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4화
“제가 말했죠? 곧 동맹이 이루어질 거라고.”
“그, 그러네?”
케레스는 오토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깜짝 놀랐다.
얼마 전.
오토는 케레스와 로웨나의 약혼을 이야기하면서, 딱 1~2년만 참으면 쿠사키나와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을 거라 호언장담했다.
그런데 그 말이 불과 몇 달 만에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금단의 사랑에 희망의 씨앗이 싹튼 것이다.
“잠깐만 약혼했다가, 로웨나가 실각해서 처형당하면 그때 파혼하고 쿠사키나와 결혼하시면 됩니다. 일단 휴전협정을 맺었으니까, 야만부족들과 아라드 제국 간 사이는 차근차근 개선하면 되고요.”
“오오오!”
“못 본 지 한참 되셨죠? 제가 특별히 사절단에 넣어 드린 거니까, 이번 기회에 멀리서나마 얼굴이라도 보세요. 눈이라도 맞추셔야죠.”
“정말 고마워!”
케레스가 오토의 손을 덥석 잡으며 고마워했다.
“나 진짜 동생만 믿고 있을게!”
“예, 믿으셔도 됩니다.”
“앞으로 동생이 시키는 건 뭐든지 하고!”
“에이, 별말씀을.”
“정말이야! 진짜로 시키는 건 뭐든지 다 할게!”
“정말요?”
“응!”
케레스는 마치 사탕을 쥐여 준 꼬맹이처럼 천진난만했다.
잘츠부르크 가문 출신답게, 한평생 검만 휘두르며 살아온 탓도 있었지만 타고난 성격 자체가 그랬던 것이다.
‘누가 바보삼형제 막내 아니랄까 봐.’
오토는 그런 케레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디 가서 사기당하기 딱 좋은 타입이라니까.’
오토는 그렇게 생각하며, 케레스에게 말했다.
“너무 기뻐서 경거망동하지 마시고, 일단 잠자코 있으세요. 자, 그리고 할아버님께는 야만부족들의 문화와 관습에 대해 자세히 안다고 말씀드려 놨으니까 그런 줄 아시고요.”
“응!”
오토는 케레스를 만나고 숙소로 돌아가던 중 우연히 엘리제와 마주쳤다.
“자기!”
오토가 쫄래쫄래 엘리제를 향해 다가가 척 들러붙었다.
“어디 갔다 오는 건가?”
“케레스 형님 만나러. 이번에 사절단에 같이 가기로 했거든.”
“케레스 오라버니를?”
“응.”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 텐데.”
엘리제가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케레스 오라버니는 바보다. 무슨 실수를 할지 모르는데 그런 중요한 자리에 왜 데려가는 건가?”
“바, 바보라고?”
오토가 깜짝 놀랐다.
케레스가 바보라는 건 오토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설마 엘리제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흘러나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케레스 오라버니가 여태까지 무슨 짓들을 저질렀는지 안다면 그렇게 얘기할 수밖에 없을 거다.”
“도대체 뭘 했는데?”
“살짝 얘기해 주자면…….”
엘리제가 케레스가 벌인 바보짓 몇 가지들을 오토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사람인가.”
오토는 그 기상천외한 일화들을 전해 듣고 경악하고 말았다.
케레스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멍청해서, 지능지수가 거의 동네 바보 수준이었던 것이다.
“정 데려갈 거면 무슨 사고를 칠 줄 모르니 조심해야 한다.”
“아, 알겠어.”
“그리고.”
엘리제가 오토에게 다가가 뺨에 입을 맞췄다.
“……!”
오토는 엘리제의 선제공격(?)에 크게 당황했다.
오토가 먼저 입을 맞췄으면 맞췄지, 이렇게 엘리제가 먼저 다가올 줄이야.
“정말 고맙다.”
“뭐, 뭐가?!”
“덕분에 전쟁터를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아……!”
오토는 엘리제가 어째서 고마워하는지를 깨달았다.
엘리제가 세계관 최강자라고는 하나, 그녀 역시 사람.
날이면 날마다 전쟁터에서 살육을 벌인다는 게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간 많이 힘들었지.”
오토가 엘리제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괜찮아. 이제 늘 전쟁터에 있지 않아도 돼.”
물론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북부제국의 침공이 다가오고 있었고, 세계대전의 위협은 여전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전쟁터에서 전투를 벌이지는 않아도 되었다.
이제 엘리제에게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여유라는 게 생긴 것이다.
‘그래, 그래야 돼. 그게 내가 움직이는 이유다.’
그게 오토가 움직이는 이유였다.
엘리제를 위해서.
* * *
잘츠부르크 가문과 야만부족 간의 회담은 장벽 너머에서 이루어졌다.
사실 야만부족이 장벽을 넘어와 잘츠부르크 가문으로 오는 것이 옳았다.
지금 아쉬운 입장은 야만부족이었고, 잘츠부르크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장벽 너머를 장악하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는 잘츠부르크 가문 측에서 장벽을 넘어가길 강력히 주장했다.
이럴 때일수록 야만부족들의 자존심을 세워 주는 것이 앞으로의 관계 회복에 있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진 회담.
“…….”
“…….”
“…….”
회담 장소에는 그야말로 무거운, 숨 막힐 것 같은 정적만이 흘렀다.
양측 모두 선뜻 입을 열지 않았고, 오직 살기 가득한 눈을 빛내며 서로를 노려볼 뿐.
당장 칼부림이 일어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오직 한 사람.
케레스만이 옅은 미소를 띤 채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정작 상대편인 라그나르의 딸 쿠사키나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케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는데도.
‘진짜 분위기 파악 못하네. 어휴.’
오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대화의 물꼬를 텄다.
오토라도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이렇고 10시간도 서로 노려보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여기, 미리 보내드렸던 협정서입니다.”
오토가 라그나르를 향해 서류를 내밀었다.
“내용은 보내드렸던 것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으니, 살펴보시고 인장만 찍으시면 됩니다.”
“네놈, 그때 그놈이로군. 사기꾼의 눈을 가지고 있는.”
라그나르가 경멸 어린 눈초리로 오토를 노려보았다.
“감히.”
지안카를로가 분노를 드러내었다.
“내 손주사위에게 사기꾼이라니. 협정을 파기하고 싶은가? 라그나르?”
“사기꾼에게 사기꾼이라 했을 뿐이오.”
라그나르가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우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는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무슨 꿍꿍이가 있을 테지.”
“본국은 마음만 먹으면 네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다.”
지안카를로가 북부대공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며 라그나르를 압박했다.
“그대도 그것을 뻔히 알 텐데?”
“크흠.”
“본국은 다가오는 더 큰 위협에 대비해 네놈들과 손을 잡으려는 것일 뿐이다. 네놈들이 예뻐서 살려 주는 게 아님을 알아라.”
라그나르는 지안카를로의 말에 아무런 말도 못했다.
현재 야만전사들이 전투불능에 빠진 덕분에, 야만부족들은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에 불과했다.
지안카를로의 말대로, 아라드 제국이 마음만 먹으면 야만부족들을 몰살시키는 건 일도 아니었던 것이다.
“더 큰 위협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북부제국의 대대적인 침공이 있을 예정이다.”
“북부제국……? 저 바다 건너에 자리한 그놈들 말이오?”
“그렇다.”
지안카를로가 대략적인 자초지종을 라그나르에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가 판단하기에, 그놈들의 전력은 상상 이상이다. 그러니 싫어도 그대들과 손을 잡으려는 것이다.”
“역시 의도가 있었군.”
“의도가 없었다면 어찌 그대들과 손을 잡겠나?”
지안카를로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본국의 입장에서 그대들이 북부제국과 손을 잡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텐데. 이렇게라도 미리 협정을 맺고, 함께 북부제국의 침공에 대비할 수밖에.”
“확실히 이해가 되오.”
“마음 같아선 그대들이 북부제국에 붙을 것을 우려해 지금 당장 쓸어버리고 싶었지만, 여기 내 손녀사위의 간곡한 설득 덕분에 참은 줄 알라.”
지안카를로가 오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사기꾼 네놈이?”
라그나르가 의외라는 듯 놀랐다.
‘이게 진짜. 말끝마다 사기꾼이래.’
오토는 살짝 기분이 나빴지만, 자리가 자리이니만큼 꾹 참았다.
“대륙인들의 입장에서 야만부족, 아니 혹한의 자손들이 북부제국과 손을 잡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 사실 할아버님의 말씀대로, 이 기회에 그대들을 쓸어버리는 게 가장 합리적이겠지요.”
“크흠!”
“다만 혹한의 자손들은 목숨을 구해 준 것에 대한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는다 했으니, 이번 기회에 지난 수백 년 동안의 원한을 잊고 화친을 맺고자 하는 것입니다. 북부제국에 맞서 서로 등을 맞대고 싸운다면, 지난 원한을 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오토의 말은 구구절절 옳아서, 라그나르로서는 도저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우리를 믿고 도와주겠다는 말이로군.”
“예.”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혹한의 자손들이 우리 대륙인들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 대륙인들 역시 혹한의 자손들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합니다.”
“그렇겠지.”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오토가 케레스를 한번 슥, 돌아보고는 라그나르에게 말했다.
“공주이신 쿠사키나를 볼모로 보내주십시오.”
“감히!”
라그나르가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쳤다.
“내 하나밖에 없는 딸을 볼모로 보내라는 것인가!”
“최소한의 신뢰를 보여 달라는 의미입니다.”
“크흠!”
“아시다시피 이번 협정은 본국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이고, 자존심 또한 많이 구겼습니다. 언제든 그대들을 쓸어버릴 수 있는 상황인데도.”
“…….”
“지난번 만남을 기억하십시오.”
오토가 라그나르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우린 라그나르 님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그건.”
“이 이상의 호의는 베풀기 어렵습니다. 결정하십시오. 제안을 받아들이실지, 아니면 이대로 전쟁을 계속할지.”
오토가 최후통첩을 날렸다.
“…….”
라그나르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이 세계에서도 딸을 아끼기로 소문 난 인물.
그런 그로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쿠사키나를 볼모로 보낸다는 게 쉽지 않은…….
“제가 가겠어요.”
쿠사키나가 나섰다.
“따, 딸아!”
“제가 볼모로 잘츠부르크 가문으로 가겠습니다.”
“하지만…….”
“대륙인들에게도 우리 혹한의 자손들의 신뢰를 보여 줘야 하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쿠사키나의 눈은 케레스에게 머물러 있었다.
* * *
‘동새에에에에에에에에에엥! 나이스으으으으으-!!!’
케레스는 하마터면 좋아서 미쳐 날뛸 뻔했다.
사랑하는 쿠사키나를 볼모로 데려올 생각을 하다니, 케레스로서는 지금 이 자리에서 공중제비라도 돌고 싶은 심정이었다.
쿠사키나가 잘츠부르크 가문에 볼모로 오면, 24시간 붙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쿠사키나도 그것을 알기에 선뜻 볼모로 가겠다 지원했던 것이고.
‘마냥 좋아할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오토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표정관리를 하고 있는 케레스를 돌아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휴. 저 바보. 로웨나랑 약혼한 걸 알면 쿠사키나가 가만히 안 있을 텐데. 그건 생각 못하고.’
어차피 깨질 약혼이긴 했지만, 쿠사키나 입장에선 충분히 기분 상할 만한 일.
케레스는 지금 좋아할 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해명을 잘해서 쿠사키나를 달랠지 궁리해야 했다.
“따님께서도 허락하셨으니, 이 건은 합의된 것입니까?”
“그, 그렇게 하겠다.”
그렇게 야만부족과의 평화협정은 쿠사키나가 볼모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됐어. 이제 한숨 돌렸다.’
그때.
“오라버니는 여전하시군요.”
오토의 시녀장 올리브가 나타나 라그나르를 향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오, 오라버니?!’
오토는 이게 뭔 소린가 싶어 고개를 홱! 돌렸다.
“오, 올리브나!”
라그나르가 올리브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뭔데 이거.”
오토는 라그나르와 올리브를 번갈아 바라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올리브가 야만부족 출신인 건 알았지만, 라그나르의 여동생일 줄은 오토조차도 몰랐던 사실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