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5화
“오라버니께선 여전하시군요.”
올리브가 씩, 웃으며 말했다.
“올리브나 고모?!”
쿠사키나가 올리브를 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주 오래 전 부족을 떠나 장벽 너머로 향했다던 고모가 상대편 진영에서 튀어나올 줄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건 오토 역시 마찬가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저 평범한 야만부족 출신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왕인 라그나르의 여동생이었을 줄이야…….
“어떻게 된 거죠? 시녀장님?”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전하.”
올리브가 오토에게 미소를 지었다.
“저는 전대 왕의 딸이었답니다.”
“하하… 하하하.”
“머저리들이랑 같이 사는 게 싫어 부족을 떠나왔지만요.”
“그, 그렇군요.”
“그래도 제법 강해진 것 같네요.”
올리브가 라그나르를 슥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 이만하면 됐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사실 제가 부족을 떠나온 건 오라버니가 약했기 때문이에요.”
그러자 라그나르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오, 올리브나! 그 얘긴!”
“쪽팔린 줄은 아시나 보죠?”
“제, 제발!”
“어려서부터 여동생한테 흠씬 두들겨 맞고 컸다는 게 알려질까 봐?”
“크윽!”
라그나르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듯 안절부절못했다.
“그 전설의 올리브나가 저 여인?”
“역시. 풍채가 우리 전사들에 못지않더라니.”
“야만부족 최고의 전사는 족장이 아니라 족장의 여동생이라더니. 그게 정말이었나 보군.”
야만부족의 전사들이 너도나도 수군덕거렸다.
“족장 자리를 양보해 준 보람이 있군요.”
“……크윽.”
“제법 많이 강해진 것 같아요.”
오토는 올리브의 말을 듣고 정신이 나갈 뻔했다.
‘족장 후보였어?! 심지어 라그나르보다 더 강했었다고?!’
올리브가 생각 이상으로 무시무시한 강자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에르제베트 왕국이 보낸 암살자들을 말 그대로 ‘접어서’ 몰살시켜 버렸단 보고를 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저 야만부족 출신이라 타고난 강함이겠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라그나르의 족장 자리를 위협하던 절대강자였을 줄이야.
“네가 쿠사키나니?”
올리브가 쿠사키나를 돌아보았다.
“네, 고모.”
“갓난아기 때 보고 처음 보는구나. 볼모로 와서 고생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단다. 이 고모가 잘 돌봐줄 테니까. 누구도 널 건드릴 수 없을 거란다.”
아무렴.
무시무시한 올리브가 곁에 있는데, 감히 쿠사키나를 업신여기거나 핍박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당장 올리브는 와지르 대공과 엘리제와 친분이 있었고, 오토의 시녀장인지라 그 지위와 영향력이 막강한 인물이었다.
애초에 쿠사키나를 괴롭히려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고.
“딸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것 같군요, 오라버니.”
“그, 그렇구나.”
“게다가 여기 계신 이분은 제가 모시는 국왕 전하세요.”
올리브가 오토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니 감히 전하를 향해 이놈 저놈 하신다면, 그땐…….”
올리브가 보란 듯 손가락 관절을 우득! 꺾어 보이며 라그나르를 압박했다.
“제가 다시 부족으로 돌아갈지도 모르니까.”
“히, 히익?!”
“제가 다시 수련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으신 거겠죠? 오라버니?”
불끈불끈!
올리브의 근육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 꿈틀거렸다.
“그, 그럴 일은 없지! 암! 그렇고말고! 하하하!”
“말조심하시겠단 말씀이시죠?”
“그러엄! 내 여동생이 모시는 자인데! 내 어찌 함부로 대하겠어!”
라그나르가 꼬리를 내리더니 오토를 돌아보았다.
“이보게, 오토 국왕.”
“예?”
“우리 앞으로 잘해 봄세.”
“…….”
“아까는 내가 말을 좀 세게 한 것 같군.”
오토는 라그나르의 태세전환에 어이가 없었다.
“그대가 내 여동생이 모시는 군주라는 걸 미처 몰랐구먼.”
“아, 예.”
“기왕 맺은 동맹이니, 앞으로 사이좋게 지내세나.”
결국, 휴전협정은 올리브의 등장으로 매우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마무리되었다.
쿠시키나 볼모 건으로 인해 자칫 험악한 분위기가 험악해질 수도 있었지만, 올리브의 존재 덕분에 희석되면서 원만하게 넘어갔던 것이다.
* * *
회담이 끝난 후.
“정말 믿을 수 있는 녀석…… 아, 아니 대륙인인 것이냐?”
라그나르가 올리브에게 물었다.
“네 주군을 욕하는 게 아니라, 솔직히…….”
“미덥지 못해 보인단 말씀이시겠죠.”
올리브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눈에 비친 전하는 겉만 번지르르한 기생오라비처럼 보일 테니까요.”
“그, 그렇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에 불과해요. 전하께선 지혜로운 분이세요.”
“지혜롭다라…….”
“불과 몇 년 만에 작은 시골 영지를 강대국으로 키워낸 분입니다.”
“……!”
“오라버니와 부족의 전사들 같은 머저리들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죠.”
“그, 그건 좀.”
“그럼 아닌가요? 싸우고 죽이고 빼앗는 것밖에 못하는 주제에?”
“…….”
“전하께서 우리 혹한의 자손들에게 손을 내미신 것은 결국 대의를 위한 것. 곱게 따라가시는 게 오라버니를 위해서라도 우리 부족을 위해서라도 좋은 일이라 확신해요. 어쩌면 이번 결정으로 인해 우리 부족이 번영을 누리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런 것이냐? 네가 그렇게 판단할 정도로?”
“네.”
올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전하를 믿어요.”
“으음.”
“처음 봤을 때는 시골 영지의 개망나니인 줄로만 알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어느새 오토에 대한 올리브의 평가는 180도 달라져 있었다.
오토가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성공시키면서 강대국을 일궈내는 걸 보고 그 능력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네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알겠다.”
“쿠사키나는 제가 잘 돌봐줄 테니 걱정 마시고요.”
“그래.”
라그나르는 여동생인 올리브를 봐서라도 대륙인들과 협력하기로 했다.
사실 야만부족 입장에서도 혹한의 땅에서 살아남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고, 애초에 좋아서 그 춥고 척박한 땅에 사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야만부족 역시 따뜻한 장벽 너머에 가서 살고 싶던 것이다.
* * *
한편, 케레스는 날아갈 것만 같이 기분이 좋았다.
‘드디어! 계속 붙어 있을 수 있어!’
쿠시키나가 잘츠부르크 가문에 볼모로 오면서, 케레스는 무척이나 신이 나 있었다.
그동안에는 목숨을 건 밀회를 해 왔지만, 이제는 같은 공간에서 매일 같이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일이 잘 진행되면 정략결혼이라면 명분으로 쿠사키나와 결혼할 수도 있을 거야! 동생이 그랬으니까!’
케레스는 오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야만부족들과 힘을 합쳐 북부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고 나면, 쿠사키나와의 결혼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팽팽 돌아가는 행복회로와는 다르게, 상황은 케레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케레스는 벌써 며칠째 쿠사키나로부터 철저히 외면받는 중이었다.
“쿠, 쿠사키나! 쿠사키나!”
케레스가 우연히 마주친 쿠사키나를 불렀지만,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쿠사키나!”
마침 주변에 사람도 없겠다, 케레스가 쿠사키나를 쫓아가 불러세웠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뭐가요?”
쿠사키나가 싸늘한 눈초리로 케레스를 노려보았다.
“왜 저를 붙잡으시는 거죠? 잘츠부르크 가문의 케레스?”
“왜 자꾸 날 무시하는 거야! 내가 며칠 동안 얼마나 불렀는데! 한 번도 만나 주지도 않고! 눈도 안 마주치고!”
“저에게는 당신과 할 얘기가 없습니다.”
“……!”
“이만 비켜주세요.”
“자, 잠깐!”
케레스가 다시 쿠시키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발… 이제야 마음껏 만날 수 있게 됐는데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
“더는 목숨을 걸고 만날 필요가 없…….”
“곧 결혼하신다면서요?”
“……!”
“로웨나 대공이란 여자와 약혼한 사이라던데, 아닌가요?”
“그, 그건!”
“비켜주세요. 유부남이 될 남자와 할 말 따위, 제겐 없습니다.”
“쿠사키나! 그게 아냐! 그건 다…….”
“비키세요.”
결국, 케레스는 쿠사키나로부터 매몰차게 거절만 당하고 울상을 지어야만 했다.
어떻게든 해명하려 했지만, 쿠사키나가 틈을 주지 않아서 졸지에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동생, 나 어떡하지? 나 좀 도와줘. 제바알…….”
결국, 케레스는 또다시 구원투수인 오토를 찾아가 애원했다.
오해를 풀고 싶은데,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토를 찾은 것이다.
“어휴.”
오토는 키이우 왕국으로 갈 준비를 하던 중 케레스의 방문을 받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니까 재빨리 해명부터 했어야죠.”
“미, 미안. 그건 생각을 못했어.”
“알겠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가서 말해 볼 테니까.”
“정말?!”
“로웨나랑 약혼하라고 말씀드렸던 것도 저니까, 이 정도 서비스는 해 드려야죠.”
“정말 고마워!”
“일단 계셔 보세요. 제가 가서 말해 볼 테니까.”
그날 밤.
“아, 오토 국왕.”
오토는 쿠사키나의 숙소로 찾아가 만남을 청했다.
쿠사키나는 오토의 만남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오토는 쿠사키나의 숙모인 올리브가 모시는 군주였기에, 그녀를 만나기가 매우 수월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 일이시죠?”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어떤…….”
“케레스 형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
“그간 두 분께서 목숨을 걸고 밀회를 해 오셨다는 거, 알고 있습니다.”
쿠사키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토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될 비밀을 알고 있었으니 그녀로서는 놀랄 수밖에.
“사실 케레스 형님이 약혼한 이유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시간을 벌어요……?”
“그 약혼은 어차피 파기될 겁니다. 케레스 형님은 쿠사키나 님과 맺어지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신 겁니다.”
오토가 그간의 사정을 쿠사키나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그게 정말인가요? 정말로 그가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한 건가요?”
“물론입니다.”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휴전협정도 맺었고,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하기만 하면 두 분은 정식으로 이루어지실 수 있습니다.”
“아……!”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 마시고, 케레스 형님과 잘 지내시는 건 어떨까요? 1년 안에 약혼은 깨질 거고, 그 뒤엔 결혼하실 수 있으실 텐데.”
“그이는 어디 있죠? 당장 만나고 싶어요!”
오토의 해명을 들은 쿠사키나는 즉시 케레스를 찾아 나섰다.
오해가 풀린 이상 더는 케레스를 외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 * *
그날 밤.
“케레스!”
“쿠사키나!”
한때 목숨을 걸고 금단의 사랑을 나누던 남녀가 만났다.
“흑흑. 정말 미안해요.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흑흑흑.”
“이제 다 괜찮아.”
케레스는 비록 바보였지만, 쿠사키나를 꼭 안아 주고 달래 주었다.
“내가 당신을 두고 다른 여자와 결혼할 리가 있겠어.”
“당신은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흑흑흑.”
“다, 당연하지!”
케레스는 살짝 찔렸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자신이 계획한 일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다 계획이 있었어! 하하하!”
“정말 대단해요, 당신.”
“이제 더는 목숨을 걸고 만날 필요 없어. 당분간은 조심해야겠지만… 그래도 매일 만날 수 있잖아.”
“맞아요.”
“이렇게 만나다가… 전쟁이 끝나면… 정식으로 청혼할게.”
“……!”
“우리 가문과 당신의 부족의 화합을 위해 정략결혼을 하는 식으로 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얘기야.”
“아!”
“사랑해, 쿠사키나.”
“저도 사랑해요.”
휘영청 밝은 달 아래 남녀의 입술이 포개어졌다.
“좋네.”
“동감합니다.”
숨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오토와 카미유는 빙그레 미소를 짓던 그때.
“이게 도대체 뭣들 하는 것이냐!”
불행히도, 근처를 지나던 북부대공 지안카를로가 그 광경을 딱 발견하고는 버럭 소리쳤다.
“헉!”
지안카를로와 눈이 마주친 케레스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하필 절대 걸리지 말아야 할 상대에게 현장을 잡혀 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