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4화
키이우 왕국으로 가는 길.
“기분이 어떠십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뭘?”
“결혼을 발표하셨잖습니까.”
잘츠부르크 가문을 시작으로, 쿤타치 공국과 이오타 왕국도 오토와 엘리제의 결혼 소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한 달 뒤 공식적인 약혼식을 치르고, 그로부터 1년 뒤에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즉, 오토도 1년 후에 유부남이 될 예정이었던 것이다.
“글쎄?”
오토가 잘 모르겠다는 듯 대꾸했다.
“아직 실감이 잘 안 나는데?”
“그렇습니까?”
“어차피 약혼한 사이잖아. 결혼하기로 한 사이니까, 크게 와 닿는 건 없어. 막상 약혼식을 치르면 좀 다를지도? 그리고…….”
오토가 덧붙였다.
“솔직히 좀 두렵기도 해.”
“뭐가 두려우십니까?”
“엘리제는 정말 훌륭한 사람이야. 그런 여자의 남편이 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 그래서 좀 걱정이 돼.”
“이해합니다.”
카미유가 오토의 말뜻을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워낙 훌륭하신 분이다 보니 전하 입장에선 조금 부담도 되실 테고, 걱정도 되실 겁니다.”
“그렇지.”
“그렇다고 해서 너무 걱정하진 마십시오.”
“으응?”
“아가씨께서는 지금 전하의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래도…….”
“하하.”
카미유가 피식 코웃음을 치더니 말했다.
“전하께선 얼굴 하나만으로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충분하신 분입니다.”
“뭐?!”
오토가 카미유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지금 나더러 얼굴 빼면 보잘것없는 놈이라는 거야?”
“그렇게까지 받아들이실 필요는 없으십니다만.”
“뭘 그렇게까지 받아들일 필요가 없어!”
“얼굴도 재능입니다.”
“……?”
“얼굴천재로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하십시오.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 가지는 얼굴입니다.”
“그, 그렇긴 하지.”
“그리고 농담이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카미유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아가씨께서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여자로서의 삶?”
“아시다시피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검을 벗 삼아 살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도 장벽 너머에서 하루가 멀다고 전투를 치르고 계시고.”
“그, 그렇지.”
“전하께선 그런 아가씨의 퍽퍽하고 거칠었던 삶에 여자로서의 행복을 선물하신 겁니다.”
“음.”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고, 그저 한 여인으로서 대해 주신다면 아무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만.”
“뭔가 그럴듯한데?”
오토는 카미유의 조언이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려서, 귀가 솔깃해졌다.
‘하긴. 내가 엘리제한테 해 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긴 해. 뭐 하나 부족한 거 없고, 뭐 하나 모자란 부분이 없는 사람이니까.’
엘리제는 능력치만 놓고 봤을 때 완벽에 가까운 인물인지라, 카미유의 조언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근데 잠깐.’
문득 오토는 뭔가 이상한 점을 느끼고 얼굴을 굳혔다.
“카미유.”
“예, 전하.”
“혹시 연애 한 번밖에 못 해 보지 않았어?”
“그렇습니다만.”
“그 한 번 한 상대랑 결혼했잖아.”
“문제라도 있습니까?”
“에라이.”
오토는 카미유의 조언을 귀담아듣지 않기로 했다.
* * *
한편, 오토의 편지를 받은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큰 고뇌에 빠져 있었다.
지금은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시기였다.
오토와 엘리제의 결혼 소식이 발표되고, 황제가 잘츠부르크 가문에 사람을 보내 로웨나와 케레스의 결혼을 중매한 상태였다.
현재 대륙 전체를 뒤져봐도 이보다 더욱 큰 이벤트가 없을 정도로, 이번 소식은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쩌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순간인 것이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 당사자들 중 하나인 오토로부터 편지가 도착했으니,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혼란스러워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편지의 내용 또한 단순히 안부를 묻는 거라서,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더더욱 큰 혼란에 빠졌다.
그들이 아는 한 오토는 바보가 아니었으므로, 굳이 이런 시기에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편지를 보낸 의도와 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암호로 쓰인 편지인지 확인하라.’
‘어떠한 마법적인 효과가 숨어 있을 수도 있지. 숨겨진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하라.’
오죽했으면 암호해독 전문가들과 뛰어난 마법사들까지 불러 편지를 몇 번이나 살펴보았을까.
하지만 몇 번을 살펴보고 분석해 봐도 편지는 그저 평범한 편지일 뿐 특별한 메시지를 담아낸 게 아니었다.
‘뭐지?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인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현명한 자다. 굳이 나를 자극해서 얻을 게 없는데, 그런 멍청한 짓을 할 리 없다.’
‘빌어먹을. 도저히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겠군.’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해봤자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이 알아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게 당연했고.
‘의도는 모르겠지만 분명히 편지를 보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내게 자신의 가치를 부각시키려는 것인지도.’
‘설마 나와 소통하고 싶어 하는 건가? 나와 협력하기 위해서?’
오토가 가진 전략적 가치가 워낙 크다 보니,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본의 아니게 오토의 의도를 오해하고 말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오토는 그 자체로 너무나도 매력적인, 지금 그들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인물이었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황위에 오르고자 하는 야망과 탐욕을 마음에 품은 이들이니만큼, 오토가 편지를 보낸 의도를 좋게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오토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편지를 보낸 의도를 좋게 해석해 버린 것이다.
‘그렇다. 곧 오토 드 스쿠데리아와 엘리제의 약혼식이 열린다. 일단 답장을 보내고, 그때 가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게 좋겠군.’
‘오토 드 스쿠데리아와 엘리제의 약혼식이 머지않았다. 어쩌면 이 편지는 그때 이야기를 나누자는 신호일 수 있다.’
결국,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오토가 던진 떡밥을 덥석 물고 말았다.
로웨나와 케레스의 결혼을 딱히 반대할 만한 명분도 없고, 방법도 없는 상황에서 그들이 기대할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오토와의 협력뿐이었기 때문이다.
* * *
황제가 케레스와의 중매를 서 주었지만, 로웨나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사실, 최악이었다.
케레스와의 정략결혼을 통해 잘츠부르크 가문과의 마찰을 피하고, 오토와 한 집안 사람이 되는 것 자체는 매우 고무적인 성과였다.
혼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결혼하지 않고 정략결혼이라는 카드를 아껴 둔 보람이 있는 신의 한 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웨나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이이… 이이이……!!!”
로웨나는 분노를 가까스로 억누르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
잘츠부르크 가문을 시작으로 쿤타치 가문, 그리고 이오타 왕국이 오토와 엘리제의 결혼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로웨나도 모르던 바는 아니었다.
이미 오토와 엘리제는 어린 시절부터 약혼한 사이였고, 결국 결혼할 사이였다.
로웨나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오토를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황위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정식으로 약혼식이 열릴 것이며, 1년 후에는 두 사람이 부부로서 맺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니 그 질투심과 분노를 참기나 쉽지 않았다.
“테르테미안… 파라곤… 내 네놈들을 갈아 마시고야 말 것이다.”
그런 로웨나의 분노는 즉시 형제들에게로 향했다.
오토와 엘리제의 결혼이 가속화된 데에는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공작이 있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게 황족들의 숙명이었다.
황족들에게 있어 혈통이란 고귀한 특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끔찍한 저주나 다름없었다.
황가의 피가 흐르는 이들에게는 황제가 될 수도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그건 언제든 숙청당할 위험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때문에, 황족들 간에 벌어지는 골육상잔의 비극은 역사상 수도 없이 되풀이되는 피의 수레바퀴와도 같았다.
권력.
그 정점에 있는 황위를 둘러싼 싸움에 가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죽이고.
같은 핏줄을 지닌 이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이 황족들이 갖는 숙명이었고, 원죄였다.
로웨나도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형제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고, 형제들 역시 로웨나를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왜?
살아야 했으니까.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
지금 이 순간에도 황족들은 언제든 서로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기꺼이 죽이길 원했다.
로웨나 역시 형제들인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죽이고, 결국엔 오빠인 황제마저도 죽이고 황위에 오르고 싶었고.
그러다 보니 그 분노가 형제들에게로 쏠리는 건 당연한 이치였다.
“이이… 이이이…!!!”
결국, 참다못한 로웨나는 침실에 있는 모든 것들을 던지고 때려 부수며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대, 대공 전하!”
시녀 하나가 그런 로웨나가 다칠 것을 우려에 다가가 그녀를 뜯어말렸다.
“고정하시옵소서! 대공 전하! 이러다 다치십…… 꺄악!”
“감히.”
로웨나가 시녀의 목을 움켜쥐며 눈을 희번덕거렸다.
“네년이 나의 몸에 손을 대?”
“대, 대공 전하! 컥! 커헉!”
“어딜 주제를 모르고.”
“커헉! 주, 죽을죄를… 컥!”
“그럼 죽어.”
로웨나가 시녀의 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으드득!
시녀의 목이 기괴한 각도로 꺾였다.
털썩!
로웨나는 죽은 시녀의 시체를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리고는, 살기등등한 눈빛을 희번덕거렸다.
치밀어 오른 분노가 광기를 넘어 피의 욕구를 자극하고 말았던 것이다.
* * *
오토 일행은 키이우 왕국의 수도로부터 약 10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 호멜에 짐을 풀었다.
오토는 호멜의 중심부에 자리한 커다란 중앙광장으로 가서,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런 뒤 한가로이 차를 마시며 오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책을 읽고, 엘리제에게 편지를 쓰는 등 시간을 보냈다.
“뭐 하시는 겁니까?”
카미유가 따뜻한 차를 마시던 오토에게 물었다.
“보면 몰라? 차 마시잖아, 차.”
“북부제국의 남하를 막을 동맹을 만들러 왔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그런데 왜…….”
“만날 사람이 있어서.”
“누구입니까? 그 만날 사람이.”
“개미지옥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예?”
“첩보에 의하면.”
당연한 말이겠지만, 첩보 같은 건 없었다.
단지 알고 있는 미래에 대한 정보를 적당히 포장해서 말했을 뿐.
“사실은 키이우 왕국의 왕이 오늘내일하거든?”
사실 오늘내일하는 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급사할 예정이라서. 헤헤.’
물론 그것도 예지에 가까운 것이었기에, 오토는 카미유에게 사실대로 얘기해 줄 수 없었다.
“근데 후사가 없어. 아직 젊은데. 그렇다고 키이우 왕가에 왕족들이 많은 것도 아니거든? 족보가 하도 꼬여서 당장 왕위 계승 서열도 제대로 순위를 매기기 힘들 정도야.”
“그건 저도 들어 알고 있습니다.”
키이우 왕가는 30년 전 벌어졌던 왕족들 간의 권력다툼으로 인해 풍비박산이 나서, 왕족들이 거의 씨가 마르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러니 카미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고.
“여기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살거든.”
“그게 정말입니까?”
“응.”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계 중의 방계이긴 한데. 따지고 보면 왕위에 올리기 딱 적합한 족보를 가지고 있어. 기반도 쥐뿔도 없고.”
“허수아비로 세우기 딱 좋다는 말씀이십니까?”
“응. 그래서 지금 왕이 서거하면, 차기 국왕으로 지목될 거야.”
“차기 국왕이 될 자에게 투자해서 동맹을 끌어내시겠단 의도입니까?”
“바로 그거지.”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저기 온다.”
오토가 누군가를 가리켰다.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라도 하신 건가?’
카미유는 그런 생각으로 오토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곳에는 차기 국왕이 될 왕족 같은 건 없었고, 단지 화려한 복장을 한 어릿광대 하나만 덩그러니 있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