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0화
한편, 로웨나는 즉시 수도로 가 황제를 알현했다.
에르제베트 왕국을 무너뜨린 건에 대해서 황제에게 직접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신 로웨나,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오랜 적인 에르제베트 왕국을 멸망시켰사옵니다.”
로웨나가 황제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보고했다.
“음.”
황제는 그런 로웨나의 보고에 껄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누이가 짐이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하사하려는 걸 알면 불같이 화를 낼 터인데.’
황제는 형제를 가운데서도 여동생인 로웨나를 매우 어려워했다.
능글능글한 테르테미안과 파라곤과는 다르게, 로웨나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그야말로 불같았다.
또한,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매우 강해서 조금만 불공평한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길길이 날뛰기 일쑤였다.
그런 로웨나의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아는 황제로서는 아무래도 이 자리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아라드 제국의 땅으로 편입시키자니 잘츠부르크 가문의 눈치가 보이고, 대륙의 민심도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 황제로서는 가시 방석일 수밖에.
“폐하.”
로웨나가 그런 황제에게 물었다.
“어찌 기뻐하지 않으시옵니까? 신이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에르제베트 왕국을 정벌하였사옵니다.”
“물론 짐은 누이가 세운 전공에 크게 기뻐하고 있다. 누이야말로 본국의 충신 중의 충신이자 황가의 번영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이온대.”
로웨나가 본론을 꺼냈다.
“점령한 영토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까지는 본국이 가져오도록 할 예정이옵니다.”
“으음.”
“폐하께서 윤허해 주시기만 하면…….”
“누, 누이.”
“예, 폐하.”
“누이가 큰 공을 세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음. 그것이. 흠흠. 흠흠흠.”
“……?”
“아무래도 짐이 생각에는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는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하사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
“그게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로웨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겉으로는 표정을 싹 굳혔다.
‘역시.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먼저 와서 수작질을 부렸군. 호호호.’
로웨나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귀신같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왜?
이게 일상이었으니까.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은 어린 시절부터 온갖 권모술수와 암투를 벌이며 서로를 헐뜯고 견제하고 싸우곤 했다.
용케 유혈사태만 벌어지지 않았을 뿐이지, 위험했던 순간들도 한두 번이 아닐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척하면 척 형제들의 속내를 눈치챌 수 있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아무래도 이번 전쟁을 주도한 것은 오토 드 스쿠데리아이기도 하고… 이번 전쟁으로 인해 대륙에서 영웅으로 칭송받는 중인데… 짐이 황제로서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공로를 치하….”
“오라버니!!!”
“……!”
“그게 어인 말씀이세요!!!”
로웨나가 버럭 소리치자 황제는 눈을 질끈 감으며 몸을 움츠러들었다.
“어찌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넘겨주시겠다는 거죠? 왜? 정작 에르제베트 왕국의 국경을 초토화시킨 건 폐하의 군대인데! 그 군대를 이끈 게 누군데!”
“누, 누이!”
“어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어찌이이이이!”
“일단 진정하고….”
“폐하에 대한 이 누이의 충정을 이런 식으로 푸대접하실 걸까요? 정녕 이래도 되는 건가요?”
“너무 화만 내지 말고. 얘기부터 좀 들어ㅂ….”
“정말 서운해요! 정말로!”
황제는 로웨나의 맹공에 어쩔 줄을 모르며 쩔쩔맸다.
상대가 사나운 여동생 로웨나인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타고난 성격 탓이었다.
제아무리 황태자 시절부터 제왕학을 공부하며 황제가 갖춰야 할 자질들에 대해 교육받았다 한들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성격을 뜯어고치기란 불가능했던 것이다.
‘호호호! 이 능구렁이 같은 것들! 누가 오라버니를 잘 구워삶는지 두 눈 똑똑히 뜨고 보렴. 호호!’
로웨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으면서, 화가 난 척 계속해서 황제를 몰아붙였다.
덕분에 황제는 한동안 로웨나에게 시달리며 진땀을 빼야만 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폐하.”
“조, 조건?”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내어주는 대신 저에게도 뭔가를 주셔야죠?”
“그건 그렇지.”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누이를 섭섭하게 했으니 뭔가를 해 주고는 싶긴 하지.”
“좋아요.”
로웨나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로웨나가 입을 열었다.
“북부대공 지안카를로의 손자 중 하나. 란돌 공작의 셋째 아들 케레스와 결혼을 원해요.”
“……!”
“그게 제 요구사항이에요.”
로웨나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 * *
한편, 오토는 로웨나가 떠난 후부터 엄청나게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으. 미치겠네, 미치겠어.”
오토는 어전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안절부절못했다.
“좀 가만히 계실 순 없습니까?”
보다 못한 카미유가 한마디 했다.
“벌써 3시간째 그러고 계신 거 아십니까? 차라리 편하게 휴식을 취하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누군 이러고 싶어서 이래?”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불안해서 그래! 불안해서!”
“뭐가 불안하십니까?”
“로웨나.”
“로웨나 대공이 그렇게 불안하시면 처음부터 멀리하시지 그러셨습니까.”
“누군 멀리하려고 안 한 줄 알아? 하. 아도니스만 안 죽어도 이럴 일은 없었는데.”
하지만 이미 죽은 아도니스를 아쉬워해 봤자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차라리 아도니스가 있는 게 낫지. 적어도 걔는 예상은 가능하니까.’
아도니스는 천재답게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었으며, 또한 영리했다.
때때로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기상천외한 신의 한 수로 허를 찌른다는 것만 빼면.
어쨌거나, 그렇기에 아도니스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로웨나는 달랐다.
로웨나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인물.
때문에, 예측이 거의 불가능했다.
아도니스처럼 옆에서 붙들고 특정 행동을 하도록 유도한다면 몰라도.
‘생각을 하자, 생각을. 로웨나가 어떻게 움직일까.’
오토는 로웨나의 행동 패턴을 예측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로웨나가 계속 돌발행동을 해버리면 오토조차도 상황을 컨트롤할 수 없게 되어 버릴 테고, 그럼 언제 어느 때 세계대전이 벌어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당장 북부제국의 남하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세계대전이 예상보다 빨리 터져 버리기라도 한다면…….
‘그것만은 막아야 돼. 로웨나를 내 손에 쥐고 꼭두각시처럼 움직일 수 있어야 돼. 북부제국이 남하할 때까지는.’
그래서 오토는 벌서 며칠째 로웨나의 다음 행보를 예측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 내는 중이었다.
‘그냥 눈 딱 감고 들여다볼까?’
오죽했으면 대학살의 서를 이용해 허공법계에 접속, 미래예지를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랬다간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르게 되겠지만.
‘차분히 생각해 보자. 차분히. 로웨나가 뭘 원하는지. 로웨나가 가진 가장 큰 무기가 뭔지.’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야심한 밤이 되었다.
그럼에도 오토는 잠들지 못하고, 계속해서 머리를 굴렸다.
그러던 중.
‘잠깐. 로웨나는 자기 동생들이 자길 견제할 거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를 가지게 될 거라고 했지.’
헝클어졌던 생각들이 어느 순간 주르륵 정리되기 시작했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에르제베트 왕국의 수도와 지믈라 평야가 로웨나의 손에 들어가길 원하지 않을 거고. 그렇게 만들려면 황제를 찾아가서…….’
아라드 제국의 황궁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오토의 머릿속에서 짜 맞춰졌다.
정작 오토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그것은 명백히 벌어졌던 일들이었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로웨나를 견제하고, 잘츠부르크 가문으로 찾아갔을 거다. 나와 엘리제의 결혼이 빨리 이루어지도록. 그다음엔 나를 찾아와서 로웨나와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겠지.’
‘그럼 로웨나가 취할 행동이 뭘까? 어떻게 해야 동생들의 견제를 뿌리치고 자기 세력을 더욱 견고하게 다질 수 있을까? 잘츠부르크 가문과 껄끄럽지 않게 나와 가까이 지낼 수 있는 방법이…….’
다음 순간.
“아!”
오토는 로웨나의 다음 행동 패턴을 깨닫고 탄성을 내질렀다.
“결혼, 결혼이다!”
결국, 오토는 로웨나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아맞히는 데 성공했다.
지난 며칠 동안 밤새도록 고민한 보람이 있었던 것이다.
* * *
로웨나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다음 황위 계승 서열 1위라는 혈통과 아직 미혼이라는 것.
즉, 언제 어느 때고 자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세력과 정략결혼으로서 묶일 수 있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로웨나가 아직까지 결혼하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도 훗날 자신이 반란을 일으킬 것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반란을 일으킬 시점에 자신이 가장 필요로 하는 세력과 정략결혼을 통해 결속을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잘츠부르크 가문은 지금 로웨나에게 있어 가장 좋은 결혼 상대였다.
때마침 엘리제의 막내오빠인 케레스가 미혼이기도 했고.
‘로웨나 입장에선 케레스 형님과 결혼하는 게 최선이야. 그럼 잘츠부르크 가문의 견제도 받지 않을 테고, 나와의 관계도 계속 유지되겠지. 한 집안으로 묶이는 거니까.’
잘츠부르크 가문.
로웨나.
그리고 이오타 왕국.
이 세 개의 세력이 결혼으로서 한데 묶인다면, 로웨나에게는 최상의 시나리오였다.
물론 충신 중의 충신인 잘츠부르크 가문이 반란에 가담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오토에 대한 로웨나의 흑심을 의심하진 않을 테고, 대놓고 견제하지도 못할 터.
그렇게 되면, 로웨나는 가장 두려운 상대인 잘츠부르크 가문의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지는 셈이었다.
‘그럼 잘츠부르크 가문이 최소한 테르테미안이나 파라곤을 지지하지는 못하게 돼. 그럼 마음 편히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쓸어버릴 수 있겠지. 잘츠부르크 가문은… 반란을 일으킨 뒤에 제거할 생각이겠지.’
오토는 로웨나의 의도를 100퍼센트 확신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거… 너무 좋은데?’
오토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히히! 히히히!”
얼마나 좋았으면,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갑자기 왜 바보처럼 웃으시는 겁니까?”
“깜짝이야!”
오토가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아직 거기 있었어?”
“전하께서 아직 어전에 계시는데 제가 어딜 갑니까.”
카미유가 읽고 있던 책을 덮으며 대답했다.
오토가 어전을 서성이며 머리를 굴리는 동안 카미유 역시 책을 읽으며 곁을 지켰던 것이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로웨나의 의도를 알아차렸어.”
“예?”
“알아차렸다고.”
오토가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문제는 그 음흉한 계획이 우리한테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될 거라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딴에는 머리를 잘 굴렸어. 내가 며칠 밤을 새울 만큼. 도저히 다음 행동이 예측이 안 됐었거든. 근데, 방금 깨달았어. 로웨나의 계획이 뭔지.”
“뭡니까? 로웨나 대공의 다음 계획이란 게?”
“혼인을 빙자한 사기.”
“예…?”
“엘리제의 오빠인 케레스랑 결혼해서 잘츠부르크 가문을 방패막이로 삼고, 나와의 관계도 혈연으로 묶일 생각이야.”
“……!”
“그런 뒤에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제거하고, 대놓고 반란을 일으키려는 거야. 잘츠부르크 가문은 그때 제거해 버릴 생각이고. 아무리 혈연으로 묶여 있다고 해도 잘츠부르크 가문은 황제에게 충성할 테니까.”
“마, 맙소사.”
“근데 그 계획에 큰 허점이 있어.”
“뭡니까? 그 허점이라는 게?”
“나.”
오토가 자기 자신을 가리켰다.
“로웨나는 내가 자길 사랑한다고 생각하거든.”
“예?!”
“그래서 자기가 짠 계획에서 내가 엇나갈 거라고 아예 생각을 못하는 거야. 내가 머리 꼭대기 위에 있는 줄도 모르고.”
“그, 그게 말이 됩니까?”
“돼.”
오토가 확신했다.
“두고 봐. 다 내가 말한 대로 될 테니까. 아마 지금쯤이면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잘츠부르크 가문에 가서 나랑 로웨나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고 이간질을…….”
그때.
와장장창!!!
쨍그랑!!!
검은 복면을 쓴 정체불명의 암살자 세 명이 창문을 부수며 어전으로 난입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