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그럼 일단 황제 폐하를 알현해야겠네요? 모조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예, 전하.”
에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모조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직접 보지 못한 물건을 상상으로 만들어 낼 순 없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죠?”
“30분에서 1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것밖에 안 걸리나요?”
“전하, 저는 드워프입니다.”
에릭슨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번 본 물건은 절대 잊어버리지 않지요. 또한, 스케치를 통해 원본을 기록할 테니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역시.”
오토가 드워프는 대단해! 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자리를 한번 만들어 봐야겠네요.”
“예?”
“저는 모조품이 꼭 필요하니까, 진품을 직접 살펴볼 기회를 만들어야죠.”
“하지만 전하.”
에릭슨이 걱정스럽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라드 제국 황제의 왕관을 훔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죠.”
오토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무리 나약하고 어리석은 자라지만, 세계최강대국의 황제는 황제.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기사들이 1년 365일 24시간 내내 황제를 호위하고 있었기에, 보관을 훔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어전을 포함해 황제가 머무르는 곳 주변에는 각종 고대의 마법이 걸려 있어서, 그걸 파훼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런데 어찌…….”
“다 방법이 있을 것 같으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하하.”
“그, 그렇습니까?”
“일단 저랑 같이 아라드 제국 황궁으로 갈 준비나 하시죠. 조간만 갈 테니까.”
“오오!”
에릭슨이 오토의 말에 흥분했다.
아라드 제국 황제의 왕관은 드워프들 가운데서도 장인(匠人)이 만들어 낸 것으로서, 보는 것만으로도 배울 점이 많은 역작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여태 볼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그럼 저는 군림의 보관에 관한 역사적 자료를 찾아보고 있겠습니다, 전하.”
“예, 알겠습니다.”
오토가 미소를 지었다.
* * *
절대권능은 이 세계관 내에 존재하는 모든 아이템들 중 가장 가치가 높은 것.
아라드 제국 황제의 왕관인 군림의 보관에 4가지 성물을 조합해서 만들어 내는 것으로, 재료는 다음과 같았다.
로웨나의 피로 만든 혈석(血石)인 <시산혈해>.
해적영주가 가진 푸른 사파이어인 <태풍의 핵>.
지저세계의 군주가 가진 비취인 <천지개벽>.
그리고 북부제국의 황제가 가진 자수정인 <강철심장>.
보석 형태로 된 이 4개의 성물을 조합하면, 초월 성물을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오직 오토밖에 모르는 조합식이기도 했다.
‘로웨나의 피 자체가 성물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없지. 대학살의 서가 없으면 애초에 피에서 혈석을 추출해 내지 못하니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군림의 보관이 사실 절대권능의 재료라는 걸 아는 사람도 없고.’
군림의 보관은 성물이 아니라 아라드 제국 황제를 상징하는 단순 사치품에 불과한 것.
그러다 보니 게임 영지 전쟁을 즐긴 수없이 많은 게이머들 중 군림의 보관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러다 보니 절대권능의 존재에 대해 아는 사람은 오직 김도진만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는 오토 드 스쿠데리아로 게임을 클리어한 유일무이한 게이머.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절대권능의 존재 역시도 알게 될 수밖에.
‘우선 군림의 보관을 손에 넣고. 태풍의 핵은 이미 드레이크가 가지고 있겠지. 그럼 남은 건 2개. 천지개벽과 강철심장만 얻으면 돼.’
오토는 그런 생각으로 아라드 제국의 황제부터 만나 보고자 했다.
성물 4가지를 다 모은다고 한들 군림의 보관이 없인 절대권능을 완성할 수 없었기에, 가장 중요한 플랫폼 역할을 하는 아이템부터 손에 넣으려는 것이다.
‘아라드 황제와 독대가 가능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역시 할아버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역시 이럴 땐 북부대공 지안카를로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는 아라드 제국의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인물.
지안카를로가 도와주기만 한다면, 황제에게 손쉽게 접근하는 것이 가능할 터.
그래서 오토는 즉시 키이우 왕국을 떠나 다시 잘츠부르크 가문의 영지로 향했다.
“카미유.”
“예, 전하.”
“휴가 줄 테니까 집에 다녀 와.”
“감사합니다.”
오토는 떠나기 전 카미유에게 휴가를 주었다.
현재 카미유의 아내는 곧 태어날 아기를 임신한 상태인지라, 남편의 보살핌이 절실한 상황.
오토는 악덕 상사였지만, 임신한 아내를 둔 부하직원을 계속 끌고 다닐 정도로 악독한 인간은 아니었다.
“카심 경.”
“예, 전하.”
“여기 남아서 크바르 국왕을 도와주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오토가 척 달라붙어 있는 케레스와 쿠사키나를 돌아보았다.
“거 적당히들 좀 하세요. 제발 부탁이니까.”
그러자 케레스와 쿠사키나가 얼굴을 붉히며 오토의 시선을 회피했다.
지난 며칠 동안 케레스와 쿠시키나가 얼마나 요란을 떨었는지, 왕궁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을 지경이었다.
“……오라버니에게도 짝이 있었을 줄은.”
엘리제는 그런 케레스와 쿠사키나 커플을 보고 어지간히 놀란 듯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케레스는 너무 바보라서 평생 장가 같은 건 못갈 줄 알았는데 무려 원수인 야만부족의 공주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을 줄이야…….
그래도 엘리제는 지안카를로처럼 분노하지는 않았다.
사실 엘리제 역시 야만부족들과의 전쟁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에, 차라리 잘되었다 싶었던 것이다.
오히려 엘리제는 이 기회에 케레스와 쿠사키나가 정략결혼을 맺는 식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케레스 쿠사키나 커플이 야만부족들과 대륙인들을 이어주는 시발점이 되어 주길 바란 것이다.
“갈까?”
“그러자.”
그렇게 오토는 엘리제, 그리고 에릭슨을 데리고 키이우 왕국을 떠나 잘츠부르크 가문으로 향했다.
* * *
‘어떻게 구슬리지?’
잘츠부르크 가문에 도착한 오토는 지안카를로를 만나기에 앞서 깊이 고민했다.
‘할아버님께 왕관을 훔칠 계획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하아.’
지안카를로는 충신 중의 충신.
그런 그에게 감히 황제의 보관을 훔치겠다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대충 거짓말로 구슬리자니 의견을 살 게 뻔하고, 지안카를로의 협조 없이는 보관을 살펴보거나 바꿔치기하는 게 쉽지 않았다는 것.
‘그래,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라 정직하게 용건을 말하자. 그래야 협조를 구하지.’
때론 모략과 권모술수가 아닌 정직함으로 승부를 봐야 할 때도 있는 법.
오토는 지안카를로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고 진성을 무기로 협조를 얻어내기로 했다.
“어쩐 일이냐? 요즘 이 늙은이를 자주 찾는구나.”
“예, 할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또 무슨 사기를 치려고?”
“예……?”
“듣자하니 이번에 키이우 왕국의 귀족들에게도 거하게 사기를 쳤다지?”
“그, 그건.”
“네 녀석이 여기저기서 사기를 치고 다닌다는 소리가 이 늙은이의 귀에까지 들려오는구나.”
“하하하…….”
오토가 멋쩍은 듯 뒤통수를 벅벅 긁었다.
“그래, 이번에는 이 늙은이에게 무슨 사기를 치러 왔는고?”
“어. 음. 그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니 속 시원히 말이나 해 보도록 해라.”
“그럼,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토가 용기를 내어 지안카를로에게 말했다.
“황제 폐하의 왕관을 훔치고자 합니다.”
“뭐라!”
지안카를로가 벌떡 일어나 노기를 드러내었다.
“네놈이 정녕 미친 모양이로구나!”
“……할아버님?”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이젠 하다하다 이 지안카를로를 상대로 제국을 훔치겠다 말하다니!”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닌 것이냐!”
지안카를로가 얼굴까지 시뻘게져서는 버럭 소리쳤다.
“왕관을 훔치겠다는데! 그 말에 제국의 황위를 찬탈하려는 네 녀석의 시커먼 속내가 담겨 있거늘!”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본의 아니게 오토를 오해해 버린 지안카를로였다.
“황위를 찬탈하겠다는 게 아니라 진짜 왕관을 훔치겠다는 뜻이었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 황제 폐하의 왕관을 훔치고 싶습니다.”
“음.”
지안카를로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왕관 자체에 관심이 있다고?”
“예.”
“이젠 사기로도 모자라서 도둑질까지 하겠다는 것이냐?”
지안카를로가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오토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왕관은 어디다 쓰려는 것이냐? 이 늙은이 때문에 황위에는 오르지 못할 것 같으니까, 왕관이라도 가지고 싶은 게냐?”
“……그런 거 아닌데요.”
오토는 정말로 억울해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사기꾼 취급으로도 모자라서 잠재적 역적으로 오해받더니, 이젠 황위에 집착해 왕관이라도 손에 넣으려는 변태 수집가로 낙인 찍힐 줄이야.
“사실은…….”
오토가 왕관을 훔치려는 이유에 대해 지안카를로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게 정말이냐? 그 군림의 보관이 그런 물건이었다는 게?”
“예, 할아버님. 북부제국의 침공 이후를 대비해서 미리 확보해 두려 합니다.”
“음. 그런 이유가 있었구먼.”
“더없이 불경한 행위인 줄은 알지만, 보관을 확보하지 못하면 추후 황자들이 일으킬 내전에서 발생하는 변수를 제어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황제 폐하께 청을 넣어 보는 것은 어떠냐?”
“눈과 귀가 두렵습니다.”
“기어코 훔치겠단 말이냐?”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바꿔치기할 모조품을 만들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훔치는 건 나중에 하겠습니다.”
“으음.”
“모든 일이 마무리되면 진품을 돌려놓겠다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어쩔 수 없구나. 한없이 불경한 행위인 줄은 알았다마는, 만일을 대비해 안전장치를 만들어 두는 게 좋을 터이니.”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거면 되겠느냐?”
“또 있습니다.”
“음?”
“황제 폐하의 곁에 믿을 만한 사람을 붙이고 싶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
지안카를로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오토를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의 곁에 있는 근위기사단은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자들일 뿐더러, 충성심이 넘치는 이들이다. 그런데 왜 따로 사람을 붙이길 바라느냐.”
“그건.”
오토가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위험하시기 때문입니다.”
* * *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세계대전은 북부제국이 침공해 오기 전에 벌어질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신호탄은 다름 아닌 아라드 제국 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였다.
이유는 아무도 몰랐다.
황제는 어느 날 갑자기 죽었고, 사인은 불명이었다.
내막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토조차도 그 이유를 몰랐다.
황제의 죽음은 암살이었는지, 혹은 지병에 의한 돌연사였는지 모호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황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아라드 제국의 정세는 급변했고, 로웨나와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기다렸다는 듯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황제가 건재하기에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평화가 깨지게 되는 것이다.
그게 황제가 갖는 가치였다.
아무리 무능하고, 어리석고, 바보 같더라도 살아 숨 쉬는 것 하나만으로 평화를 유지시켜 주는 존재이기에, 오토는 그를 보호할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북부제국의 침공을 막아내기 전까지는 황제가 살아 있어 주는 것이 대륙의 평화를 지키는 길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