국왕 오토 드 스쿠데리아라고 합니다.”
“아.”
성기사가 오토를 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오토는 상당히 유명한 인물이 되어 있었다.
신흥강국 이오타 왕국의 젊은 군주가 대륙제일미남이란 소문이 퍼지면서, 대륙 어딜 가나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긴 것이다.
“어찌 이오타 왕국의 국왕 전하께서 공식적인 방문을 하지 않으시고….”
“개인적인 방문이라 조용히 왔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미카엘 추기경님을 뵐 수 있겠습니까?”
“미리 약속을 하셨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미카엘 추기경님을 뵙기 위해서는 미리 약속을 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이오타 왕국의 국왕 전하이실지라도…….”
“기부금을 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그 성기사가 180도 변한 태도로 냉큼 대답하더니, 문 안쪽으로 사라졌다.
“뭐, 뭡니까?”
카미유는 성기사가 기다렸다는 듯 사라지자 황당해했다.
“기부금을 내면 되는 거였습니까?”
“응.”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성검 미카엘은…….”
“……?”
“돈이면 다 되는 인물이야.”
“예???”
“엄청 밝히거든, 이거.”
오토가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며 눈을 찡긋했다.
신성 아즈란 제국의 성스러운 검인 미카엘 추기경은, 알고 보면 돈에 환장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 * *
“혹시 기부금을 얼마나 내실 수 있으십니까?”
안쪽으로 사라졌던 성기사가 다시 나타나 오토에게 물었다.
“이만큼 내겠습니다.”
오토가 금화가 잔뜩 든 커다란 자루를 성기사에게 내밀었다.
“헉!”
성기사의 눈이 크게 떠졌다.
오토가 내민 자루에 금화가 어찌나 많이 들어 있던지, 이만하면 가히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약 1분 후.
우당탕탕!
다다다다다다다다!
누군가 황급히 들려오는 소리와 함께 레몬 빛깔 머리칼을 가진 금발의 미청년이 나타나 오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딱 봐도 어마어마한 기부금 액수에 버선발로 달려온 것이 분명했다.
“어서 오십시오!”
미카엘이 오토에게 인사를 건넸다.
“확실하게 모시겠… 아니,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전하.”
오토는 미카엘이 무슨 유흥업소의 실장처럼 말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여간 돈은 오지게 밝혀요.’
미카엘은 재미가 없어서 비주류 캐릭터였지만, 성격은 꽤나 재밌는 구석이 있는 인물이었다.
특히나, 돈 문제에 있어서 그랬다.
미카엘은 자본주의의 신앙, 돈카엘, 돈미새 등등 돈에 관한 여러 가지 재미있는 별명을 붙은 인물이었다.
왜?
그만큼 밝혔으니까.
사악한 행위가 아니라면, 미카엘은 돈만 주면 뭐든 해 주는 성기사계의 용병 같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저 역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미카엘 추기경님.”
“아닙니다.”
미카엘이 고개를 저으며 오토 일행을 신전 안으로 안내해 주었다.
“이렇게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자주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예.”
“그런데 어쩐 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미카엘이 오토에게 물었다.
“혹시 오토 전하께서 복지사업에 관심이 있….”
“그건 아닙니다.”
오토가 딱 잘라 말했다.
“단언컨대, 저는 복지사업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쩝.”
미카엘이 입맛을 다셨다.
“그거 참 아쉽게 됐습니다.”
“…….”
“전하와 같은 재력가분들이 많은 후원을 해 주셔야 가난과 싸우는 저희 성기사들이 힘을 더 얻을 텐데요.”
미카엘은 오토의 단호한 태도에 매우 아쉬워했다.
“가난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많은 군자금이 필요하지요. 하하하.”
“아, 예.”
“혹시 마음이 변하신다면….”
“그럴 일 없습니다.”
“그래도 주기적으로 작게나마 기부를….”
“안 해요.”
“그럼 혹시….”
“안 한다고! 안 해!”
참다못한 오토가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어떻게 해서든 기부금을 뜯어내려는 미카엘의 개수작에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죄, 죄송합니다.”
미카엘이 오토에게 사과했다.
“최근에 군자금이 많이 부족해서….”
“아, 예.”
오토가 빈정거렸다.
“그러시겠죠. 매일 밤 복면 쓰고 용병 노릇 해서 버신 돈은 다 어디다 쓰셨을까.”
“……!”
“은근히 알부자라고 들었는데. 아닙니까?”
그 순간.
촤락!
미카엘이 번개처럼 검을 뽑아 들고 오토에게 겨눴다.
“당신, 정체가 뭡니까.”
미카엘이 싸늘한 어조로 오토에게 물었다.
처억!
그러자 카미유와 카심도 이에 질세라 검을 뽑아 들고 미카엘의 목 언저리를 겨눴다.
“귁! 귁귁귁!”
펭이 역시 전에 오토가 선물해 준 대파를 뽑아 들고 미카엘을 겨눴다.
도대체 대파는 왜 겨누는 건데….
저건 언제 준 건데 아직도 안 시들었어? 무슨 SSS급 대파야 뭐야…
미카엘은 무려 세 사람―한 명은 펭귄이었지만―에게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물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말했잖습니까. 오토 드 스쿠데리아.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라고.”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죠. 미카엘 추기경. 아니….”
오토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미카엘에게 말했다.
“해골가면이라 불러야 하나?”
* * *
100인의 군주 중 하나이자 게임 영지전쟁의 주인공 캐릭터인 미카엘의 초반 시나리오는, 해골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용병으로서 다양한 의뢰를 수행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성검 미카엘은 해골가면을 써 정체를 숨기고 타락한 성직자들을 응징하고, 다양한 의뢰를 수행해서 돈을 벌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곳곳에 고아원을 세우고,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미카엘이 제아무리 최연소 추기경이라 할지라도 성직자인 이상 월급에는 한계가 있었고, 단순히 기부금을 받아서는 그 많은 금액을 감당하는 게 불가능했다.
그래서 미카엘은 자신을 만나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기부금을 악착같이 뜯어내는 수전노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고, 해골가면으로서 활동할 때도 대단히 난이도 높은 의뢰만을 수행해 막대한 액수의 돈을 챙기곤 했다.
뿐만 아니라, 타락한 성직자들을 응징할 때도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즉, 겉으로는 아즈란 제국의 성스러운 검이지만 음지에서는 해골가면이라는 두 개의 정체성을 지닌 캐릭터였던 것이다.
“…다 알고 오신 겁니까.”
“물론.”
“휴.”
미카엘이 푹 한숨을 쉬며 검을 거두었다.
“꼬리가 길면 밟힐 거라 예상은 했지만… 다른 나라의 왕께서 제 정체를 알아내실 줄은 몰랐습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까요.”
“…….”
“약점을 잡으러 온 게 아닙니다.”
오토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저는 오늘 해골가면을 만나러 온 게 아니라, 미카엘 추기경님을 만나러 온 거니까요.”
“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토가 미카엘에게 말했다.
“저는 교황 성하의 치매를 치료할 예정입니다.”
그 대목에서, 카미유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뭔가 이상하다.’
성검 미카엘은 새로운 교황을 옹립하자는 파벌의 대표주자 격인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을 찾아와 교황을 치료하겠다니?
“그, 그게 정말이십니까?”
놀랍게도, 미카엘은 교황의 치매를 치료하겠단 오토의 말을 크게 반겼다.
“정말로 교황 성하의 치매를 치료할 수 있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아아!”
“본국에서 치매 치료제를 개발해냈습니다. 이미 임상시험도 마쳤고, 효과가 검증된 신약입니다. 이 약이라면 교황 성하의 치매는 말씀하게 치료될 겁니다.”
“그 말씀이 정녕 사실이라면….”
미카엘이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오토를 바라보았다.
“전하께서는 이슈타르 님께서 보낸 천사임이 분명합니다.”
이슈타르는 아즈란 교단에서 모시는 신으로서, 사랑·자비·평화의 신이었다.
그러니 독실한 신앙심을 갖춘 미카엘로서는 오토를 천사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