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2화
로웨나를 이용해 칼리프 왕국의 북부지역을 장악, 이스마일족들을 토벌하고 라시드를 제거한다는 오토의 계획은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칼리프 왕국은 마정석이란 전략자산의 주요 공급처였기에, 내전이 벌어진다면 앞으로 공급에 차질이 빚어지리라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
그러나 북부제국의 침공을 대비해야 하는 입장에서 직접적인 개입은 아무래도 버거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로웨나를 움직인다면?
‘해결되지. 깔끔하게.’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라면, 로웨나는 라시드와 손잡고 마수드를 압박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토와 로웨나가 손잡은 이상 라시드는 동맹이 아닌 적일뿐이었다.
편지 한 통이면 화가 머리끝까지 난 로웨나가 이스마일족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킬 테고, 그럼 상대적으로 열세인 이스마일족은 그 길로 멸망할 것이 분명했다.
내전을 아주 깔끔하게 끝내 버리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이러면 칼리프 왕국의 북부 산맥을 통과해서 로웨나가 장악한 지역을 칠 수도 있겠지.’
장기적으로 놓고 봤을 때, 로웨나를 제거하기에도 안성맞춤인 세력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은 덤이었다.
오토로서는 이러한 마다할 이유가 없는 모략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로웨나를 칼리프 왕국으로 보내놓으면, 당분간은 눈에서 거슬릴 일도 없을 테고.
‘판이 잘 깔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황제만 어떻게 잘…….’
그때.
“전하.”
“깜짝이야!”
오토는 누군가 불쑥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생각을 멈추고 소스라치게 놀라야만 했다.
“하, 핫산?”
“핫산이 전하를 뵙습니다.”
“니가 여긴 웬일이야?”
오토는 이오타 왕국의 수도에 있어야 할 핫산이 이곳 잘츠부르크 가문에 있는 걸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오타 왕국에서부터 따라왔었는데, 모르셨습니까?”
“으응?”
“저 계속 곁에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노르딕 산으로 가실 때 빼곤.”
오토는 핫산의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누굴 장님으로 아나.’
이 무슨 말 같지 않은 소리인지…….
“아.”
핫산이 그제야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실 얼마 전에 기연을 얻었습니다.”
“응? 기연?”
“스푸너 교육사령관님께서 제 잠재력을 개화해 주셨습니다.”
“……!”
“그 뒤로 갑자기 은신 능력과 일격필살의 검술의 점점 발전하기 시작하더니…….”
핫산이 그간 자신에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진짜 핫산이었냐.”
오토는 핫산의 이야기를 듣고 어이가 없었다.
칼리프 왕국에서 우연찮게 주운 하급 암살자인 핫산이, 사실 사신(死神)이었을 줄이야!
* * *
당시 이름이 똑같아서 설마 했지만, 핫산이라는 이름이 워낙 흔하기에 그냥 넘어갔었다.
이오타 왕국으로 데리고 온 후에도 딱히 잠재력이 발현되는 것 같지도 않았고.
그래서 일자리를 주고 좋은 대우를 해 줘 가면서 이오타 왕국에서 정착해 살 수 있도록 배려했는데, 스푸너를 만나 그 능력을 각성하게 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오토였다.
소 뒷걸음질 치다가 쥐 잡는 것도 유분수지, 이렇게 어이없이 라시드의 영웅을 손에 넣게 되다니…….
이로서 라시드는 자신이 가진 가장 강력한 패를 잃어버린 셈이었다.
본의 아니게 라시드의 인재를 등용해 버린 것이다.
‘아마 그 사건 이후에 어떻게 각성하고, 급성장했었나 보네. 나를 만나서 급성장할 기회가 없었던 거고. 다행히 운 좋게 스푸너를 만나서 능력을 개화한 거구나.’
오토는 그제야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만약 스푸너가 통찰의 마안을 얻지 않았더라면.
핫산이 그런 스푸너와 가까이 있지 않았더라면.
핫산이 사신으로서 각성할 일은 없었을 터.
하마터면 영웅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거 보면 운도 중요해. 실력이 전부가 아냐.’
진정한 강함을 손에 넣은 자들도 숱한 사선을 넘나들며 살아남고, 천운을 얻어 만들어진 것.
개인의 노력과 재능, 실력만으로 다 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때로는 운이라는 요소도 인생에 있어 어마어마하게 중요하게 작용하는 법.
오토는 사소한 행운 하나가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아니이. 따라다니는 건 좋은데 말은 해야 할 거 아냐. 소름 돋잖아.”
“죄,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꼭 말 좀 해 줘. 알겠지.”
“예, 전하. 그런데…….”
“응?”
“아라드 제국으로 하여금 이스마일족을 토벌하도록 하실 계획이십니까?”
“그렇지?”
“그럼 저를 파견해 주십시오.”
“응?”
오토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긴 왜? 설마 불편한가? 전 주군을 치는 게?”
“아닙니다.”
핫산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부족에서도 버려진 고아에 불과합니다. 하사신들은 오직 암살을 위해 키워진 일회용품이자 소모품에 불과할 뿐이지, 이제 와 무슨 충성심이 있겠습니까?”
“그럼?”
“산상노인 라시드의 영토 안에 있는 성지에 하사신들의 성서가 있습니다.”
“아!”
오토는 핫산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 성서를 찾아서 더 강해지고 싶다 이거지?”
“예, 전하.”
“음!”
아무리 잠재력을 각성했다고 한들 오랜 세월 체계적으로 정립된 수련 방법을 모른다면 한계가 있는 법.
지금 핫산은 넘치는 잠재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더욱 강해질 방법에 목말라 있는 게 분명했다.
하사신들의 성서는 하사신들의 암살 비기들이 한가득 수록되어 있었기에, 핫산이 손에 넣기만 한다면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진짜 죽음의 신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던 것이다.
“좋아.”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검사 열 명을 붙여 줄 테니까, 아라드 제국군에 합류해서 하사신들의 성서를 찾아.”
“예, 전하.”
“내가 방법을 알려 줄게. 어떻게 하면 되냐면…….”
오토는 라시드를 요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상세한 내용을 핫산에게 알려 주었다.
굳이 직접 가서 지휘할 것도 없이, 핫산을 보내 로웨나를 원격으로 조종한다면 라시드를 쳐부수는 것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맙소사.’
카미유는 곁에서 그런 오토를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데, 오토는 대륙 정세를 떡 주무르듯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신흥강국이자 강대국인 이오타 왕국의 왕인 주제에 잘츠부르크 가문, 쿤타치 공국, 로웨나, 테르테미안, 파라곤, 아즈란 성국, 칼리프 왕국, 키이우 왕국, 남쪽 바다 등등.
이쯤 되면 오토야말로 세계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흑막(黑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 세 치 혀에 세력 하나 지도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고, 세계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으며, 또한 전쟁이 멈출 수도 있었다.
어느덧 오토의 혀야말로 이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전략병기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 * *
며칠 뒤.
척! 척! 척! 척!
황제의 허락을 받아낸 로웨나는 즉시 아라드 제국군을 이끌고 칼리프 왕국의 북부 산악지대인 알라무트로 향했다.
이스마일족의 영토이자 산상노인 라시드의 마시아프 성(城)을 공략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아, 아니! 이 무슨!”
한편, 라시드는 아라드 제국군이 침공해오고 있단 보고를 받고 그만 기절할 뻔했다.
기껏 동맹을 꾀하려 보냈던 사신이 끓는 기름에 튀겨졌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도 피를 토할 뻔했는데, 이제는 대규모 전면전을 걸어오다니.
정말이지 개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좋은 조건으로 동맹을 제안해 놓고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대륙 역사를 뒤져 봐도 흔치 않은 경우일 게 분명했다.
물론 라시드의 근거지인 알라무트는 험준한 산악지형인지라 아라드 제국군이라 할지라도 점령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칼리프 왕국군까지 함께 쳐들어온다면, 지형적인 이점을 살리더라도 패전은 불가피해 보였다.
이스마일족이 멸망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야속하게도, 그럴 예정이기도 했다.
비슷한 시각.
“아아! 상부 어른께서는 진정 대천사 지브라일 님의 화신이시구나! 아난은 위대하시다!”
마수드는 오토가 보낸 편지를 읽고, 그가 정말로 대천사 지브라일이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 선대 술탄이 갑자기 승하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군주가 된 마수드의 입장에서 라시드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적이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셈치고 오토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인데,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아라드 제국군을 보내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고작 편지 한 통으로 저 무시무시한 산상노인 라시드와, 그의 세력인 이스마일족을 쳐부술 수 있게 해주다니.
그야말로 전지, 전능.
마수드가 오토를 대천사 지브라일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마수드의 아버지 살라딘이 참된 진리를 설법하고 승천할 수 있도록 경전을 넘겨준 이 또한 오토.
이미 많은 칼리프인들에게 있어 오토는 지브라일 대천사의 화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했고.
“지브라일 대천사님께서 군대를 보내 주셨다! 모두 전쟁을 준비하라!”
“예! 술탄!”
마수드가 앳되지만 근엄한 목소로 전쟁을 라시드 토벌을 선언했다.
그렇게 칼리프 왕국 내전은 시작되었다.
이미 승패는 정해져 있었지만 말이다.
* * *
오토는 잘츠부르크 가문에 도착하자마자 성물인 혹한의 강인함을 사용했다.
‘억울하겠지만 어쩔 수 없지. 나 하나 좋자고 이러는 게 아니니까.’
그들의 불가사의한 근력, 혹한에 견디는 힘, 적은 음식을 먹고도 더 높은 효율을 내는 체질 등등을 반토막 내다 못해 아예 허약체질로 너프를 시켜 버렸다.
‘진짜 신비한 성물이긴 해. 장벽 너머의 땅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게 아쉽지만.’
혹한의 강인함의 효과는 가히 절대적인 것.
만약 이 성물의 효과를 장벽 너머가 아닌 안쪽에서도 발동시킬 수 있었다면, 세계는 이미 북부 야만부족들의 발아래 있었을 터였다.
그만큼 혹한의 강인함은 이 세계에서도 가장 강력한 효과와 영향력을 가진 성물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혹한의 강인함은 매우 정밀하고 세밀한 능력 발휘가 가능한 성물이었다.
누구는 강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었고, 누구는 약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는 조절 능력까지 갖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토는 혹한의 강인함을 이용해 오직 전사들만이 약해지도록 만들었다.
‘애꿎은 애들이나 평범한 사람들까지 희생시킬 순 없어.’
그게 오토가 스스로 정한 선이었다.
아무리 모략을 꾸민다 한들 군인이 아닌 아이들과 평범한 사람들까지 공격해 가면서 계획을 성공시키긴 싫었던 것이다.
왜?
괴물이 되기 싫었으니까.
‘이건 게임이 아니다. 철저히 현실이다. 게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간 타락하고 말 거다.’
오토는 그런 생각으로 오직 야만전사들만을 표적으로 삼아 성물의 힘을 사용했고, 느긋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갑자기 약해진 야만전사들은 근력이 약해질 테고, 장벽 너머의 추위에도 지금처럼 잘 견뎌낼 수 없을 것이며, 식량도 몇 배나 더 먹어야 할 터.
못해도 하루 이틀이면 난리가 날 테니, 아라드 제국군의 화친에 응할 것이 분명했다.
당장 전사들이 얼어 죽거나 굶어 죽게 생겼는데, 생존을 최우선적 과제로 생각하는 야만부족들이 원조를 거부할 리가 없었다.
적어도 오토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랬는데…….
“스, 슬슬 얘기가 나올 때가 됐는데……?”
오토는 1주일이 지나도록 야만부족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조급해졌다.
‘뭐지? 성물의 힘이 발동을 안 했나?’
마음이 급해진 오토는 카심으로 하여금 까막이를 타고 야만부족들의 진영을 공중에서 정찰해 오란 명령을 내렸다.
며칠 뒤.
카심이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예, 전하.”
카심이 보고했다.
“야만전사들의 힘이 엄청나게 약해서, 어마어마한 비전투 손실이 일어난 게 분명합니다. 지금 야만부족들은 전투는커녕, 생존도 버거워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혹한의 강인함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되긴 한 모양.
‘그런데 왜???’
어째서 야만부족들이 대화를 거부하고 아무런 반응도 없는지,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소신이 판단하기에는…….”
카심이 덧붙였다.
“아무래도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
“가까이서 지켜본 결과 웃통을 벗고 억지로 운동까지 하면서 꾸역꾸역 버티고 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얼어 죽는 전사들마저 간혹 나올 정도로 상황이 심각한데도 온갖 무식한 방법으로…….”
카심의 보고를 받은 오토는 그만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