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2화
엘리제는 오빠들을 으슥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물론 그 으슥한 곳은 오직 오토만이 사용하는 개인 수련장이었지만.
“도대체 여기서 뭣들 하시는 겁니까.”
엘리제가 오빠들을 추궁했다.
“오라버니들이 갑자기 사라지시는 바람에 모든 작전이 중단됐습니다.”
그러자 바보삼형제가 변명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
“맞아.”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 중요한 일.”
하지만 엘리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들 하십니까? 세상에 군사작전보다 중요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엘리제의 반박에 바보삼형제는 또다시 말문이 막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모든 작전을 중단하고 군대를 철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엘리제가 덧붙였다.
“오라버니들께서 갑자기 자리를 비우시는 바람에 제가 휴가를 못 나올 뻔했습니다.”
그 순간.
‘이유가 그거였어?!’
‘오토 녀석을 만날 때가 됐는데 못 만나서 화난 거였군.’
‘휴가를 못 나올 뻔해서 화난 거였어.’
하지만 바보삼형제는 감히 그런 속마음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만약 그랬다간 어떻게 될지 생각만 해도 너무나도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전시에 군영을 이탈하는 것은 탈영으로 간주하고 군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하는 중죄입니다.”
엘리제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우웅!
그러자 훈련장 한편에 비치되어 있던 목검이 저절로 날아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꽈악!
엘리제가 목검을 움켜쥐었다.
“자, 잠깐!”
“그, 그것만은! 제바아알!”
“헉!”
바보삼형제는 엘리제가 목검을 든 것을 보고 경기를 일으켰다.
그녀가 목검을 들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일단 우리 말 좀 들어봐!”
“그래! 오빠들 말부터 들어봐야지!”
“우리가 괜히 그런 게 아니라니까?”
바보삼형제는 엘리제를 어르고 달래려 최선을 다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여동생은 이미 분노해 있었고, 지금도 많이 참고 있는 중이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만, 그간 복무하신 공로를 인정해 이번 한 번만큼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엘리제의 의외성 짙은 발언에 바보삼형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정말?!”
“역시 내 동생이야! 하하하!”
“용서해 주는 거야?”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하지만 오래간만에 오라버니들과 대련을 해야겠습니다.”
그 말에 바보삼형제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 그건 좀.”
“그냥 넘어가 준다며…….”
“꼭 대련을 해야 할까? 그냥 다 같이 하하호호 밥이나 먹으면 안 될까?”
바보삼형제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대련을 회피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한꺼번에 오십시오.”
엘리제가 바보삼형제를 향해 달려들었다.
“자, 잠깐!”
“으아악!”
“악! 뼈 맞았어!”
바보삼형제는 놀란 바퀴벌레 떼 마냥 도망치다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으아아아악!”
“야! 오빠야! 오빠! 살살해! 살살… 으아아아악!”
“꾸웨에에에에에엑!”
뒤이어 훈련장에 구슬픈 비명이 울려 퍼졌다.
오싹!
오토와 카미유는 엘리제와 바보삼형제들의 대련을 보고 무서워서 두려움에 떨었다.
“저거… 대련 맞습니까?”
“아, 아니?”
오토가 카미유의 물음에 대답했다.
“내 눈엔 그냥 패는 걸로 보이는데?”
“저도 그렇게 보입니다.”
바보삼형제들은 그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도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여동생이라고 봐주는 게 아니었다.
“으아아아아악!”
“야! 잠깐만! 으아아아악!”
“꾸웨에에에엑!”
바보삼형제는 필사적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했지만, 엘리제 앞에서는 그저 샌드백 신세에 불과했던 것이다.
* * *
“끄어어어어어.”
“끄으으응.”
“으으. 으으으.”
결국, 바보삼형제는 1시간 동안의 대련 끝에 완전히 걸레짝이 되어 실려 나가고 말았다.
대련이 끝난 바보삼형제는 도저히 두 다리로 걷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봤나.”
“히, 히익?!”
오토는 엘리제가 다가오자 오금이 지려서 기겁하고 말았다.
조금 전 오빠들을 무참히 두들겨 패는 엘리제의 모습이 떠올라 그만 겁에 질려 버린 것이다.
“안심해도 된다.”
엘리제가 오토를 안심시켰다.
“내가 너를 이렇게 할 일은 절대 없을 테니.”
“그, 그래?”
“약속한다.”
“으응.”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오토는 엘리제가 여전히 두려웠다.
바보삼형제를 두들겨 패던 모습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끔 이렇게 해서라도 기강을 잡아야 한다.”
“응?”
“오라버니들은.”
엘리제가 눈을 지그시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에서 둘도 없는 바보들이다.”
“하하, 하하하하.”
오토는 왠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아서,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라버니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면 반드시 사건이 터지곤 한다. 사고 치기 전에 미리 기강을 다잡아놓지 않으면 나중에 무척 피곤해질 수도 있다.”
“그거, 경험담 맞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지.”
“어휴.”
오토는 엘리제에게 시달렸다던 바보삼형제의 말이 거짓말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엘리제가 바보삼형제를 괴롭힌 게 아니었다.
바보삼형제가 대책 없이 사고치고 돌아다니는 걸 엘리제가 참교육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오라버니들께서 여긴 무슨 일인가?”
“그, 그거?! 어. 음. 그게. 그러니까.”
오토는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나도 저렇게 처맞는 거 아냐?!’
만약 엘리제가 로웨나와의 사이를 오해하기라도 한다면…….
오싹!
후들후들!
엄습하는 공포감에 소름이 돋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얘기해도 된다.”
“잠깐 따로 얘기할까? 둘이서?”
“알겠다.”
오토는 자리를 옮겨서 엘리제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오토는 이번 사건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숨기지 않고 엘리제에게 말해 주었다.
“……역시 그랬군.”
엘리제가 알 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역시 그랬다니?”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했다고?!”
“건국기념연회 당시 널 바라보던 로웨나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너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생각했었는데, 역시 내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헉.”
오토가 놀랐다.
“그런 눈썰미가 있었어?”
“나도 여자다.”
“응?”
“그런 걸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하지 않다.”
“그, 그랬구나.”
“특히나 로웨나 대공이 날 바라볼 때의 그 눈빛. 피에 젖은 약탈자의 것이었다.”
오토는 그 말을 듣고 새삼 엘리제의 속 깊은 모습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다 알면서도 모른 척 눈감아줬던 거구나. 날 믿고.’
알면 알수록 존경스러운 사람이란 생각밖엔 안 들었다.
“그래서 로웨나가 케레스 오라버니에게 청혼할 거라는 건가?”
“응.”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될 거야. 황제 폐하를 통해 중매가 들어갈 거야. 곧.”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엘리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실제로, 이 상황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서로 간의 입장과 생각이 다르고, 여러 정치적 문제와 이해득실이 얽혀 있는 데다가, 힘의 균형 또한 팽팽한 상황.
여기서 섣불리 행동했다간 피바람이 불 테고, 자칫 잘못했다간 모두가 파멸로 치달을 수도 있었다.
단순히 무력으로 해결한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 * *
엘리제는 속이 깊고 지혜로운 인물이니만큼, 이 문제가 매우 심각한 사안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물론 힘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엘리제에게 있어 로웨나 하나를 제거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일 테니까.
문제는 그랬다간 아라드 제국이 곧바로 내전에 휩싸일 터.
그러면 잘츠부르크 가문이 지키고 있는 북부 장벽이 허술해지고, 장벽 너머의 야민부족들과 북부제국이 대륙을 너무나도 쉽게 침공하는 게 가능해질 게 분명했다.
그러한 일이 벌어진다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쟁에 휩쓸며 죽어 가리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생각해 둔 방법이 있나?”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있어.”
“그럼 해라.”
“하지만…….”
“나는 상관없다.”
엘리제가 오토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나는 너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어떻게 행동하든.”
“저, 정말?!”
“한 치의 거짓도 없다.”
“그럼 정말로 고맙고.”
오토는 진심으로 엘리제에게 고마워했다.
왜?
지금 계획을 성공시키려거든 로웨나와 계속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를 이용해야 했으니까.
또한, 케레스의 희생도 불가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제는 오토를 믿고 지지해 주겠다 말했다.
기분이 나쁠 수도 있고, 의심이 들 수도 있으며, 답답한 상황일 수 있음에도.
그건 단순히 오토만을 위한 게 아니었다.
“우린 힘을 가진 사람들이다.”
엘리제가 말했다.
“우리는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결정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 나갈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아!”
“조금 힘들더라도, 우리의 희생으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길 바란다. 난 그것으로 족하다.”
그렇게 말하는 엘리제의 모습은 로웨나와는 완벽하게 대비되었고, 서로 극단에 선 대척점을 이루었다.
로웨나가 자신의 야망과 욕망을 이루기 위해 미쳐 버린 폭주기관차라면.
엘리제는 오토에 대한 사랑과 대의(大義)를 위해 불편한 상황도 기꺼이 감수하겠다 말했다.
두 사람 모두 오토를 전적으로 믿겠다고 말했지만, 그 뜻은 180도 달랐던 것이다.
* * *
오토는 엘리제와 대화를 나눈 뒤 따로 케레스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안 그래도 케레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참에, 먼저 찾아와 준 것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물론 케레스가 찾아온 이유는 오토를 납치해서 두들겨 팰 생각이었겠지만.
“짐작하셨겠지만 제가 형님을 따로 뵙자고 말씀드린 이유는, 로웨나 대공의 청혼에 관한 이야기 때문입니다.”
“음.”
케레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 결혼을 하고 싶지 않다.”
“이해합니다.”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로웨나 대공과 결혼해 봤자 정략결혼일 뿐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도 꾸지 못할 겁니다.”
“맞아.”
“그래도 하셔야 합니다.”
“해야 한다고?”
“예.”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야만부족의 공주 쿠사키나와 은밀하게 만나고 계신 거, 압니다.”
“……!”
“하지만 두 분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금단의 사랑. 결혼은커녕, 만나는 것조차 목숨을 걸어야 하죠.”
케레스는 말이 없었다.
오토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조차 묻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심적 고통이 큰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혼해야 한다는 건가? 로웨나 대공과?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라서?”
케레스가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뇨.”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이루어지게 만들려면 로웨나 대공과 결혼하셔야죠.”
“뭐라고?!”
“만약 형님께서 로웨나 대공과 결혼하신다면, 쿠사키나와 결혼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모두의 축복 속에 결혼하시게 될 겁니다. 물론.”
오토가 덧붙였다.
“로웨나 대공과는 2년 안에 파혼하게 만들어 드릴 거고요. 눈 딱 감고 2년만 버티시면 됩니다.”
오토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케레스에게는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기에, 그가 수락할 것을 100% 확신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