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0화
아주 먼 옛날.
지금으로부터 약 1,500년 전 즈음.
이 세계에 살던 드래곤들은 외계문명의 침공을 미리 알아채고, 대책 마련에 나섰다.
그 외계문명은 압도적인 기술로 무장했으며, 무시무시한 육체적 능력을 전투민족이었고, 또한 정복자들이었다.
드래곤들은 이 세계의 창조주가 그들에게 부여한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기꺼이 그 외계문명과 맞서 싸우기로 결의했다.
우선, 드래곤들은 세계를 보호하기 위해 시공간의 틈을 만들어 내고 그곳으로 외계문명을 끌어들였다.
그 시공간의 틈바구니에서, 드래곤들과 외계문명은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200년에 걸친 전쟁 끝에, 드래곤들은 기어코 외계문명을 물리치고 세계를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드래곤들은 멸종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수없이 많은 드래곤들이 전사했고, 시공의 폭풍에 휘말려 실종되었으며, 몇몇 돌아온 드래곤들은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몇 년도 살지 못하고 대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것은 고귀하고도 고결한 희생이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었지만,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책임과 의무를 위해 멸종이라는 대가를 치르면서까지 세계를 구해낸 것이다.
“나는 그 전쟁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드래곤이었단다.”
쿠란이 오토에게 옛 이야기를 해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온 드래곤들이 전쟁에서 입은 상처로 죽어갈 때마다, 그들의 곁에서 최후를 지켜보았단다.”
“아.”
“다행히도 나는 육체적인 상처는 크게 입지는 않았지만, 정신적인 후유증을 크게 앓았단다.”
“그게 치매인 겁니까?”
“시공간이 뒤엉킨 차원과 차원의 경계 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단다.”
“그러셨군요. 단순히 오래 사셔서 치매인 건 아니셨네요.”
“우리 드래곤들은 몇천 년 전의 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하는 기억력을 지닌 종족이란다. 사실 자연계에서 드래곤이 치매에 걸리는 건 불가능하단다.”
“그럼 어르신도…?”
오토가 아드리아나를 돌아보았다.
“그렇단다. 나도 큰 부상을 입었지만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단다. 하지만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건 막을 수가 없었지.”
“그러셨구나.”
오토는 그제야 드래곤들의 멸종에 대한 숨겨진 뒷이야기를 듣고,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쩐지.’
그럼, 그렇지.
‘만나는 드래곤들마다 치매인 게 이상하긴 했지.’
상식적으로, 아무리 드래곤들이 멸종 직전인 세계라 하더라도 너도나도 치매인 게 뭔가 이상하긴 했다.
그래 봤자 표본이 두 마리밖에 안 됐지만.
“나와 아드리아나는 전쟁 전부터 연인 사이였단다.”
쿠란이 말했다.
“하지만 전쟁 중 아드리아나가 실종되는 바람에 죽은 줄로만 알았지. 돌아와서도 아드리아나를 찾았지만, 서로 돌아온 시간대가 달랐는지 찾지 못했단다.”
쿠란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드리아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 역시 이이가 죽은 줄 알았단다.”
아드리아나가 쿠란의 손을 맞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렇데 다시 만나게 되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구나. 앞으로는 두 번 다시 헤어지지 말아요.”
“물론이오. 어떻게 헤어지겠소. 눈 감는 그날까지 그대와 함께할 것이다.”
“쿠란….”
“아드리아나….”
다음 순간.
쪽~♥
두 드래곤이 서로 입을 맞췄다.
“하하.”
오토는 그런 쿠란과 아드리아나의 모습이 참 좋아 보여서, 절로 미소를 지었다.
비록 노년의 사랑이라지만, 그래도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에 나이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당사자들의 마음만이 중요할 뿐.
“그럼, 두 분은 앞으로 어떡하실 겁니까?”
오토가 드래곤들에게 물었다.
“우린….”
쿠란이 대답했다.
“비록 늦었지만 죽기 전에 결혼해서 알을 낳을 생각이란다.”
“헉?!”
오토는 살짝 놀랐다.
쿠란이나 아드리아나나 드래곤이라 해도 나이가 엄청나게 많아서, 알을 낳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 가능하시겠어요?”
“껄껄!”
쿠란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우리에게 다 생각이 있단다.”
“네…?”
“이미 우리 드래곤이란 종족은 멸종 직전인데, 이제 와 헤츨링을 낳아 봤자 뭐가 달라지겠느냐.”
“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만약 쿠란과 아드리아나 사이에 헤츨링이 태어난다고 한들, 과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왜?
그 어떠한 동족도 없이 수천 년 동안 홀로 살아가야 할 테니까.
나중에 쿠란과 아드리아나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 헤츨링의 삶은 사무치는 외로움에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될 것이 분명했다.
“우린 드래곤의 혈통을 이 세상에 남길 거란다.”
“어떻게요?”
“그것은 두고 보면 알게 된 거란다.”
쿠란이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시지?’
오토는 그런 쿠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은 그러려니 했다.
쿠란과 아드리아나는 인간보다 훨씬 더 고등한 정신세계와 지능을 가진 존재들.
아무 생각 없이 자손을 낳겠다고 말했을 리 없었던 것이다.
* * *
이야기가 끝나고 난 뒤.
오토 일행은 와이번을 타고 아드리아나의 둥지를 떠났다.
그러던 중.
“으응?”
오토는 저 멀리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앞에는 몬스터 웨이브와 아즈란 제국군이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문제는 그 뒤로 또 다른 아즈란 제국군이 나타나 몬스터 웨이브와 맞서 싸우고 있던 아군을 공격하는, 아주 기묘한 전투 구도가 형성되어 있었다.
‘아즈란 제국군이 아즈란 제국군을 공격… 아!’
오토는 그 광경을 보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깨달았다.
“카미유.”
“예, 전하.”
“혹시 수도에서 반란이 일어났었어? 교황을 구출했고?”
“아! 맞습니다!”
카미유는 경황이 없어 미처 보고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오토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워낙 충격적인 일들이 연달아 벌어져서 잠시 잊었습니다.”
“됐어.”
오토가 손사래를 쳤다.
“나라도 그럴 것 같은데, 뭐.”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됐다니까.”
오토는 카미유를 이해했다.
목숨을 걸고 교황을 데리고 탈출했는데, 정작 오토가 드래곤에게 납치되어 행방불명이 되었으니 경황이 없을 만도 했다.
그 와중에 엘리제가 오고, 쿠란도 오고, 아드리아나까지 더해지니 제아무리 카미유라도 보고를 깜빡할 만도 했다.
“최후의 발악이네. 쯧쯧.”
오토가 미카엘이 지휘하는 아즈란 제국군의 뒤를 덮치는 반란군들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교황 체포에 실패해 벼랑 끝에 몰린 반란군들이 이러한 악수(惡手)까지 둘 줄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몬스터 웨이브와 싸우는 아군의 뒤를 칠 생각을 하다니.
“나 때문에 몬스터들이 저리 날뛰는 모양이로구나.”
아드리아나가 입을 열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암컷 드래곤들은 헤츨링을 낳으면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위험요소들을 제거하려 든단다.”
“……?”
“그러면 몬스터들은 드래곤의 기운을 느끼고 서식지를 옮기곤 하지.”
“아하.”
쉽게 말해서, 예민한 드래곤을 피해서 멀리멀리 달아나려 하다 보니 몬스터 웨이브가 생성되었단 이야기였다.
“이 사태는 내가 해결해야겠구나.”
“어르신이요?”
“본의 아니게 너를 납치하고 가둬둔 것도 있으니, 내가 해결해 주마.”
“오오.”
오토는 이 사태를 해결해 주겠단 아드리아나의 말에 쾌재를 불렀다.
드래곤인 그녀가 직접 나선다면, 몬스터 웨이브는 물론 반란군들까지 싹 쓸어버리는 건 일도 아닐 테니까.
“자초지종을 잘 설명해 주렴, 아가. 이 할미가 해결해 줄 테니.”
“예!”
오토가 아드리아나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조금만 기다리도록 하여라.”
“예, 어르신.”
아드리아나가 와이번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더니, 본체를 드러내었다.
본체인 거대한 골드 드래곤으로 변신한 것이다!
“쿠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본체로 현신한 아드리아나는 드래곤 피어를 뿜어내 일대의 모든 생명체들을 멈추게 했다.
아드리아나의 포효하자 몬스터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전투를 벌이던 아즈란 제국군과 반란군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멸종되었다던 드래곤이 다시 나타난 것을 보곤 그만 넋이 나가 버린 것이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뒤이어 아드리아나가 용의 숨결, 그러니까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어 몬스터 웨이브를 쓸어 버렸다.
“캬아아아악!”
“구와아아아아악!”
수만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은, 아드리아나가 뿜어낸 브레스 한 방에 갈기갈기 찢겨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전설에 의하면 드래곤은 숨결을 한 번 뿜어내는 것으로 인간의 도시 하나를 눈 깜짝할 사이에 파괴해 버렸다고 전해지는데, 그 전설이 수천 년이 지나 다시 재현된 것이다!
“미친.”
오토는 아드리아나가 뿜어낸 브레스의 위력에 경악했다.
“저, 저게 말이 돼???”
무슨 핵폭탄도 아니고.
단 한 방에 수만 마리의 몬스터를 아예 세상에서 지워 버릴 줄이야!
- 감히.
아드리아나가 전투를 벌이던 아즈란 제국군과 반란군들을 향해 말했다.
- 내 둥지 근처에서 소음공해를 일으키다니! 네놈들이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내 단잠을 깨운 죄를 어찌 갚을 것이냐!
그러자 아즈란 제국군과 반란군들은 즉시 납작 엎드려 아드리아나를 향해 고개를 조아리고, 용서를 빌었다.
“드, 드래곤이시여!”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아드리아나의 압도적인 체급 앞에, 인간들은 그저 무력할 뿐이었다.
대적불가.
괴력난신.
인간이란 종족에게 있어 드래곤이란 그 어떤 힘으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 내 듣자 하니 너희 중에 감히 반란을 일으킨 불충한 자들이 있다고 들었다.
그 순간.
“히, 히익?!”
반란군을 이끌고 몸소 전쟁터에 나섰던 하멜 추기경은, 아드리아나가 자신을 지목하자 까무러칠 뻔했다.
살다 살다 이제는 멸종되었다던 드래곤에게 지목당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 * *
쿠웅!
아드리아나가 대지를 밟으며 내려앉았다.
- 너희 중 반란을 일으킨 무리는 어디 있느냐.
그러자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하멜 추기경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들에게로 확 쏠렸다.
“…….”
“…….”
“…….”
하멜 추기경과 반란군 수뇌부들은 차마 나서질 못하고, 서로 눈치만 보기에 급급했다.
그들 중 감히 드래곤의 앞에 나서서 내가 반란군이요, 할 용기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 감히 나를 기다리게 만드는가!!!
아드리아나가 버럭 소리치고.
“크아아악!”
“으아악!”
반란군들이 귀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쓰러졌다.
- 감히 반란을 일으켜 내 둥지 근처를 시끄럽게 한 놈들이 누구냐는 말이다!!!
바로 그때.
“어르신! 쟤들이 그랬어요! 쟤들이 저도 죽이려고 그랬어요! 혼내 주세요!”
어느새 와이번을 타고 현장에 나타난 오토가 손가락으로 하멜 추기경 일당을 가리키며 고자질을 시전했다.
“야 이 개새끼야!”
“이 x발놈아!”
“그 입 닥치지 못할까!”
“우리가 언제 네놈을 죽이려고 했느냐!”
반란군 수뇌부들은 오토가 비열하게 고자질을 시전하자 악에 받쳐 쌍욕을 퍼부어 대었다.
“어르신! 쟤들이 저 욕해요!”
오토가 그걸 또 아드리아나에게 고자질했다.
- 어떤 놈들이 감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손자를 욕하는 것이냐!
그 순간.
‘소, 손자라고?’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이 사실 드래곤의 혈통을 지니고 있었단 말인가?’
‘드래곤의… 손자?’
사람들은 아드리아나가 오토를 가리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라고 부르자 큰 혼란에 빠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 나를 더 화나게 하지 마라. 나의 인내심은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아드리아나가 반란군을 재차 압박한 결과.
“주, 죽을죄를 지었나이다!”
“위대하신 존재시여! 부디 어리석은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신다면 위대하신 존재를 모시겠사옵니다!”
하멜 추기경과 반란군 수뇌부들은, 하는 수없이 아드리아나의 앞으로 기어와 납작 엎드려 빌었다.
그들에게는 선택권이라는 게 없었다.
이대로라면 그들의 목숨은 물론이요, 반란군 전체가 갈기갈기 찢겨 죽을 판국이었다.
조금 전 수만 마리의 몬스터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전멸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