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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326화 (327/401)

제326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지안카를로가 버럭 소리치며 케레스에게 다가갔다.

“하, 할아버님!”

“어찌 된 일이냐 물었다.”

그야말로 서릿발 같은 목소리.

만약 야만부족들과 휴전협정을 맺은 상태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케레스를 베어 버렸을지도 모를 기세였다.

대의를 위해 휴전협정을 맺었을지언정, 수백 년 동안 쌓인 원한이 불과 며칠 만에 눈 녹듯 사라질 순 없는 노릇.

더욱이, 잘츠부르크 가문과 야만부족 간에 쌓인 원한은 만년설(萬年雪)에 가까운 것.

휴전협정을 맺자마자 원수의 딸과 놀아난다는 것은, 지안카를로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쿠, 쿠사키나! 먼저 가!”

케레스가 황급히 쿠사키나에게 자리를 피할 것을 권했다.

“아뇨.”

쿠사키나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도망치지 않겠어요.”

“쿠, 쿠사키나!”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쿠사키나가 야만부족의 예법대로 지안카를로에게 인사를 올렸다.

“공주께선 어찌 본 북부대공을 할아버님이라 칭하시오?”

지안카를로가 싸늘히 대답했다.

“할아버님이 되실 분이기에 그리 불렀을 뿐입니다.”

“할아버님이 되실 분이라…… 방금 이 늙은이가 헛것을 본 게 아니란 뜻이로군.”

“그렇습니다.”

쿠사키나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쿠사키나에게 있어 지안카를로는 악마나 다름없는 존재.

그런 지안카를로에게 당당하게 할아버님이라 부른다는 것은, 그녀가 정말이지 대단한 용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케레스에 대한 사랑 또한 엄청나다는 증거이기도 했고.

“언제부터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야만부족치곤 영리한 아가씨로군.”

지안카를로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만약 휴전협정 이전부터 밀회를 가졌다고 말한다면, 케레스는 적과 내통한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당할 수도 있는 것.

그러니 현장을 들켰다 하더라도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게 현명했다.

정황상 휴전협정 이전부터 만남을 가졌다는 게 명백함에도.

“나는 야만부족 출신 손주며느리를 들일 생각이 없소이다.”

지안카를로는 그리 말하고는, 케레스를 돌아보았다.

“네 이놈.”

“하, 할아버님.”

“감히 이 할아비가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 있는데, 코앞에서 이따위 행실을 벌였단 말인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케레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죽을죄를 지었다라…….”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적과 내통하고 있었다, 이 말이냐?”

“그, 그건 절대 아닙니다!”

“아니다? 그럼 이 할아비가 본 것은 무엇이냐?”

지안카를로가 분노하는 것은 당연했다.

휴전협정이 이루어진 뒤에야 이런 일이 발생했다면 그저 오다가다 눈이 맞았거니, 하고 넘겼을 거였다.

그러나 휴전협정 이전부터 만나왔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적과, 그것도 야만부족의 왕 라그나르의 딸과 내통했으니 군법으로 다스린다면 사형이 아니라 구족을 멸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었던 것이다.

“내 네놈을…….”

분노를 참지 못한 지안카를로가 검을 빼어 들려던 순간.

“전하, 어떡합니까?”

“……어떡하긴 뭘 어떡해.”

오토가 카미유의 물음에 대답했다.

“ㅈ된 거지.”

“방법이 없겠습니까?”

“에휴.”

오토가 한숨을 푹 내쉬며 풀숲을 나섰다.

“중재라도 해야지, 원.”

결국, 오토가 구원투수로 나서기로 했다.

* * *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오토가 사건현장으로 다가가 지안카를로에게 예를 올렸다.

“손녀사위 오셨는가.”

검을 뽑아들려던 지안카를로가 오토를 발견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예, 할아버님.”

“지금은 상황이 좋지 않으니 갈 길 가는 게 좋겠구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냥 지나치기엔 상황이 험악해질 것 같아 한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가문의 일. 네 녀석은…….”

“저는 집안사람 아닙니까?”

“그, 그건.”

“서운합니다.”

오토가 슬쩍 불쌍한 척을 해 보였지만, 지안카를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만큼 분노했기에, 오토의 능청을 받아줄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에라이.’

오토는 지안카를로의 완고한 태도에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할아버님.”

“말해라.”

“정황상 케레스 형님께서 명백히 죄를 지은 건 사실 같습니다만.”

“해서?”

“군법으로 다스린다면 케레스 형님의 목만 떨어지진 않지 않겠습니까?”

“……!”

“적, 특히 야만부족과 내통한 자들은 삼족을 멸한다는 게 군법 아닙니까?”

“이대로 케레스 형님께 죄를 물으신다면, 할아버님뿐 아니라 잘츠부르크 가문 전체가 위험합니다.”

“크흠!”

오토의 지적에 지안카를로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을 뿐 반박하지는 못했다.

군법대로 가자면, 잘츠부르크 가문까지 책임을 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케레스 형님께서 큰 죄를 지으신 것도 사실이고, 할아버님께서 분노하실 만한 것도 명백한 사실입니다. 다만, 집안일이니만큼 외부로 새어나가선 곤란하겠지요.”

“그도 그렇다만…….”

“게다가 케레스 형님은 로웨나 대공과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러니 쿠사키나 공주와의 만남에 대해서는 비밀이 새어 나가면 곤란합니다. 아무리 파혼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들, 그 전에 사건이 터져 버리면 잘츠부르크 가문이 황가를 농락한 것이나 다름없게 되지 않겠습니까?”

오토 역시 그 점만큼은 명백히 경계하고 있었다.

로웨나가 아무리 케레스에 마음이 없다고 한들, 대외적으로는 약혼한 사이.

중간에 쿠사키나가 끼게 되면, 로웨나로서는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다 여기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어찌 했으면 좋겠다는 말이냐?”

“우선 이 일이 새어 나가지 않게 입단속을 단단히 해야 합니다.”

“음.”

지안카를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조용히 넘어가되 서로 떨어뜨려 놓는 것으로…….”

“안 됩니다.”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뭐라? 안 된다?”

“혈기왕성한 젊은 남녀가 만나지 못하게 한다고 안 만나겠습니까? 케레스 형님과 쿠사키나 공주는 서로 원수지간이었던 시절에도 목숨을 걸고 밀회를 가져왔습니다. 그것도 전쟁터에서.”

“그럼 어떡하란 말이냐? 계속 이렇게 불장난을 하게 내버려두었다가는…….”

“차라리 사람을 멀리 보내십시오.”

“음?”

“키이우 왕국에 파견해 임무를 수행하게 하시면,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로웨나 대공과의 결혼도 늦출 수 있을 테고요.”

“……!”

“비밀 임무를 수행한다는 명목하에 키이우 왕국으로 보내시고, 신분을 숨기게끔 하시면 됩니다. 키이우 왕국의 왕 크바르는 저와 친분이 있으니, 흔쾌히 부탁을 들어줄 겁니다.”

그 순간.

“……!”

“……!”

케레스와 쿠사키나의 두 눈이 번뜩였다.

따로 떨어뜨려 놓는 게 아니라 붙여 놓으란 오토의 말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던 것이다.

“케레스 형님을 벌하시는 것은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하고, 로웨나 대공을 토벌한 이후에 진행하셔도 됩니다. 그때까지만 분노를 참아 주소서.”

“으음.”

“야만부족과의 휴전협정을 맺은 게 며칠 되지 않았습니다. 벌써부터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터져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네 말이 옳다만.”

“제가 케레스 형님과 쿠사키나 공주를 키이우 왕국으로 데려가겠습니다.”

지안카를로는 오토의 말을 한동안 생각해 보는 것 같으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괘씸하긴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구나. 네 녀석 말대로 하는 수밖에.”

오토의 말에 틀린 구석 하나 없어서, 지안카를로로서도 딱히 다른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케레스 이놈.”

지안카를로가 서릿발 같은 눈으로 케레스를 노려보았다.

“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것이나, 용서한 것이 아님을 알아라.”

“……죄송할 뿐입니다.”

“네 녀석에 대한 징벌은 나중으로 미뤄두도록 할 터이니, 각오 단단히 해야 할 것이다.”

“예, 할아버님.”

“괘씸한 놈 같으니.”

지안카를로는 그 말을 남기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사라져 버렸다.

“허억!”

긴장이 풀린 케레스가 털썩, 주저앉았다.

할아버지인 북부대공 지안카를로의 그 엄청난 압박을 견디다 못해 그만 탈진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 * *

“케레스!”

쿠사키나가 황급히 케레스를 부축했다.

“괜찮으신가요?”

“……헤에.”

“……!”

“헤헤헤.”

케레스는 웃고 있었다.

“전하, 케레스 도련님이 웃고 계십니다.”

“……미치겠네.”

오토는 상황이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바보처럼 웃는 케레스를 보곤 완전히 기가 질려 버렸다.

뇌리에 엘리제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케레스 오라버니는 바보다. 무슨 실수를 할지 모르는데 그런 중요한 자리에 왜 데려가는 건가?’

그 올곧은 성품을 가진 엘리제가 자기 오빠를 가리켜 바보라고 말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케레스는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바보라서, 할아버지인 지안카를로에게 벌을 받게 될 것보다 당장 쿠사키나와 딱 달라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던 것이다.

‘세기의 로맨스의 주인공이 이런 바보였다고???’

오토는 어이가 없다 못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닌가. 바보니까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해 보니 바보인 편이 차라리 개연성이 있을 것 같았다.

케레스나 쿠사키나나 자신의 목숨뿐 아니라 가문의 목숨을 내놓고 사랑을 나눈 사람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쉽지 않은 사랑이기는 했다.

“거 적당히 하시고 두 분 다 오늘은 그만 들어가십쇼. 괜히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마시고. 연애질은 키이우 왕국 가셔서 하세요. 제발.”

오토는 그 말을 남기고 발걸음을 옮겼다.

키이우 왕국으로 갈 준비를 마저 끝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 * *

오토가 키이우 왕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대륙 남쪽 바다에 자리한 꼬르륵 군도에서는…….

“제독! 전하께서 편지를 보내오셨습니다!”

“전하께서? 이런 젠장!”

이오타 왕국의 해군참모총장인 드레이크는 오토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책상 아래로 숨을 뻔했다.

“설마 또 상납금을 보내라고 하시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끄응.”

드레이크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오토는 가끔 드레이크에게 편지를 보내 예산이 부족하다며 하소연하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드레이크는 다른 해적들을 토벌해 상납금을 마련하느라 죽을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그러나 보니 어느새 드레이크는 다른 영주들마저 쳐부수고, 사실상 바다의 패왕이 되어 있었다.

돈을 구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바다를 장악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젠 진짜 털 곳도 없는데…….’

드레이크는 오토가 또 상납금을 바치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이제 대륙에는 해적들이 씨가 말라 버려서, 돈을 마련하려거든 다른 국가들의 해군을 공격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덜덜덜!

드레이크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해 보았다.

“어?”

드레이크는 편지 내용이 우려했던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고 눈을 깜빡였다.

편지의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3개월 안에 해군기지 방어를 위한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 모든 함대를 이끌고 북해(北海)로 올 것.

“이건……!”

드레이크는 편지에서 진한 포연(砲煙)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오토가 괜히 어마어마한 유지비가 드는 함대를 이끌고 오라고 했을 리 없었다.

그것도 세계의 끝과 끝인 남쪽 바다에서 북쪽 흑해까지?

이건 단순 훈련일 리 없었다.

분명 어마어마한 규모의 해전(海戰)이 예고되어 있는 게 분명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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