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3화
‘내, 내가 왜 물러섰지?!’
교황의 침실 앞을 지키던 성기사는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이 어째서 오토와 미카엘 일행을 들여보내 주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보수 파벌에 속한 기사였다.
그런 그의 주요 임무 중 하나는 미카엘이 교황에게 접촉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거였다.
미카엘은 개혁파의 상징적인 인물이라서, 교황과 자주 접촉할수록 보수 파벌 입장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징계를 각오하면서까지 억지로 미카엘의 앞을 가로막았건만, 이오타 왕국의 국왕이라는 작자의 말에 쉽게 물러날 줄이야.
성기사는 스스로의 행동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잠시 오토에게 영혼강탈을 당했다는 걸 꿈에도 모른 채 그저 잠시 미쳤었나 보다,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떻게 하지?’
성기사는 지금이라도 침실 안으로 들어가 오토와 미카엘 일행을 끌어낼까 고민했다가, 그냥 그만두기로 했다.
기왕 엎질러진 물, 이미 교황을 알현하는 오토와 미카엘 일행을 끌어냈다간 징계가 아니라 자칫 불경죄로 기사 작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뭐라 변명거리라도 생각해 둬야겠군.’
성기사는 보수 파벌의 성직자들과 귀족들에게 당할 문책이나 걱정하기로 했다.
그게 지금 그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이었으므로.
한편, 유유히 침실 안으로 들어간 오토와 미카엘 일행은 교황을 알현했다.
“얘들아! 같이 소꿉놀이하자! 헤헤헤헤헤!”
교황은 이 야심한 밤에 유아용 장난감을 가지고 혼자 소꿉놀이를 하다가, 오토와 미카엘 일행을 발견하고는 해맑게 웃었다.
“서, 성하….”
그런 교황을 바라보는 미카엘의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맺혔다.
“어찌 이러고 계십니까… 성하… 아아….”
사실 미카엘도 교황을 본 게 오래간만이라서,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오토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미리 투시 권능을 이용해 교황이 뭘 하고 있는지 봤으니까.
‘마음이 아프겠지.’
오토는 미카엘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미카엘과 교황은 보통의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미카엘은 어린 시절 수도원에 딸린 고아원 출신으로서, 당시 수도원장이 바로 현 교황이었다.
교황은 어린 미카엘을 각별히 아꼈고, 마치 자신의 아들처럼 키워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교황은 미카엘이 검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알아보고, 그가 성기사가 될 수 있도록 후원해 준 인물이기도 했다.
즉, 미카엘에게 있어 교환은 아버지와 다름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마치 카미유와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아버지 오릭스 영주와의 관계처럼 말이다.
“어찌 이러십니까, 성하. 흑흑흑.”
“형아! 왜 울어! 같이 소꿉놀이 하자! 헤헤헤헤!”
“성하….”
“형아는 놀기 싫어?”
“아니옵니다. 제가 놀아 드리겠사옵니다.”
미카엘은 눈물을 머금고 교황과 소꿉놀이를 해 주며,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려 했다.
오토는 한동안 미카엘이 교황과 놀아주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형아, 나 졸려. 이제 잘래.”
“예, 성하. 주무시옵소서.”
신나게 소꿉놀이를 하던 교황이 침대로 가 새근새근 잠에 빠져들었다.
비록 늙은 노인이었지만, 지그시 눈을 감고 곯아떨어진 그 모습이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를 보는 듯했다.
“성하….”
미카엘은 잠든 교황의 손을 꼭 잡아주고 한동안 놓지 않았다.
“뭘 그렇게 걱정해요.”
오토가 미카엘을 위로해 주었다.
“오늘 아침이면 멀쩡해지실 텐데.”
“예?”
“잠드셨으니까 지금 하죠.”
오토가 다이애닌의 병을 따고, 잠든 교황의 입가에 약을 아주 조금씩 흘려 넣었다.
약을 잘 넘기지 못할까 봐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약을 먹일 때 사용하는 주문까지 외워서, 교황이 다이애닌을 잘 흡수할 수 있도록 돕기까지 했다.
그렇게 다이애닌 한 병을 먹인 후.
“좀 기다리죠.”
“알겠습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무렵.
“…으음.”
교황이 눈을 떴다.
“기침하셨습니까, 성하.”
미카엘이 조심스레 교황에게로 다가갔다.
“미카엘, 내 아들아.”
놀랍게도, 교황이 미카엘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다이애닌이 약효를 발휘했고, 교황의 치매가 치료되어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다.
* * *
자고 일어난 교황의 정신은 매우 또렷했다.
“미카엘, 여긴 어쩐 일이더냐?”
“교황 성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내 어찌 너를 알아보지 못하겠느냐? 너는 내 아들과 같은 아이가 아니냐?”
“아아! 이슈타르시여!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미카엘은 교황이 제정신을 차린 걸 보고 연신 교단의 신인 이슈타르를 찾으며 크게 기뻐했다.
‘…이슈타르가 아니라 나라고.’
오토는 그런 미카엘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지만, 그를 탓하지는 않았다.
미카엘은 어려서부터 수도원에서 자라 평생 독실한 신앙을 지닌 채 살아온 인물인지라, 사고회로 자체가 모든 현상을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오토의 은혜를 잊은 게 아니라, 그저 습관적으로 신에게 감사함을 표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허허.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이냐. 이른 아침부터 내 침실에 다 찾아오고. 아들아,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성하, 사실은….”
미카엘이 그간 있었던 일을 교황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
미카엘의 이야기를 들은 교황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그, 그게 정말이냐? 내가 10년 동안이나 제정신이 아니었어? 10년을 치매 증세로 고생한 것까지는 기억이 난다만… 그 후로도 10년을 더 치매에 걸려 있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성하.”
“맙소사.”
교황의 얼굴이 충격으로 물들었다.
하기야, 자신이 10년 동안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터.
“이 일을 어찌한단 말이냐? 교황인 내가 10년 동안이나 제정신이 아니었다니? 아아!”
“이제 괜찮습니다, 성하.”
미카엘이 탄식을 거듭하는 교황을 위로했다.
“이제 치매가 치료되셨으니, 이슈타르 신의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건강하게 오래오래 통치하시면 될 일입니다.”
“치매가 치료되다니?”
교황이 깜짝 놀라서 미카엘에게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치매는 불치병이거늘. 그저 잠시 증세가 호전되어 정신을 차린 것에 불과할 것이다. 큰일이구나, 정말 큰일이야.”
“아닙니다.”
미카엘이 고개를 저었다.
“교황 성하의 치매는 이미 치료되셨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치매가 치료되다니?”
“그게….”
미카엘이 오토와 있었던 일을 교황에게 말해 주었다.
“그, 그게 정말이냐! 정말로 내 치매가 치료된 것이더냐!”
“그렇습니다! 성하!”
“오오! 이슈타르시여! 어찌 이런 기적을 행하시나이까? 오오오!”
“이슈타르께 영광을!”
교황과 미카엘은 사이좋게 이슈타르를 부르며 신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나라고. 내가 했다고. 번지수가 잘못됐다고.”
오토는 그런 교황과 미카엘을 바라보며 약이 바짝 올라 씩씩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원래 저런 사람들이니까.’
오토는 그들이 결코 은혜를 잊은 게 아니라고 확신했고, 그런 오토의 예상이 옳았다.
“정말 고맙소이다. 신흥국 이오타의 국왕이라 하시었소이까? 그대에게 정말로 큰 은혜를 입었소.”
“다 전하 덕분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황과 미카엘이 오토에게 다가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하하. 별말씀을.”
오토는 그제야 심술을 억누르고,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멋쩍어했다.
“이슈타르께 맹세코,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 것이오. 정말 고맙소.”
“저 역시 목숨을 걸고 은혜를 갚겠습니다, 전하.”
당연히 그래야지.
오토는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약속은 지킬 테니까. 한 며칠 기다리면 되겠지.’
오토는 당장 보상을 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교황에게도 한 며칠 정도는 상황을 파악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으므로,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교황으로서는 치매 치료라는 큰 은혜를 입은 이상 어떤 방식으로든 보상을 해야 할 테고, 오토의 요구사항이라면 뭐든 들어줄 게 분명했으니까.
그런 오토의 마음을 알았던 걸까?
“은인께서는 좀 더 머무르실 수 있겠소? 내 일단 정신을 좀 차리고 정식으로 감사드리고 싶소. 지금은 경황이 없어 은인의 은혜에 대해 제대로 된 감사를 표하기가 힘들 것 같소이다. 부디 며칠만 더 머물러 주시오.”
“물론입니다.”
오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 * *
그날 오후.
아즈란 제국의 추기경 급 이상의 고위 성직자들과 중신들을 때아닌 몬스터 웨이브 때문에 긴급히 회의를 진행했다.
헤즈볼라 산맥으로부터 시작된 몬스터 웨이브가 점점 더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음은 물론, 도저히 믿기 힘든 증언까지 튀어나온 통에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한바탕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도대체 그걸 믿으란 말이오? 요즘 세상이 어디 때인데! 드래곤이 웬 말이란 말이오!”
“드래곤은 무슨!”
“엉뚱한 소리들 마시오! 그 따위 보고를 올린 놈들은 당장 이단심문관들에게 잡혀 가야 옳소!”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믿기 힘든 보고는 그리 중요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왜?
드래곤은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니까.
지난 1,000년 동안 드래곤이란 생명체는 코빼기도 비춘 적이 없어서, 이제는 멸종했다는 게 정설이었다.
심지어, 요즘엔 드래곤을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상상의 동물로 취급하는 분위기마저 강했다.
때문에, 긴급히 소집된 회의의 주요 안건은 누가 주체가 되어 몬스터 웨이브를 토벌하느냐는 거였다.
“지금 그게 중요하오?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고 하질 않소이까? 어서 군대를 배치하고 방어를 해야 하오!”
“물론 그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몬스터 웨이브로부터 수도를 방어할 부대로 어떤 부대를 보내느냐가 중요하질 않소!”
“그러니까 1군단이 가면 될 것이 아니오!”
“아니! 1군단은 수도를 방어하는 군단인데! 수도를 벗어나 몬스터 웨이브를 막으러 가면 수도는 누가 지킨다는 말이오? 2군단이 가야 하오!”
“수도를 1군단이 지키지 2군단이 왜 지킨다는 말이오?”
보수 세력과 개혁 세력은 어떤 부대를 보내야 할지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며 논쟁을 벌였다.
현재 아즈란 제국은 군부마저도 세력이 둘로 나뉘어 있었고, 각 부대의 사령관인 장성급 장교들 역시도 파벌에 따라 권력다툼을 벌이는 중이었다.
그래서 두 세력은 서로 몬스터 웨이브에 맞서 싸우는 걸 미루며,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추태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 전투에 나서는 부대는 큰 피해를 입을 게 분명했으므로 두 세력 모두 자신들과 친한 장성급 장교가 지휘하는 부대가 이번 임무를 맡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장 수도가 몬스터 웨이브에 휩쓸릴 판국이었음에도…….
그렇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던 중.
“교황 성하 납시오!”
시종의 외침과 함께 교황이 실로 오래간만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어찌 교황 성하께서?’
‘이 무슨?’
고위 성직자들과 중신들은 파벌에 관계없이 교황의 등장에 매우 놀랐다.
교황이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게 무려 10년 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보수 파벌에 속한 이들은 바짝 긴장했다.
교황의 뒤를 따르는 미카엘의 모습이 매우 거슬렸던 것이다.
‘도대체 무슨 수작이지?’
‘미카엘! 이 교활한 놈! 치매에 걸린 노인네를 끌고 오다니!’
‘뭔 바람이 불어서.’
그러는 사이.
“보고를 받고 급히 오느라 미리 기별을 넣지 못하였노라.”
옥좌에 앉은 교황이 입을 열었다.
“한데, 그대들은 무얼 하고 있는가.”
교황이 고위 성직자들과 중신들에게 물었다.
“지금 몬스터 웨이브가 발생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는데, 도대체 그대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 물었다. 어찌 아무도 대답이 없는가.”
그 순간.
‘이 무슨?’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잠깐 제정신이 든 것인가?’
고위 성직자들과 중신들은 교황의 180도 달라진 모습에 당황했다.
교황이 말하는 것만 들어보면, 도저히 치매에 걸린 70대 노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