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6화
같은 시각.
“드디어 오는가.”
바토리는 왕궁 지하에서도 적들이 진격해 오는 것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상황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기에,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수도를 자기 손으로 초토화시킨 것은 단지 최후를 앞당긴 것일 뿐이지, 결국에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리석은 자들이여. 어서 오라. 부패의 저주로 인해 네놈들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테니.”
바토리는 자신만만했다.
전쟁에서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바토리는 이 전투에서만큼은 승리를 자신하고 있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네놈은 함정에 걸려든 것이다. 내 영원한 파멸을 맞을지라도 네놈만큼은 지옥으로 데려갈 터이니.”
바토리는 오토가 이 전투에 참여할 것이라 예상하며,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 * *
일제히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로 진격해 들어간 연합군과 언데드 괴수들이 충돌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오토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토는 수레에 실린 진혼의 오르간 앞에 앉아 있었고, 조용히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처억!
마검사들은 그런 오토를 원형으로 둘러싸 호위했다.
그 누구도 오토를 건드리지 못할 것 같은, 그야말로 철통같은 호위였다.
웅!
우웅!
뒤이어 오토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파이프 오르간으로부터 웅장하고 아름다운 선율이 뿜어져 나와 전장을 뒤덮었다.
그 결과.
“케헤에에엑?!”
“캬아악! 캬아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악!”
연합군과 맞서 싸우던 언데드 괴수들이 귀를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괴로워 보였던지, 온몸을 비트는 괴수들의 몸짓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받는지 확연히 느낄 수 있을 지경이었다.
진혼의 오르간.
본래 미카엘의 시나리오에 성물이자 신성 아즈란 제국의 국보(國寶)인 이 아이템은, 언데드들에게 절대적인 위력을 행사했다.
언데드들의 능력치를 약화시킬 뿐 아니라,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게끔 압박하는 권능이 담긴 성스러운 유물이었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웅!
진혼의 오르간은 사악한 언데드들과 맞서 싸우는 이들에게 매우 강력한 축복을 걸어 주었다.
이 성스러운 축복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언데드들의 공격에 대한 내성이 생길뿐더러, 공격 시 추가 피해를 입히게 되어 있었다.
때문에, 오토가 진혼의 오르간을 연주하는 동안 연합군 병사들은 언데드들이 가진 부패의 저주에 면역이었다.
즉, 진혼의 오르간은 언데드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악의 천적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 * *
오토가 진혼의 오르간을 연주하는 동안 연합군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언데드 괴수들을 쳐부수며, 수도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연합군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카미유, 카심, 그리고 바그람이었다.
왜?
그들은 명속성 에너지를 다룰 수 있었으니까.
“취이이이이이익!!!”
우르릉!
콰앙!
바그람은 차우차우를 타고 내달리며, 덤벼드는 언데드들을 마치 불도저처럼 밀어 버렸다.
차우차우가 한번 돌진할 때마다 언데드 괴수 수십여 마리가 일제히 나가떨어질 정도였으니, 그 파괴력은 가히 폭주기관차와도 같았다.
화르르르르!
파지지지직!
카심은 한 손에는 화속성의 백화검을, 다른 한 손에는 명속성의 광명검을 든 채 이도류 검술을 구사하며 언데드 괴수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버렸다.
지이이이이이이잉!!!
그 와중에 과거 고대유적에서 얻은 정육면체들이 강력한 레이저를 발사해서, 카심의 사각지대에서 달려드는 언데드 괴수들을 무력화시켰다.
“귁! 귁귁귁!”
펭이 역시 카심의 곁에 딱 달라붙어서 대파를 휘둘렀고, 그때마다 언데드 괴수들은 꽁꽁 얼어붙어 움직이질 못했다.
카미유의 활약은 바그람과 카심보다 더욱 대단했다.
파직!
파지지직!
광속검을 전개한 카미유는, 그야말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번쩍!
촤라라락!
카미유가 한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날 때마다 언데드 괴수들 수백여 마리가 두 동강이 나 쓰러졌다.
그것은 마치 마법처럼 비현실적인 광경이라서, 카미유의 근처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어리둥절했을 정도였다.
카미유의 검술은 바그람이나 카심처럼 화려하진 않았다.
그러나 쓰러뜨리는 적들의 숫자는 그 누구보다 압도적이었다.
절제된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사실은 그 안에 빛의 속도를 품고 있는 검술.
그게 바로 카미유의 광속검이었던 것이다.
“이슈타르의 이름으로! 사악한 무리들을 처단하라!”
“처단하라!”
한편, 미카엘의 활약도 어마어마했다.
미카엘과 성기사들은 최전방에서 언데드 괴수들의 공격을 모조리 받아내며, 아군을 보호했다.
“성스러운 이슈타르의 검은 절대 부러지지 않는다.”
미카엘은 수백여 마리의 언데드 괴수들에게 둘러싸여 공격을 당하면서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언데드 괴수들이 아무리 공격하고, 또 공격한다 한들 미카엘의 막강한 방어력을 뚫는 건 불가능했다.
부상을 입는다 해도 금방 신성력을 통해 회복해 버리니, 도대체 누가 언데드이고 누가 성기사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미카엘의 회복력과 상처 치유 능력은 그야말로 불사(不死)의 권능에 가까워서, 어지간한 몬스터들 못지않은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했다.
괜히 ‘성스러운 좀비’ 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잘 싸우는 것은 주요 인물들뿐만이 아니었다.
이오타 왕국군은 연합군 내에서도 가장 빛나는 전투력을 선보였다.
척! 척! 척! 척!
이오타 왕국군은 대열을 유지하면서, 근면 성실하게 언데드 괴수들을 무찔러 나갔다.
“전진!”
“공격하라!”
“방패병! 앞으로!”
“궁수들은 후방에서 지원하라!”
이오타 왕국군은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매우 안정적이고, 또한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해 나갔다.
사방팔방에서 언데드 괴수들이 덤벼들었지만, 진영이 무너지는 법이 없었다.
이오타 왕국군은 징집병 없이 모든 장병들이 직업군인인 모병제를 택한 나라였고, 그에 따라 장병들은 평소에도 강도 높은 교육훈련으로 단련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수차례 전쟁을 겪으면서, 이오타 왕국군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춘 베테랑 군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대가 제아무리 언데드 괴수들이라 한들, 그간 갈고 닦은 전투기술과 경험이 빛이 바래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아라드 제국군 역시 세계최강대국의 군대답게 엄청난 전투력을 보였고, 평범한 기사단조차 여느 강대국의 근위기사단만큼의 전투력을 선보이며 언데드 괴수들을 무찔러 나갔다.
그렇게 연합군은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를 차근차근 장악해 나가며, 압도적인 승리를 이뤄 나갔다.
오토가 진혼의 오르간을 연주하기 시작한 이상 이 전투는 이미 연합군이 승리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 * *
“이이… 이이이이…!!!”
비록 전쟁에서 패할지언정 이번 전투에서는 승리를 자신하던 바토리는, 수도가 손쉽게 장악당하기 시작하자 완전히 멘탈이 나가 버리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이건 말도 안 된단 말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왜 계속 패배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으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바토리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괴성을 질러 대며 몸부림쳤다.
쿵!
쿠웅!
그러나 육중한 몸뚱이는 제대로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부패한 거미여왕인 바토리는 한 번에 수백여 개의 알을 품고 있어서, 거동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절대… 이대로 끝나진 않을 것이다… 절대로….”
바토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에 달고 있던 알들을 한꺼번에 내보냈다.
그리고는 그 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먹어치워 버렸다.
으득!
으드득!
알들을 먹어치운 바토리의 육체가 더욱 강력하게 변이를 일으켰다.
다리에 난 털은 날카로운 가시처럼 돋아나고, 얼굴은 더욱 기괴해져서 송곳니가 쭉 돋아났으며, 이제까지는 두 개였던 눈이 무려 스무 개까지 늘어났다.
알에 들어 있던 어둠의 마력과 영양분을 흡수해서, 더욱 강력한 개체로 거듭난 것이다.
“그래… 어서 오너라… 이곳이 네놈들의 무덤이 될 테니…….”
바토리는 조용히 몸을 웅크린 채 적들이 왕궁 지하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 * *
연합군은 불과 한나절 만에 수도를 거의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물론 수도가 워낙 큰 대도시이기에, 모든 언데드 괴수들을 처리한 건 아니었다.
아직도 곳곳에는 소수의 언데드 괴수들이 날뛰고 있었지만, 그런 개체들을 처리하는 건 어디까지나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토는 곧장 왕궁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왕궁은 수도 한복판보다 더욱 위험한 곳이었다.
왕궁은 길목이 좁은 데다가 구조가 복잡해서, 대규모 병력이 진입하는 게 불가능했다.
게다가 왕궁 안에는 고위급 언데드들이 득실거려서, 하나의 고레벨 던전이나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곳에 병력을 밀어넣어 봤자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으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
게다가 오토는 바토리가 왕궁 지하에 자리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제 발로 들어갈 바보가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거란 사실을 예측했기에, 섣불리 움직이지 않은 것이다.
“지금부터 민간인들을 구출하면서, 적들의 잔여 병력들을 제거하겠습니다. 왕궁에 대한 공격은 수도를 완벽하게 정리한 후에 진행합니다.”
오토는 아직 살아 있는 에르제베트 왕국의 백성들부터 구하면서, 수도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방식으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러는 사이 열린 작전 회의.
“왕궁 공략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천천히.”
오토가 대답했다.
“바토리는 왕궁 지하에 있을 거야. 그러니까 왕궁을 먼저 장악하고,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를 봉쇄해야지.”
“그다음은…….”
“단언컨대, 들어갈 일 없어.”
“예?”
“미쳤다고 거길 들어가?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무슨 함정을 파 놨을지도 모르는데.”
“그렇다고 그냥 놔둘 순 없지 않습니까.”
“없지.”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년만년 왕궁 지하를 봉인해 놓을 수도 없으니까. 근데, 누군가 거기 들어갈 일은 없어.”
“그럼 어떻게…….”
속닥속닥.
오토가 카미유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
오토의 계획을 들은 카미유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런 방법이…….”
“거봐. 들어갈 필요 없다고 했지?”
“동의합니다.”
“그럼, 준비해.”
“알겠습니다.”
카미유가 즉시 오토의 명령을 따라 움직였다.
* * *
바토리는 벌써 며칠째 왕궁 지하에서 몸을 웅크린 채 적들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적들은 왕궁을 장악한 뒤에도 지하로 내려오기는커녕,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설마 여길 발견하지 못한 것인가?’
바토리는 어쩌면 적들이 왕궁 지하로 통하는 비밀통로를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괴수들을 위로 올려 보내 적들을 유인해야 하는 건가.’
그러던 그때.
졸졸졸…….
바토리는 뭔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물이 지하로 흘러내려와 고이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
이게 무슨 액체인가 싶던 그 순간.
“기름…?”
바토리는 지하로 흘러 내려오고 있는 액체가 다름 아닌 기름임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우 걸쭉하고 끈적끈적한 점도를 지닌 이 기름은 바토리도 익히 아는 액체였다.
아즈란 제국의 특산물인 폭발하는 야자수의 열매를 짜내 만든 이 기름은, 매우 강한 가연성을 가진 물질로서 군사적인 용도로 자주 사용되었다.
주로 화공(火攻)을 구사할 때 쓰는 기름이었던 것이다.
‘설마.’
바토리의 뇌리에 아차 싶은 생각이 스치던 그 순간.
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콸-!!!
기름이 마치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려오기 시작했다.
어찌나 양이 많았던지, 지하공간에 고이는 기름의 양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발목까지 차올랐을 정도였다.
‘아, 안 돼!’
바토리는 다급한 마음에 황급히 지하를 뛰쳐나가려 했다.
그러나…….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바토리는 저 멀리서 시뻘건 불길이 빠른 속도로 번져 오는 걸 보고 그만 제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바토리가 덮쳐 오는 불길을 바라보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 X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