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9화
“동생이 날 그렇게 생각해 줄 줄은 몰랐어.”
로웨나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오토에게 사과했다.
“동생을 기쁘게 해 주고 싶어서 준비했던 선물이었거든.”
“당연히 알죠.”
“하지만 나도 바보는 아니야.”
“네……?”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거니까, 동생은 내 걱정 말고 기다려 줘. 우선 영토 분할은 나중으로 미뤄둘게.”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오토는 로웨나가 이렇게까지 말하는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뭐지?’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내주었다간, 아라드 제국 내에서 로웨나의 입지가 약해질 것이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어지간한 나라 하나만큼의 경제적 가치를 지닌 영토를 이렇게 쉽게 양보해 버리면, 로웨나를 불편해하는 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럼 오토도 곤란해지기는 마찬가지였다.
로웨나를 방패삼아 아라드 제국으로부터 이오타 왕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게 오토의 계획.
그런데 로웨나가 실각하기라도 하면 이오타 왕국은 아라드 제국과 전쟁을 벌여야 할 수도 있었다.
“내 정치적 입지가 곤란해질 일은 없을 테니까, 걱정 마.”
“왜죠?”
오토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서리쳤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그런 오토의 의문은 오래 가지 않았다.
“동생들은 내가 영토를 확장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을 거야.”
“어?”
“지금쯤이면 황제 폐하께 달려가 영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조르고 있을걸? 이오타 왕국을 치하해야 한다면서.”
“아!”
오토는 그제야 로웨나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망치로 뒤통수라도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국익보다 황족들 간에 상호 견제가 우선이라 이거지???’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
이들 셋은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일제히 반란을 일으키는 인물들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를 견제하며 현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특히나,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충성경쟁을 벌이고 있는 실정이었다.
우선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고, 살살 부추겨서 다른 형제들을 토벌하기 위해서였다.
“이 누님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동생은 가만히 있어.”
“그, 그런가요? 하하, 하하하하.”
“응.”
로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대놓고 주진 않을 생각이었으니까 동생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 그럼 다행이네요. 하하. 하하하하.”
“그래도 기분은 참 좋네. 동생이 날 그렇게까지 생각해 준다니. 정말 기뻐. 그리고… 이렇게 손을 잡아 준 것도 좋고.”
꽈악!
로웨나가 오토가 잡아 주었던 손을 부서져라 꽉 쥐었다.
“동생.”
로웨나가 오토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동생을 황제로 만들어 줄게.”
“……!”
“차차 알게 될 거야. 내가 동생에게 얼마나 많은 것들을 해 줄 수 있는지.”
“어. 음.”
“엘리제 그 계집애가 해 줄 수 있는 것들보다 몇 배로 해 줄 테니까. 그게 뭐가 됐든.”
로웨나가 슬쩍 콧잔등으로 오토의 귀 뒤쪽을 훑었다.
오싹!!!
오토는 소름이 돋아서 까무러칠 뻔했다.
마치 암컷 사마귀에게 잡아먹히기 직전의 수컷 사마귀가 된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 *
이오타 왕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에르제베트 왕국을 무너뜨렸다는 소식은, 전 대륙에 큰 충격을 주었다.
바토리가 사악한 언데드 군주였으며, 수도를 거대한 던전으로 만들어 버렸단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신흥강국 이오타가 기존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토를 3분의 1 이상 자치하고 강대국으로 거듭날 예정이라는 거였다.
지금 당장이야 전후 복구에 힘쓰느라 강대국으로 거듭나지는 못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국력이 강해지리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이대로 몇 년 만 더 지나면, 이오타 왕국은 기존 에르제베트 왕국 이상의 강대국으로 성장할 것이 분명했던 것이다.
이는 대륙 정세에 있어 큰 변화였기에, 수없이 많은 군주들과 권력자들은 이 사건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가장 크게 받아들인 건 역시나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었다.
‘빌어먹을. 누님이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까지 집어삼킨다면 나중에 감당이 안 될 텐데.’
‘오토 드 스쿠데리아와 누님이 붙어먹으면 정말이지 곤란해진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졸지에 난감해져 버리고 말았다.
지금까지는 힘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어 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던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로웨나가 이오타 왕국과 손잡고 에르제베트 왕국을 무너뜨린 이상 테르테미안과 파라곤 입장에선 발등이 불이 떨어진 셈이나 다름없었다.
안 그래도 로웨나가 가진 세력이 워낙에 강력해서 부담스럽던 차에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토까지 꿀꺽하게 생겼으니…….
‘누님과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사이를 갈라 놓아야 한다.’
‘어떻게든 누님의 힘이 더 커지는 것만 막자.’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비슷한 생각이었다.
그들은 아라드 제국이 에르제베트 왕국의 영토를 많이 차지하지 못하도록 해서 로웨나의 힘이 커지는 것부터 막기로 했다.
그런 뒤 오토와 로웨나를 이간질해서, 그들의 사이를 갈라 놓기로 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로웨나는 기존 에르제베트 왕국보다 몇 배는 강력한 이오타 왕국을 등 뒤에 두게 될 터.
그럼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으로서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그래서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황제를 찾아갔다.
“……!”
“……!”
어전 앞에서 딱 마주치고만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서로를 노려보며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둘은 이내 곧 같은 생각으로 황제를 찾아왔음을 깨닫고, 서로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만큼은 우리 형제가 의견이 일치하는 모양이로구나, 동생아.”
“그런가 봅니다, 형님.”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암묵적인 합의를 보고는, 즉시 황제를 알현했다.
“폐하, 이오타 왕국에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하사하시옵소서.”
“저 역시 같은 의견이옵니다, 폐하.”
황제는 그런 동생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에르제베트 왕국을 무너뜨리는 데에는 본국의 역할이 지대했는데 어찌 양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상식적으로, 국익을 포기하자는 말은 어리석은 황제조차도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물러서지 않았다.
“폐하,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폐하의 충신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황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나의 충신이라니? 그가 짐의 신하란 말인가?”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예, 폐하.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잘츠부르크 가문의 사위로서 북부대공의 손녀 엘리제와 약혼한 사이가 아니옵니까? 그는 곧 본국의 사람이자 폐하의 신하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잘츠부르크는 본국에서 황가 다음으로 고귀한 혈통을 가진 가문이 아니옵니까? 그런 가문의 사위라면, 사실상 아라드인이나 마찬가지이옵니다.”
그런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발언은 사실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황제로서도 솔깃해할 수밖에 없었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하사하지 않으신다면, 잘츠부르크 가문이 불만을 품을지도 모르는 일이옵니다.”
“그러하옵니다. 잘츠부르크는 대대로 본국에 충성해 온 가문에다, 지금도 북부 장벽 너머에서 전투를 벌이며 황가에 봉사하고 있는 가문이 아니옵니까?”
“맞사옵니다! 그런 잘츠부르크 가문의 사위에게 합당한 보상을 내리시지 않으신다면, 그들이 섭섭해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옵니다!”
그러자 황제가 걱정된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잘츠부르크 가문은 충신 중의 충신인데! 그들을 섭섭하게 할 순 없지! 그들이 대를 이어 본국에 충성해 온 역사가 하루 이틀이 아니질 않으냐?”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엘리제의 가문인 잘츠부르크를 들먹이자 황제로서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사악한 언데드 군주였던 바토리를 토벌한 영웅이옵니다.”
“폐하의 둘도 없는 충신을 만들 수 있는 기회이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로를 치하하시고,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하사하시어 폐하의 은혜를 전 대륙에 알리소서!”
황제는 솔직히 좀 고민되긴 했지만,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말에 크게 반박하지 못했다.
게다가 잘츠부르크 가문이 불만을 품기라도 한다면, 황제 입장에서는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 하지만 로웨나가 섭섭해할 터인데?”
황제는 불같은 성격을 지닌 로웨나도 걱정이 되었다.
로웨나의 공도 컸기에, 덜컥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오토에게 하사하기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누이가 섭섭해하는 것은 어쩔 수 없사옵니다. 잘츠부르크 가문과 대륙의 민심이 더욱 중요한 법이옵니다.”
“지금은 잘츠부르크 가문과 대륙의 민심을 더욱 신경 쓰시고,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과 북부대공의 손녀 엘리제가 약혼을 넘어 결혼까지 할 수 있도록 밀어주시는 것이 급선무이옵니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간곡한 조언에 황제는 한동안 고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내 이번에는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영토를 하사하는 것으로 해서, 잘츠부르크 가문도 함께 달래도록 하겠다. 누이가 섭섭해하겠지만 이번에는 어쩔 수 없겠어.”
그러자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고개를 조아리며 황제를 향해 넙죽 엎드려 절했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씨익-
고개를 조아린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 * *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어전을 나서자마자 서로 눈길조차 마주치지 않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빨리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내 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급한 불은 껐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 먼저다.’
지금 이 순간에도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장차 강대국으로 거듭날 것이 확실히 보이는 신흥강국 이오타 왕국의 국왕과 친분을 쌓고, 로웨나와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내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대로 누이와 붙어먹게 놔둬선 안 된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만 내 사람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황위에 오르는 것도 결코 꿈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이와 오토 드 스쿠데리아를 갈라 놓아야 한다.’
어느새 오토는 로웨나뿐만 아니라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에게도 가장 중요한, 영입 1순위 인물이 되어 있었다.
만약 오토의 마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면, 로웨나를 손쉽게 쳐부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잘츠부르크 가문의 도움까지 받을 수 있을 터.
오토야말로 이 대륙에서 가장 가치가 높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황궁을 빠져나오자마자 즉시 잘츠부르크 가문에 전령을 보냈다.
그들이 잘츠부르크 가문에 전령을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잘츠부르크 가문이 누이를 견제하도록 해야 한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와 엘리제의 결혼을 가속화시켜야 한다. 그래야 누이가 끼어들 틈이 없을 것이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잘츠부르크 가문을 부추김으로써, 오토와 로웨나의 사이가 멀어지게 만들 작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