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5화
바토리의 명령에 따라 에르제베트 왕국은 즉시 수도를 봉쇄했다.
언데드 기사들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수도의 신민들을 잡아다가 바토리에게 바쳤고, 바토리는 그들을 잡아먹으며 계속해서 알을 낳고 부화시켰다.
이에 수도의 신민들은 탈출을 감행했으나, 그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언데드 군대가 수도를 봉쇄하고 있어서, 신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폭동이 일어났다.
“더는 못 참는다!”
“폭군을 끌어내리자!”
“이 개 같은 귀족 놈들! 실종된 사람들은 어디로 간 거냐!”
거리로 나선 백성들은 각자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움켜쥐고 왕궁으로 향했다.
수십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이 왕궁으로 향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살기 위해서는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
지난 몇 개월 동안 계속된 의문의 실종사건과 수도 봉쇄에 따른 불만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폭동이 일어난 것이다.
불행히도, 그런 백성들을 기다리고 있던 성공적인 반란이 아니었다.
“끼이이이이익!”
“케헤에에에에엑!”
“까득! 까드득!”
수만 마리의 언데드 괴수들이 왕궁에서 쏟아져 나와 백성들을 덮쳤다.
“으아아악!”
“괴, 괴물이다!”
“으아아아아아악!”
백성들은 그런 언데드 괴수들을 피해 도망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으아아아악!”
“사, 살려줘어어어어어!!!”
언데드 괴수들은 백성들을 덮치고, 그들의 살점을 뜯고, 그 시체에 알을 낳으며 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대륙 역사상 유례가 없는, 자국민에 대한 끔찍한 대학살이 펼쳐진 것이다.
그렇게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는 순식간에 대학살이 펼쳐지는 지옥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고, 이 소식은 곧장 오토의 귀에 들어갔다.
이오타 왕국에서도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에 수없이 많는 첩보원들을 풀어놓았기에, 소식을 모르고 싶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미친!”
오토는 보고를 듣자마자 엄청나게 분노했다.
궁지에 몰린 바토리가 수도에서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것이라고는 오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그야말로 엄청난 변수였기 때문이다.
‘미친. 이런 패턴은 본 적이 없는데.’
이는 오토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왜 이런 미친 짓을 벌인 거지?’
바토리는 노련하고 교활한 군주.
그런 그녀가 이런 자충수를 둔 이유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국민들을 대놓고 학살한 언데드 군주를 좋아할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마땅히 토벌하고 응징해야 할 악(惡)으로 볼 뿐이지, 누구도 군주로 인정하지 않으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그런데도 이런 미친 짓을 대놓고 벌였다?
“아.”
오토는 바토리가 이런 짓을 벌인 이유를 깨닫고 탄식했다.
‘더는 미래가 없다 판단하고 막 나가기로 한 거구나.’
차라리 멍청했더라면 이런 미친 짓을 벌이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바토리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게 분명했다.
시간은 없고.
국토는 여러 세력들에 둘러싸여 갈기갈기 찢어지는 중이고.
심지어 로웨나가 이끄는 아라드 제국군까지 국경을 침범해 오기 직전이고.
사실 에르제베트 왕국은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바토리 역시 토벌당하는 건 시간문제일 뿐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전군, 지금 즉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출동 대기해.”
“예, 전하.”
“그리고 카심 경.”
오토가 카심을 돌아보았다.
“지금 용기사단을 이끌고 아즈란 제국으로 가 줄 수 있겠어요? 가서 진혼의 오르간을 가지고 와주세요.”
성물인 진혼의 오르간은 바토리를 토벌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아이템.
바토리에게 가장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무기가 바로 진혼의 오르간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는 이상 1분 1초라도 빨리 진혼의 오르간을 가져와야만 했던 것이다.
“맡겨만 주십시오!”
“귁! 귁귁귁!”
임무를 부여받은 카심과 펭이가 헐레벌떡 뛰어나갔다.
“지금 즉시 동맹국에게도 서신을 보내 에르제베트 왕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라고 해. 어차피 큰 전투를 벌어지지 않을 거니까, 걱정 말라고 하고.”
“예, 전하.”
“최대한 빨리 진격해서 수도를 함락하고, 왕궁까지 점령하는 게 우리 목표야.”
그렇게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 * *
전쟁은 이오타 왕국군의 진격으로 시작되었다.
반 에르제베트 동맹에 속한 세력들 역시 일제히 군대를 일으켜 에르제베트 왕국을 침공, 수도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에 발맞춰 바그람도 오크 군대를 이끌고 우르크 평원을 떠나 에르제베트 왕국의 남부를 침공했다.
로웨나가 이끄는 아라드 제국군 역시 에르제베트 왕국의 동쪽 국경을 초토화시키고, 수도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
오토의 말대로 큰 전투를 벌어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에르제베트 왕국군은 전투 대신 항복을 선택했다.
그들도 바보가 아니라서, 수도에서 무슨 사태가 벌어졌는지를 깨닫자마자 즉시 백기를 내걸었던 것이다.
덕분에 연합군은 큰 피해 없이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 코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고, 며칠 지나지 않아 수도를 완전히 포위해 버리기까지 했다.
문제는 그다음.
“…미친.”
오토는 저 멀리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를 바라보며 경악했다.
“캬아아아악!”
“캬아악!”
“구와아아아아악!”
이미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는 수십만 마리의 언데드 괴수들이 득실거리는, 역사상 가장 거대한 던전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이쯤 되면 죽음의 마왕이 강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
모르긴 몰라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번 사건을 마왕이 강림한 것이라 평가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그만큼 멀리서 바라보는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는 충격적이었다.
불과 열흘 사이에 그 아름답던 대도시가 언데드 괴수들이 득실대는 지옥으로 변해 버릴 줄이야.
“…….”
“…….”
“…….”
오죽했으면 수도를 포위한 연합군이 할 말을 잃어버린 채 침묵을 지켰을까.
그건 그만큼 이번 사태가 끔찍하다는 증거였다.
이미 에르제베트 왕국을 점령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임에도 누구 하나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을 정도였으니.
“뺀질아!”
어느새 군대를 이끌고 합류한 카이로스가 오토를 찾아와 닦달했다.
“언제 공격할 생각이냐! 왜 뜸만 들이는 것이냐!”
“기다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냐! 수도를 포위한 지가 벌써 이틀이나 지났거늘!”
“기다리라니까.”
“그러니까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것이냐!”
카이로스는 당장에라도 군대를 이끌고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로 쳐들어갈 기세였다.
왜?
그만큼 분노가 컸으니까.
전직 황제였던 카이로스는 이번 사태에 대해 어마어마하게 분노했고, 그만큼 바토리의 토벌을 원했다.
게다가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되는지라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숨어 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직 탈출하지 못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이곳 연합군 진영까지 들릴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기다려.”
하지만 오토는 단호했다.
“사람들은 미끼야. 우릴 끌어들이려는 수작에 불과해. 저기 넘어갔다간 우리도 위험해져.”
“그래도 그렇지! 언제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지 않느냐!”
“나도 사람들을 구하고 싶어. 근데, 이대로 전투를 시작했다간 우리의 피해도 엄청나게 클 거야. 조금만 더 기다리자. 넘어가지 말고.”
오토는 수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바토리가 던진 미끼라는 걸 알고 있었고, 그에 넘어가지 않았다.
무턱대고 공격했다간 언데드 괴수들에 의해 연합군이 엄청난 피해를 보는 것은 물론, 무시무시한 후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냥 언데드가 아냐. 부패의 저주에 걸린 언데드들이지.”
“그게 무슨 말이냐?”
“아무 대책 없이 무턱대고 싸웠다간 부패의 저주에 감염돼. 언데드들한테 물리거나, 피가 피부에 닿으면 산 채로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에 걸려.”
“그, 그게 정말이냐?”
“그 병이 우리 연합군에게 퍼지기 시작하면 그땐 정말 끝이야. 그래서 기다리는 거다.”
“도대체 뭘 기다린다는 것이냐?”
“진혼의 오르간.”
“음?”
“곧 올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채지 말고. 그리고 아직 아라드 제국군이 안 왔어.”
어찌 된 일인지, 로웨나가 이끄는 아라드 제국군이 늦어지고 있었다.
국경을 초토화시키고 수도로 진격해오고 있단 보고를 받은 지 꽤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었던 것이다.
“전하!”
때마침 카미유가 오토에게 보고했다.
“아라드 제국군이 거의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왜 늦었대?”
“그게….”
카미유가 푸른 눈을 빛내며 분노를 삭이더니, 힘겹게 말했다.
“로웨나 대공의 명령으로….”
“……?”
“아라드 제국군이 에르제베트 왕국군 3만 명을 산 채로 땅에 파묻어버렸답니다.”
“뭐?!”
오토의 입에서 기어코 큰 소리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3만 명을… 그 많은 사람들을… 산 채로 땅에 파묻어 버렸다고???”
“예.”
“왜???”
“수도 공략이 끝난 후 에르제베트 왕국군의 잔여 병력이 뒤를 칠 것을 우려해서 벌인 짓이라고 합니다.”
“아.”
오토는 훅! 하고 끼쳐오는 현기증에 그만 뒤로 넘어갈 뻔했다.
“국경을 침공하는 과정에서도 불필요한 학살이 많았다고 합니다. 이미 항복한 적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학살을 벌였단 보고가 있었습니다.”
“미친….”
오토는 로웨나가 벌인 끔찍한 만행에 대해서 전해 듣고, 치를 떨었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그 잔혹한 본성을 드러내면서 불필요한 학살을 벌일 줄이야.
‘당신은 언젠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오토는 조용히 분노를 억누르며 로웨나에 대한 응징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로웨나와는 절대 좋은 관계를 이어나가기 힘들다는 걸 깨달았기에.
* * *
아라드 제국군이 도착한 지 얼마 가지 않아 카심과 용기사단이 도착했다.
“전하! 저기 옵니다!”
카미유가 저 멀리 하늘을 가리켰다.
와이번들이 거대한 오르간을 매단 채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전하! 제가 왔습니다!”
“귁! 귁귁귁!”
카심과 펭이가 오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전하! 저도 왔습니다!”
성검 미카엘을 포함한 아즈란 제국 최강의 성기사들도 함께 오고 있었다.
교황은 거리가 너무 멀어 군대를 파견하지 못하는 대신에, 미카엘과 성기사들을 보냄으로써 오토를 지원했던 것이다.
“전군,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대기하라.”
“예, 전하.”
오토가 총사령관으로서 명령을 내렸다.
아라드 제국군도 합류했고, 카심이 진혼의 오르간을 가져왔으니 더는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라, 바토리.’
오토가 저 멀리 왕궁을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곧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해 줄 테니까.’
오토의 명령이 떨어지자 연합군은 즉시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기 시작했고, 얼마 가지 않아 전투 준비를 끝마쳤다.
“전군.”
오토가 명령했다.
“진격하라.”
그와 동시에 연합군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를 향해 내달렸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