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6화
오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변에 그만 뇌정지가 오고 말았다.
‘왕위에 안 오르겠다고?!’
오토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선언이었다.
크바르는 매우 유능한 군주였다.
비록 왕위에 오른 직후에는 광대 출신이란 이유로 모든 이들의 비웃음을 샀고, 손가락질을 당했으며, 또한 무시당했다.
아무런 지지기반도 없이 왕위에 오른 만큼 귀족들로부터 허수아비 왕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
하지만 크바르에게는 군주로서의 재능이 있었고, 차근차근 개혁을 이뤄나갔다.
그러던 중 북부제국의 침공으로 인해 크바르는 완전히 각성하게 된다.
귀족들 대부분이 항복을 부르짖으며 북부제국의 속국이 되기를 자처할 때, 크바르는 과감한 숙청을 단행하는 과감함을 보였다.
또한,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백성들에게 지지를 호소해서 왕권의 강화까지 이룬다.
이후 크바르는 북부제국과 처절한 전쟁을 벌이며, 그 무시무시한 북부제국군에 맞서 성공적으로 영토를 방어해내는 기염을 토하기까지 한다.
정치, 군사, 전략, 전술.
개인 무력만 없을 뿐이지, 크바르는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육각형 타입의 군주였다.
그런 그가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니…….
만약 크바르가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면, 오토로서는 정말이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크바르는 북부동맹에 맞서 싸울 강력한 아군 중 하나.
심지어, 마땅한 대체제도 없는 존재였다.
키이우 왕국이 북부제국의 병력들을 얼마만큼 빨아들여 주느냐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갈릴 텐데, 그 역할을 해 줄 인물이 사라져 버린다면…….
‘절대 안 돼.’
크바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다.
그저 희극인으로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고 싶은 마음은 이해했다.
그는 평생 단 한 번도 왕위에 오른다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한 인물.
애초에 야망 같은 품어 본 적도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크바르로서는 왕위에 오르기 싫을 수밖에.
“정말 죄송한 말씀이십니다만.”
오토가 크바르에게 말했다.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곧 큰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큰 전쟁이요……?”
“예.”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북부 장벽 너머에서 북부제국이 침공해 들어올 거고, 키이우 왕국은 초토화될 겁니다.”
“그게 사실이라 쳐도, 저랑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제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저는 오직 희극인으로서…….”
“그땐 공연을 볼 관객도 없을 텐데요.”
“……!”
“전쟁으로 인해 부모를 잃고, 자식을 잃고, 형제자매를 잃은 사람들한테 공연으로 웃음이라도 드릴 생각이세요? 나라를 빼앗겼는데 광장에서 공연이나 하실 겁니까?”
“그, 그건.”
“물론 전쟁 중에도 공연은 필요합니다. 위문공연이 괜히 있을까요. 힘든 시기에 백성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 줄 만한 수단이 필요하겠죠. 근데, 그게 과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됩니까?”
“…….”
“공연을 통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것. 분명 가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키이우 왕국에 필요한 건 왕입니다.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낼 군주가 절실한 상황입니다.”
“저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크바르가 고개를 저었다.
“설사 왕위에 오른다 한들 무식한데다가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이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될 뿐입니다. 이런 제가 어떻게 조국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실 겁니다.”
오토가 딱 잘라 말했다.
“사람이 자리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거죠.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실 거고, 잘해 나가실 겁니다. 도움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예?”
“왕위에 오를 때부터 곁에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기사들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하, 하지만…….”
“저한테는 그저 강력한 동맹이 필요할 뿐입니다. 북부제국의 침공에 맞서 그들을 막아내 줄 사람. 제가 원하는 건 그게 전부입니다.”
“…….”
“어차피 크바르 님께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저는 크바르 님을 근위기사단에 넘길 거고, 강제로라도 왕위에 올릴 겁니다. 지금 이렇게 시간을 버는 이유는, 크바르 님이 마음의 준비를 하실 여유를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오토는 크바르를 납치한 걸 살짝 후회했다.
조금 귀찮더라도 강제로 왕위에 오른 뒤에 접근했다면 이렇게 설득할 필요조차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 * *
“……하겠습니다.”
결국, 오토의 끈질긴 설득 끝에 크바르는 왕위에 오르기로 결심했다.
크바르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에는 지금 키이우 왕국에 왕위에 오를 만한 왕족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괜히 방계 중의 방계인 크바르가 왕위 계승 서열 1위라는 웃지 못 할 상황까지 펼쳐진 게 아니었다.
만약 크바르가 왕위에 오르지 않는다면, 키이우 왕국은 왕위에 오르고자 하는 귀족들에 의해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99.9퍼센트였다.
내전을 막기 위해서라도 크바르는 반드시 왕위에 올라야 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차마 왕가의 일원으로서 왕조를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혈통적인 측면에서의 죄책감 또한 어느 정도 작용한 것도 있었다.
“만약 전쟁이 끝나면… 왕위를 이양하고 다시 희극인으로 돌아갈 겁니다.”
크바르가 말했다.
“제 역할은 딱 거기까지입니다. 더는 싫습니다.”
“이후의 선택에 대해서는 저도 강요할 마음은 없습니다.”
오토는 크바르를 설득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그렇다고 티내지는 않았다.
난데없이 마음에도 없는 왕 노릇을 해야 할 크바르를 이해했기에…….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쿤타치 가문 출신의 마검사 열 명을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이거.”
오토가 책 한 권을 크바르에게 내밀었다.
“숙청해야 할 인물들을 적어 놨습니다. 거기 적혀 있는 인물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제거하셔야 합니다.”
“이거… 제게 사람을 죽이라는 의미입니까?”
순간 오토는 억울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야 이! 누가 보면 내가 살인교사라도 하는 줄 알겠다! 이 양반아!’
책에 적힌 인물들은 크바르가 왕권을 잡기 위해 반드시 제거해야 될 인물들이었다.
역모를 꾀할 반역자.
북부제국에 나라를 팔아먹을 예정인 매국노.
혹은 크바르를 허수아비로 만든 뒤 권신(權臣)이 되어 군림하려는 괘씸할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연히 죽어 마땅한 이들이고, 오토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크바르가 자연스럽게 제거할 수밖에 없는 인물들이기도 했다.
굳이 명단을 적어 준 이유는, 왕이 예상보다 더 일찍 서거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북부제국의 침공에 대응할 시간이 늘어난 셈이었으니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다만 오토가 크바르를 가르쳐 줄 시간이 줄어들어 버린 격이라, 이렇듯 부득이하게 공략법(?)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
크바르가 권력을 빠르게 잡을수록 키이우 왕국의 힘은 더욱 강해질 테니까.
“보시고 숙청할지 말지는 알아서 판단하시면 됩니다. 누구를, 왜, 어떻게 숙청해야 할지 방법까지 다 적어 놨으니까 참고만 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말은 고맙다고 하는데, 크바르는 감사해야 하는 건지 말아야 하는 건지 분간이 안 가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희극인으로 살아온 크바르에게 있어 죽여야 할 사람들의 명단을 건네받는다는 건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법도 했다.
“왕위에 오른 순간부터 절대, 그 누구도 믿지 마세요. 제가 붙여 준 마검사들을 뺀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단 한 사람.”
오토가 덧붙였다.
“로셴 백작은 믿어도 됩니다.”
“예?”
크바르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듯 와락 인상을 구겼다.
‘딱 예상했던 반응이긴 하네.’
오토는 크바르의 반응이 그리 놀랍지 않았다.
로셴 백작.
키이우 왕국의 탐관오리 중 하나인 그는, 숱한 비리를 저질러 온 부패귀족이었다.
워낙에 수완이 좋고, 여기저기 기름칠도 잘하고, 백성들의 원성을 살 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아서 그렇지 그가 여태껏 해 처먹은 비리는 그야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처세술이 워낙 좋아서 그렇지, 조금만 삐끗했어도 목이 열 개라도 부족했을 인간이었다.
오죽했으면 키이우 왕국에서 로셴 백작이 부패한 귀족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로셴 백작만을 믿어도 된다니?
‘지금 날 가지고 노는 건가?’
크바르는 처음으로 오토를 의심했다.
절대 믿지 말아야 할 탐관오리를 믿으라니 지난 이틀 동안 쌓아 놓은 신뢰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가지고 노는 거 아닙니다만.”
“헉?”
“로셴 백작이 누구보다 부패한 인물이라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는…… 애국자입니다.”
오토는 그렇게 말하는 자기 자신이 웃겼다.
‘하. 내가 뭐라는 거야.’
부패한 귀족의 대명사인 로셴 백작을 가리켜 애국자라고 포장해 주려니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확실히 애국자는 애국자지. 부패해서 그렇지.’
로셴 백작은 비록 부패한 귀족이었지만, 그 애국심 하나만큼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른 귀족들이 나라를 팔아먹으려 안달이 나 있고,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는 와중에도 꿋꿋이 키이우 왕국을 떠나지 않았다.
대신 크바르의 곁에서 한껏 능력을 발휘하며, 그간 부정부패로 쌓아놓은 재산들을 아낌없이 풀어 군자금을 댈 예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셴 백작이 방산비리를 저지르기 위해 신무기 개발 프로젝트를 진행한 덕분에, 키이우 왕국은 무기체계에 관해서 꽤나 진보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비리를 저지르기 위해 벌인 사업이 키이우 왕국의 군사력을 증가시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던 것이다.
“그가 애국자인지 아닌지는 차차 알게 되실 테니까, 그것도 스스로 판단하세요. 믿고 안 믿고는 크바르 님 자유입니다.”
“아, 예.”
“죽이지만 마세요, 죽이지만.”
거기까지.
오토는 더는 설명하기를 포기해 버렸다.
로셴 백작에 대해 아무리 열변을 토해 봐야 워낙에 이미지가 안 좋은 인물이라서, 크바르의 불신만 더욱 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그럼, 다음에는 국왕 대 국왕으로 뵙겠습니다.”
“예, 전하.”
오토는 마검사들로 하여금 크바르를 호위하게끔 하고, 그를 떠나보냈다.
“이게 끝입니까?”
“그럼?”
오토가 카미유의 물음에 답했다.
“옆에서 하나하나 다 가르쳐줘?”
“그건 아닙니다만.”
“나 그럴 시간 없어. 알잖아. 그거 아니라도 할 게 얼마나 많은데. 일단 저 정도 해 줬으면 알아서 잘 풀어나갈 거야.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대관식 하느라 정신없을 테고.”
“그건 그럴 것 같습니다.”
“대신 난 다른 걸 해 줘야지.”
“예?”
“크바르를 위한 성물을 찾아줘야 돼.”
“어떤 성물입니까?”
“대지의 올가미라고.”
오토가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에 버려진 성채가 하나 있어. 거기 가서 그거나 가져다주려고.”
크바르가 자신의 성물인 <대지의 올가미>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 실마리를 풀어나가려면 꽤나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토는 그 과정을 짧게 단축시켜서, 그가 왕권을 장악해나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더 벌어줄 생각이었던 것이다.
“가죠, 카심 경.”
“예, 전하.”
그렇게 오토, 카미유, 카심, 그리고 펭이는 크바르의 성물인 대지의 올가미를 찾기 위해 키이우 왕국의 동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