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엘리제는 정말로 오토를 씻겨 주었다.
“나, 나 괜찮은데?”
오토는 엘리제가 정말로 씻겨 주려 하자 크게 당황했다.
‘아직 키스밖에 못한 사이인데!’
하지만 엘리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냥 직접 씻겨 주고 싶어서 그런 거다.”
“하, 하지만…….”
“걱정 마라.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우린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지 않았나.”
“으, 으응.”
“얼른 가자. 냄새가 심하다.”
오토는 엘리제에 의해 욕실로 끌려갔고, 속옷만 입은 채 욕조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엘리제는 정말로 오토를 씻겨 주었다.
스펀지로 상체를 닦아 주고, 머리를 감겨 주고, 세수도 시켜 줬다.
“코 대라.”
“흐응!”
심지어 콧물도 풀어주기까지 했다.
“도대체 얼마나 못 씻은 건가?”
“2주?”
“……맙소사.”
엘리제가 질렸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도대체 2주 동안 씻지도 않고 뭘 한 건가?”
“갇혀서 일만 했지…….”
“그러게 왜 할 일을 자꾸만 뒤로 미루는 건가.”
“미룬 게 아니라 쌓이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그래. 진짜 서류들이 무슨 곰팡이처럼 증식한다고.”
오토는 왠지 게으름뱅이가 된 것 같아서 억울했다.
나름 부지런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양심에 손을 얹자면 아주 가끔은 주어진 일을 회피하고 게으름을 부리거나 도망친 적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행정업무를 등한시한 건 결코 아니었다.
단지 에르제베트 왕국을 흡수하면서 일거리가 지나치게 많아진 것일 뿐.
“그 정도로 바쁜 건가?”
“응.”
“다음부터는 갇혀서 일만 하더라도 씻는 것 정도는 하게 해 달라고 해라. 이게 뭔가.”
엘리제가 욕조를 가리켰다.
‘그냥 죽을까.’
욕조 안을 본 오토는 수치스러워서 극단적인 선택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욕조 안에 있는 물이 완전히 구정물이 되어 있어서, 회색이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제는 불평 한마디 없이 오토를 끝까지 씻겨 주었다.
“이제 샤워하고 나와라.”
“으응.”
오토가 샤워를 마치고 나온 뒤.
탈탈탈!
엘리제가 수건으로 오토의 머리를 털어 물기를 닦아 주기까지 했다.
‘기, 기분 좋아.’
오토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에 얼굴을 붉혔다.
“그 있잖아…….”
“……?”
“그…….”
스윽.
오토가 엘리제의 입가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엘리제는 그런 능구렁이 같은 오토의 입술을 피하지 않았다.
* * *
깨끗하게 몸단장하고 난 뒤.
“후우! 개운하다!”
오토는 정말이지 날아갈 것 같은 표정이었다.
최근에 가장 행복한 날을 꼽으라면, 오토는 망설이지 않고 오늘이라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감금에서 풀려나고.
엘리제가 씻겨 주고.
마지막으로 달콤한 키스까지.
고생 끝에 온 낙이라 그런지, 지난 2주 동안의 지옥 같던 수감생활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기분 좋게 엘리제와 더불어 점식을 먹고, 티타임을 갖는 등 여유로운 오후를 보냈다.
그러던 중.
“네? 뭐라고요?”
오토는 올리브의 보고를 받고 제 귀를 의심했다.
“출사아아아아안?!”
너무 당혹스러운 소식이라서, 오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게 되나? 1년도 안 지난 거 같은데?’
올리브의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쿠란.
그리고 아드리아나.
두 드래곤 사이에 자식이 생겼단다.
심지어 아드리아나의 출산이 임박했으며, 1시간 정도 후에는 두 드래곤 사이에서 아기 드래곤이 태어날 예정이라고 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보고라서, 오토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드래곤의 출산 장면을 지켜보는 건 오직 드래곤만이 가능하다고 해요.”
“아?”
“하지만 전하와 엘리제 아가씨한테만큼은 특별히 참석을 허락한다 하셨으니, 가 보시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흠.”
오토는 잠시 고민했다.
굳이 출산 장면을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초대해 준 드래곤 부부의 성의를 생각해서, 오토는 엘리제와 함께 기묘한 출산 현장에 참석하게 되었다.
“으응?”
그러나 막상 가 보니 출산 같은 건 없었다.
드래곤 부부는 평소와 전혀 다를 게 없었고, 특히나 산모인 아드리아나는 도저히 출산이 임박한 사람(?)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예, 어르신들.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석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토와 엘리제가 초대해 준 드래곤 부부에게 예를 갖췄다.
“왔느냐.”
“어서 와요.”
드래곤 부부도 오토와 엘리제를 반겨 주었다.
“저어, 어르신?”
오토가 쿠란에게 물었다.
“출산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암, 했지.”
쿠란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출산이 이뤄질 것 같진 않은데요?”
“끌끌! 우린 해츨링을 낳는 게 아니란다.”
“네?”
“봐라.”
쿠란이 저 멀리 거대한 알을 가리켰다.
“어? 알이네?”
“곧 우리 아가가 태어날 거란다.”
“아하!”
오토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은 이미 낳았고, 곧 새끼 드래곤이 부화한다는 의미였구나.’
그때.
쩍! 쩌어어억!
알이 스스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헛!”
“어머!”
드래곤 부부가 황급히 알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도 가 보자.”
“알겠다.”
오토와 엘리제 역시도 부화 직전의 알을 향해 다가갔다.
쩍! 쩌적!
쩌어어어억!
표면에 마치 거미줄과 같은 균열이 이는가 싶더니, 이내 곧 알이 두 쪽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새끼 드래곤…… 이 아니라.
“응애! 응애애애애! 으애애애애애애애애! 응애애애애애애애!”
알을 깨고 나온 건 드래곤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한 신생아였다.
“그래, 아가야. 이리 오려무나.”
아드리아나가 조심스레 아기를 안아 들었다.
“아이고, 예쁜 내 새끼!”
쿠란이 아기를 바라보며 예뻐 죽겠다는 듯 어쩔 줄을 몰라 했다.
“…….”
“…….”
오토와 엘리제는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만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들이 가진 상식으로는 드래곤의 알에서 인간 아기가 튀어나올 수 있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 * *
오토와 엘리제는 일단 드래곤 부부를 축하해 주고, 태어난 아기에게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라란 덕담을 해 주었다.
“오토야.”
쿠란이 미소 띤 얼굴로 오토에게 말했다.
“잘 이해가 가지 않겠구나.”
“예, 조금은.”
“전에도 말했다시피 우리 부부는 헤츨링을 낳을 생각이 없었단다. 왜냐하면, 헤츨링을 낳는다면 역사상 가장 외로운 드래곤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지.”
현재 이 세계에 남아 있는 드래곤이라고는 쿠란과 아드리아나뿐.
그마저도 두 드래곤 모두 지나치게 고령이라서, 수명이 몇십 년도 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만약 부부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헤츨링은 최후의 드래곤으로서 앞으로 수천 년 동안 홀로 외로움과 맞서 싸우며 살아가야 할 신세인 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인간 아기를 낳기로 했단다. 육체는 인간의 것이되,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아이를.”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나요?”
“이 아이는 인간과 같은 수명을 지닌 채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될 거란다. 자신이 드래곤인지도 모른 채 말이다.”
쿠란이 설명했다.
“언젠가 이 아이가 커서 결혼해서 자식들을 낳으면, 그 자식들은 또 다시 자식들을 낳겠지. 그렇게 하면…….”
“아!”
오토가 그제야 쿠란의 말뜻 이해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우리 인간들 사이에 드래곤의 피가 퍼지겠네요? 몇 대에 걸쳐서?”
“그렇단다. 이 똑똑한 녀석 같으니.”
쿠란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드래곤의 혈통은 완전히 사라지는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가장 번성한 종족인 너희 인간들 곁에 늘 남아 있게 되는 게야.”
“아아!”
“우리의 피가 흐르는 자손들은 계속해서 드래곤이란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기억할 거란다. 수천 년이 지나 드래곤이란 종족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조차 부정당하는 시대가 온다고 해도. 상상의 동물로나마 영원히 기억되는 게야.”
오토는 쿠란의 설명을 듣고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괜히 지혜로운 게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멸종을 앞둔 마당에 이런 식으로나마 혈통을 남기고, 드래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도록 만들다니…….
“그럼 이 아기는 평범한 인간인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네?”
“드래곤의 피를 각성한다면, 잠시나마 드래곤의 힘을 사용할 수는 있을 게다.”
“아하!”
“어쩌면 이 세계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이 아이의 자손들이 드래곤의 힘을 각성해서 창조주로부터 부여받은 우리 드래곤들의 책임과 의무를 대신 짊어질 수도 있겠지. 끌끌끌.”
그야말로 완벽한 계획.
비록 궁여지책이지만, 정말이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방법이었다.
“오토야.”
“네, 어르신.”
“네 녀석이 우리 아이의 대부(代父)가 되어 줄 수 있겠느냐? 우리 부부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단다. 기껏해야 몇 년이 남아 있을 뿐이지.”
“헉!”
“이 아기를 잉태하는데 너무 힘을 썼더니 수명이 더욱 깎여 버리고 말았더구나. 허허허.”
“어르신…….”
“부탁이다. 이 아이의 대부가 되어다오. 이 아이가 이담에 커서 우리 드래곤들의 혈통을 이 세상에 퍼뜨릴 수 있도록.”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르신.”
오토는 기꺼이 쿠란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어르신이 계시지 않더라도, 제가 최선을 다해서 보살필게요.”
“정말 고맙구나.”
“그런 말씀 마셔요. 대신 남은 시간만이라도 행복하게, 건강히 오래오래 살아 주세요. 단 하루라도 아이와 떨어지지 마시고요.”
오토가 쿠란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 * *
그날 밤.
오토는 문득 외로워졌다.
카미유와 카이로스는 장가가서 곧 아빠가 될 예정이고.
드래곤 부부는 이미 아이를 낳았고.
“……다들 이렇게까지 행복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오토가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입을 삐죽였다.
“그렇게까지 부러워할 필요 없다.”
엘리제가 오토를 달랬다.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나는 힘닿는 데까지 낳고 싶다.”
“하하, 하하하하…….”
“나는.”
엘리제가 말했다.
“행복한 가정을 꾸려서, 한 남자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살아가고 싶다.”
“검은?”
“죽는 그날까지 내려놓을 생각은 없다. 다만.”
“……?”
“계속 이렇게 전쟁터를 전전하며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아.”
오토는 엘리제의 마음을 이해했다.
엘리제는 검의 명가 잘츠부르크 가문에서, 그것도 역사상 두 번 다시없을 천재로 태어난 사람.
성인식을 마친 후부터 지금까지 북부 장벽에서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러온, 그야말로 척박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었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사람을 죽였다.”
엘리제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은 피로 얼룩진 삶을 살고 싶지 않다.”
“엘리제…….”
“내게 숙명이 있다는 것쯤은 어렴풋이 알고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재능과 힘을 지니게 된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게도 삶이 있다. 내게 주어진 숙명을 다하고 나면, 그때는 전쟁터를 떠나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다. 너,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아내로서.”
오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엘리제에게 다가가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그렇게 될 거야, 꼭.”
“……약속할 수 있겠나?”
“얼마든지.”
오토는 카미유가 해 주었던 조언을 떠올렸다.
‘그저 아가씨께서 여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끔 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만.’
오토는 어쩌면 카미유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이오타 왕국의 행렬이 북쪽으로 향했다.
행선지는 북부장벽에 자리한 잘츠부르크 가문의 영토.
그곳에서 오토와 엘리제의 약혼식이 열릴 예정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