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8화
한편, 부패한 거미여왕으로 변이한 바토리는 왕궁 지하에 자리한 지하 무덤에서 계속해서 알을 낳고 있었다.
“캬아아악!”
“캬아악!”
알에서는 온몸에 썩어들어가는 기괴한 몬스터들이 태어나며 그 수를 불려 나가고 있었다.
“으악! 괴, 괴물이다! 괴물이야! 으아아아악!”
“사, 살려 줘어어어어어!”
죽음의 기사들은 바토리에게 살아 있는 인간들을 먹이로 바치며, 그녀가 알을 더 많이 낳을 수 있도록 도왔다.
바토리는 부하들이 가져다 바치는 인간들을 산 채로 잡아먹으며, 계속해서 알을 낳는 데만 집중했다.
아퀴나스를 잃은 이상 바토리로서는 이 방법밖엔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소문.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왕궁과 수도에 기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수도를 중심으로 바토리가 사실은 사악한 언데드이자 괴물인 거미여왕이며, 매일 같이 사람들을 잡아먹는단 소문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왕궁에 출입하는 귀족들이 이미 언데드가 되어 거미여왕 바토리에게 백성들 제물로 바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건 꽤나 설득력 있는 소문이었다.
현재 에르제베트 왕국의 중앙귀족들은 전투준비태세를 갖춘단 핑계로 늘 갑옷을 착용하고 다녔는데,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들의 처자식들마저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을 정도였으니, 소문이 퍼지는 속도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지방귀족들은 사실의 진위를 가리기 위해 수도에 사람을 파견했다.
“맙소사!”
“그들이 모두 언데드가 되었다니!”
“어찌 이 나라가 사악한 언데드들의 손에 넘어갔는가!”
지방귀족들과 영주들은 사실을 확인하고 경악을 금치못했다.
그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이미 에르제베트 왕국의 중앙귀족들은 언데드화가 진행되어 있었다.
심지어 왕궁 내에서 생활하는 시종·시녀들조차 언데드가 되어 버린지 오래라 했다.
이에 에르제베트 왕국의 지방귀족들과 영주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사태 해결을 위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어찌 우리의 조국을 사악한 언데드들에게 넘겨줄 수가 있겠소이까?”
“이미 왕조는 끝났소.”
“가만히 있다간 우리까지 언데드가 되고 말 것이오.”
전국 곳곳에서 반란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할 무렵.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지 3개가 뭉쳐서 이루어진 <자유동맹>이 나타나 반란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자유동맹에서 내세운 영웅은 에르제베트 왕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해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으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 영웅의 이름은 카이로스라 했고, 그의 대활약으로 인해 에르제베트 왕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그건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한때 강대국으로서 대륙의 서쪽 지역을 완벽히 장악하고 군림하던 에르제베트 왕국이, 동시다발적인 반란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 * *
빛의 속도로 드래곤의 레어로 쳐들어간 엘리제.
‘약혼자를 괴롭히는 자는 누구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엘리제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그녀도 사람인 이상 드래곤이 두려울 법도 했다.
하지만 약혼자인 오토의 목숨이 걸린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졌다.
오토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엘리제는 그 어떤 적과도 맞서 싸울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애초에 상대가 누구이든 간에 절대 흔들리지 않을 부동심을 가진 그녀이기도 했고.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하나.
‘제발, 제발 무사해라. 부탁이다.’
이 세상에서 엘리제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오토를 잃는 것.
‘만약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드시 복수할 거다. 내 모든 걸 쏟아 부어서라도.’
드래곤이 오토를 죽였다면, 엘리제는 복수귀가 될 준비까지도 되어 있었다.
그렇게 동굴 안으로 진입한 엘리제는, 황금으로 만든 수십 톤짜리 문을 단칼에 베어 버렸다.
쿠웅!
거대한 문이 무너지고.
번쩍번쩍!
골드 드래곤의 둥지답게, 온통 금으로 장식된 내부가 보였다.
호화로움의 극치.
산더미처럼 쌓인 금은보화.
벽과 천장은 조각, 그림 등 온통 예술작품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하지만 둥지 안에 정작 드래곤은 없었다.
단지 곱게 늙은 귀부인이 거대한 유모차를 끌고 있었을 뿐.
‘인간의 형상을 한 드래곤.’
엘리제는 본능적으로 귀부인이 드래곤이라는 걸 직감했다.
모습이 달라졌다고 한들, 그 실체는 달라지지 않는 법이었으니까.
“네년은 뭐냐.”
귀부인, 아니 드래곤이 엘리제를 노려보며 황금색 눈을 빛냈다.
“감히 내 둥지에 쳐들어오다니. 그러고도 네년이 무사할 줄 알았느냐?”
“내 약혼자는 어디 있나.”
엘리제가 드래곤을 향해 검을 겨눴다.
“웃기는 년이로구나. 네년 약혼자를 왜 내게서 찾는 것이냐?”
“곱게 약혼자를 돌려준다면, 조용히 돌아가겠다. 그러지 않으면… 참살하겠다.”
엘리제의 검에서 시퍼런 불길이 치솟아 올랐다.
화아아악!
엘리제로부터 마나가 뿜어져 나와 둥지 안에 휘몰아쳤다.
“아주 제대로 미친년이로구나.”
그런 엘리제의 기세에 드래곤의 얼굴이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엘리제의 그 무시무시한 살기와 기세를 무시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뭘 잘못 처먹고 미쳐 버렸는지는 모르겠다만. 감히 헤츨링을 키우고 있는 드래곤의 둥지에 쳐들어올 생각을 하다니.”
“헤츨링…?”
엘리제는 드래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헤츨링이란 이제는 잊힌 단어로서, 700살 미만의 새끼 드래곤을 지칭하는 것.
드래곤은 새끼 드래곤인 헤츨링을 낳아 키우는 동안에는 보호본능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엄청나게 예민해지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 만약 헤츨링을 건드리거나 위협한다면, 드래곤의 분노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수천 년 전.
대륙을 통일했던 고대의 대제국이 원인 모를 멸망을 겪었던 원인도 사실 헤츨링을 사냥했던 거였다.
본래 개체 수가 적은 드래곤의 특성상 새끼 드래곤인 헤츨링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서, 목숨을 걸고 보호해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네년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고, 네년이 속한 국가도 멸망시켜 주마.”
드래곤이 서늘한 협박을 말하더니, 마법을 부려 커다란 유모차에 보호막을 몇 겹이나 덧씌웠다.
“아가, 엄마가 저 정신 나간 년을 손봐 주는 동안 겁먹지 말고 있으렴.”
드래곤이 유모차에 덮인 천을 걷더니, 그 안에 있던 헤츨링…… 이 아니라 오토의 뺨에 뽀뽀를 쪽♥ 해 줬다.
“……!”
엘리제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흠칫 놀랐다.
오토가 거대한 유모차에 탄 채로 아동복에 공갈젖꼭지를 입에 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야, 약혼자… 대체 거, 거기서… 뭐 하는 건가.”
엘리제는 너무 황당해서 말까지 더듬었다.
알고 보니 오토가 드래곤의 새끼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 * *
며칠 전.
와이번을 타고 헤즈볼라 산맥을 정찰하던 오토는 골드 드래곤과 마주쳤고, 도망치던 중 붙잡히고 말았다.
온갖 수를 다 써 보았지만, 오토는 드래곤의 마수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오토와 드래곤 사이에는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어떠한 벽 같은 것이 있어서, 오토는 이렇다 할 저항조차 못한 채 드래곤에게 납치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드래곤이 오토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단 거였다.
“아가, 엄마한테 말도 없이 밖으로 나가면 어떡하니.”
“네…?”
“다음부터는 나들이가 가고 싶으면 꼭 엄마한테 얘기해야 한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놈!”
“히, 히익?!”
“엄마 말씀 잘 들어야지.”
“네에….”
“오구오구, 예쁜 내 새끼.”
불행인지 다행인지.
드래곤은 치매 증세가 꽤 심각했고, 오토를 자신의 새끼라 여겼다.
그렇게 드래곤의 둥지로 끌려가게 된 오토는, 그날부로 아기 드래곤이 되어 온갖 수모를 겪어야 했다.
드래곤은 오토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재우며 육아(?)에 힘썼다.
힘없는 오토는 그런 드래곤의 육아에 고스란히 당해야만 했다.
미리 여분의 다이애닌을 챙겨왔더라면 드래곤에게 먹인 뒤 자초지종을 잘 설명해 줬을 텐데, 하필 가진 다이애닌이 없어 꼼짝없이 갇혀 지내야 했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암컷 드래곤의 치매 증세는 오토를 자신의 새끼라고 여긴다는 일관성이 있어서, 상대하기가 그나마 편했다는 것.
쿠란의 경우 인격이 들쭉날쭉한데다가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증세가 도지기를 반복해서, 정상적인 대화 자체가 아예 불가능했다.
대화가 좀 이루어질 만하면 상대방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딴소리를 해 대는 통에, 상대하는 입장에선 어질어질했던 것이다.
‘하여간 이놈의 드래곤이란 족속들은 치매가 종특인가?’
오토는 자신이 아는 드래곤들은 모조리 치매 환자인 게 황당했다.
물론 두 마리밖에 안 되었기에 표본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하긴. 종족이 다 멸종하고 나이 든 개체들만 남았으니까 둘 다 치매인 게 딱히 이상할 건 없을 것 같기도.’
어쨌거나 드래곤으로 납치되어 감금된 오토는, 잠자코 육아에 당해 주다가 기회를 엿봐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쿠란 어르신이랑은 아는 사이인가? 궁금하네.’
그러던 중 엘리제가 찾아왔고, 오토는 구원자를 만난 기분이었다.
“에, 엘리제!”
“대체 왜 그러고 있는 건가. 설마… 사실 약혼자는 드래곤이었나?”
“아니야!!!”
오토는 엘리제가 오해하자 빽! 소리를 질러 강하게 부정했다.
오토 입장에서 억울할 만했지만, 엘리제의 시각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엘리제로서는 지금 오토의 모습을 보고 드래곤의 새끼라 오해해도 무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하!”
“오토야!”
그때, 카미유와 쿠란이 헐레벌떡 둥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 살았다!’
오토는 쿠란이 뛰어오는 걸 보고 사태가 잘 해결될 거라고 생각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드래곤에는 드래곤.
암컷 드래곤이 난리를 피운다고 한들 같은 드래곤인 쿠란만 있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그, 그대는!”
쿠란이 암컷 드래곤을 한눈에 알아보고 거의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아, 아드리아나… 살아 있었단 말이오…?”
쿠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과거 잘 알던 사이임이 분명했다.
“나는 그대가 죽었을 줄 알았는데…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았는데… 그대의 최후를 곁에서 지켜주지 못한 게 평생의 한이었는데… 이렇게 살아 있을 줄은 몰랐….”
그 순간.
“이 인간이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 들어와!”
아드리아나라고 불린 암컷 드래곤이 쿵쾅쿵쾅! 성난 발걸음으로 씩씩대며 쿠란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더니…….
콰직!
아드리아나가 쿠란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데!”
“크, 크억!”
“기어 나갔으면 일찍 일찍 들어오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이 몇 시야!”
“으아아아악! 이, 이것 좀 놓고 말… 으아악!”
“나가, 나가아아아아아!”
아드리아나가 쿠란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표독스레 소리쳤다.
“마누라는 종일 애 보느라 잠도 못 자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일찍 집에 기어들어오면서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라도 잡아 오진 못할망정!”
“아, 아드리아나!”
“알만 까 놓으면 다라 이거지? 이 무책임한 인간아! 나가! 염치없이 어딜 기어들어와!!!”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내가 아주 미친년이지! 내가 죽일 년이야! 남편 노릇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이랑 알까지 까고! 나 좋다는 수컷 드래곤들 다 거절하고 너랑 결혼했는데! 이 화상아아아아아아아!”
오토와 카미유와 엘리제는 슬금슬금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황당한 것도 황당한 거지만, 쿠란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며 화를 내는 아드리아나가 너무나도 살벌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