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8화
에릭슨은 드래곤 부부의 뼈로 만든 검신들을 받자마자 즉시 검을 완성시키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이에 붉은 모루 부족의 드워프들 중에서 가장 실력 좋은 이들이 잘츠부르크 가문으로 달려왔다.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검을 구경한다는 것은 평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기회.
게다가 직접 검을 완성하는 과정을 지켜본다?
드워프들로서는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영혼을 팔아서라도 보고 싶은 구경거리였다.
드워프들은 잘츠부르크 가문의 대장간을 점거하고, 즉시 검 제작에 나섰다.
“전하.”
“네?”
“정말 죄송한 말씀이지만 멸겁화(滅劫火) 주문의 사용이 가능하시겠습니까?”
에릭슨이 오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멸겁화라면…….”
멸겁화는 화염계 마법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최고위 마법이었다.
그 온도가 드래곤의 숨결에 버금간다고 알려져 있으며, 물질이 아닌 영혼의 카르마마저 태워 버릴 수 있는 불꽃이었다.
즉, 애초에 뭔가를 불태우기보다는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는 데 목적이 있는 무시무시한 마법이었던 것이다.
“드래곤의 뼈로 날을 세우려면 드래곤이 직접 숨결을 불어넣어 주거나 멸겁화를 이용해야 합니다.”
“그래요?”
“드래곤의 뼈라는 게 강도가 어마어마하다 보니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날을 세울 수조차 없습니다.”
“그 정도라고요?”
“예, 전하.”
에릭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의 뼈로 만든 검은 불멸이기에, 멸겁화와 같은 불길이 아니라면 제련이 불가능합니다.”
“그럼 해 보죠, 뭐.”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펼치고 멸겁화 주문을 펼쳤다.
화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르!
아주 작은 불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멸겁화는 주변 15미터 안쪽의 모든 것을 바짝 말려 버릴 정도로 뜨거웠다.
“크윽!”
어마어마한 마나 소모에 오토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멸겁화는 그만큼 부담이 컸지만, 오토는 이를 악물고 마법을 유지했다.
스으으으!
이윽고 두 개의 검신들이 붉게 달아올랐다.
“됐습니다! 전하!”
에릭슨이 소리치고.
털썩!
오토가 탈진해 나가떨어졌다.
깡!
까앙!
에릭슨과 드워프들이 달궈진 달라붙어 망치질을 퍼붓고, 그들만의 특제 숫돌로 검신을 갈아내기 시작했다.
“이제 끝인가요?”
“아닙니다.”
에릭슨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한 달 동안은 계속해 주셔야 합니다.”
“뭐, 뭐라고요?!”
오토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한 달 동안 이 짓을 해야 한다고요?!”
“예, 전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아니이.”
오토가 울상을 지었다.
멸겁화는 단 1분을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나가떨어질 정도인데, 이 짓을 무려 한 달 동안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죄송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드래곤의 뼈는 날을 세우는 것만으로도 그 정도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재료인지라…….”
“…….”
“그나마 어르신들께서 막대기 형태로 제련해 주셨기에 망정이지, 원형 그대로였다면 10년은 걸렸을 겁니다.”
“맙소사.”
“남은 29일, 잘 부탁드립니다.”
오토는 죽고만 싶었다.
* * *
그날로부터 잘츠부르크 가문 대장간은 단 하루도 망치질이 멈추질 않았다.
오토는 매일 같이 멸겁화를 사용해주면서, 에릭슨과 드워프들이 검신을 제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에릭슨은 오토와 엘리제의 신체 치수를 1밀리미터 단위까지 정확하게 재고, 몸무게를 쟀으며, 손의 크기와 모양을 본뜨기까지 했다.
심지어, 오토와 엘리제의 눈과 눈 사이의 거리와 시야각이 얼마나 되는 지까지도 쟀다.
마치 맞춤 의복을 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전하와 아가씨께 가장 잘 어울리는 검을 만들기 위한 과정입니다. 조금 불편하시더라도 협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물론이죠.”
오토는 피곤한 와중에도 에릭슨에게 최대한 협조했다.
최고의 명검을 만들겠다는 그 장인정신에 감탄하고, 또한 감동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지나자 오토는 거의 미라가 되어 있었다.
“으어어어어어어…….”
매일 같이 멸겁화를 뿜어내었더니 탈진에 탈진을 거듭하면서, 사람이 거의 산송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드디어 검이 완성되었다.
“전하께 검을 바칩니다.”
에릭슨과 드워프들은, 그들의 전통 의상을 입은 채 오토와 엘리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
“……!”
오토와 엘리제는 비로소 완성된 검들을 보고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
‘아, 아름다워.’
오토는 태어나 처음으로 검이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드디어 완성된 검들은 결코 화려하지 않았다.
단아하면서도 고풍스럽고, 또한 소박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아름답다.
반투명한 검신은 마치 맑은 호수처럼 맑았고, 칼날받이와 자루는 수수하지만 은은한 멋이 났으며, 검신에 새겨진 용언(龍言)은 신비로움을 불러일으켰다.
“어르신들의 이름을 따 각각 쿠란, 아드리안이라 지었습니다.”
썩 훌륭한 이름이었다.
쿠란과 아드리아나 부부는 이제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은 드래곤들.
최후의 드래곤들을 기리기에 적합한 명명(命名)이었다.
“쿠란과 아드리안…….”
“잡아 보시지요.”
오토가 홀린 듯 손을 뻗어 자신의 검, 붉은색 검신을 가진 쿠란을 쥐었다.
“아……!”
오토는 쿠란을 잡아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손에 착, 하고 감겨드는 이 느낌.
무겁지만, 마치 솜털처럼 가볍게 느껴지는 모순된 무게감.
거기에 더해 느껴지는 포근함과 서늘함까지.
쿠란은 마치 신체 일부분처럼 느껴졌다.
생전 처음 잡아 보는 검인데도 불구하고, 평생 손에서 놓지 않은 그런 느낌이었다.
‘명검이란 게 이런 거구나.’
오토는 에릭슨이 어째서 신체의 치수까지 재 가면서 검을 제작했는지 깨달았다.
재료도 재료였지만, 장인(匠人)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검은 뭐가 달라도 달랐던 것이다.
“마치 평생 잡았던 검 같습니다.”
엘리제 또한 오토와 똑같은 것을 느꼈는지, 보기 드물게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우웅!
아드리안이 마치 주인을 알아보는 것처럼 은은히 진동했다.
자신의 주인이 이 세계에서 검을 가장 잘 이해하는 존재하는 걸 아는 듯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장인의 솜씨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토와 엘리제는 검을 만들어준 에릭슨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검을 쥔 사람으로서 이러한 명검을 소유한다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자 크나큰 영광.
그런 명검을 만들어 준 장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당연한 일일 테니까.
* * *
한편, 오토의 명령을 받고 툰드리아로 떠났던 카심은 펭족의 마을에 가서 아주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귁! 그대가 내 아들을 구해 준 은인인가! 귀익!”
키가 거의 2미터쯤은 될 것 같은 거대한 펭귄.
펭이의 아버지이자 펭족의 왕이 카심에게 물었다.
“예, 펭족의 왕이시여.”
카심이 고개를 조아렸다.
“이리 환대해 주시니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귁! 이곳에 머무는 동안 불편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게! 귁귁!”
카심은 펭이와 오랜 시간을 함께했기에, 펭족과 매우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덕분에 카심은 오토로부터 받은 명령을 매우 수월하게 완수해내었다.
“귁? 북부제국의 인간들이 우리 땅을 침공해 올 예정이란 말인가? 귁귁?”
“예, 펭족의 왕이시여.”
“귀익……!”
펭족의 왕은 카심의 발언을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귀익, 사실 얼마 전부터 심상치 않기는 했다네. 귁귁귁.”
“예……?”
“드루이드들이 그러더군. 북부제국과의 접경지대가 심상치 않다고.”
“드루이드라면…….”
카심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이곳 툰드리아는 다양한 이종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소수의 인간들 역시 이곳 툰드리아에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이종족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생명체들과 교감할 수 있다고 했다.
대륙인들은 그러한 툰드리아의 인간 원주민들을 가리켜 드루이드라 불렀다.
“최근 몇몇 드루이드들이 경고하긴 했네. 귁귁. 북부제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툰드리아의 여러 종족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그, 그랬습니까?”
“그렇다네. 귀익. 그런데 자네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더욱 경각심이 드는군. 귁귁.”
“저의 주군이신 오토 드 스쿠데리아 국왕 전하께서는 북부제국의 침공을 확신하고 계십니다.”
“귀익! 그럼 우리 툰드리아의 이종족들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지! 귁귁!”
“현명하신 판단이십니다.”
“귀익! 다만 툰드리아의 이종족들이라고 해서 다 친한 것만은 아니라네. 귁귁귁.”
“아.”
“그나마 드루이드들이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편이니, 자네가 한 번 그들을 만나 보는 건 어떻겠나. 귁귁귁.”
“알겠습니다!”
카심은 펭이의 아버지의 조언에 따라서, 툰드리아의 이종족들을 설득하기 위해 드루이드라는 이들을 한번 만나 보기로 했다.
“귁귁. 드루이드들은 현재 북부제국과의 접경지대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그쪽으로 가 보게나. 귁귁귁.”
“예, 펭족의 왕이시여.”
카심은 그 즉시 드루이드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북부제국과의 접경지대로 향했다.
물론 혼자 간 건 아니었다.
카심은 오토의 명령에 따라 마검사들과 함께 툰드리아로 왔고, 그들과 함께 움직이며 임무를 수행했으니까.
드루이드들을 만나러 가던 길.
휘이이이이이이이!
갑자기 세찬 눈보라가 휘몰아치기 시작하더니, 세상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것은 백시현상(白視現象)이라 불리는, 새하얀 눈보라로 인해 하늘과 땅이 온통 하얗게 물들어 공간감과 원근감이 사라지게 되는 자연현상이었다.
“귁! 멈춰야 한다! 지금 움직이면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귀익!”
“알겠어.”
카심은 펭이의 조언에 따라 발걸음을 멈추고, 마검사들에게 명령했다.
“정지! 지금부터 텐트를 펴고 대기한다! 움직이지 마라!”
“예! 카심 경!”
바로 그 순간.
- 이리 와…….
- 많이 춥지? 내가 따뜻하게 해줄게…….
- 내 품에 안겨…….
여성의 형상을 한 허여멀건 존재들이 나타나 카심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귀, 귀익!”
펭이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귀익! 큰일 났다! 설녀(雪女)들이 나타났다! 귁귁!”
“서, 설녀?!”
“툰드리아에 사는 악령들이다! 귁! 살아 있는 생명체 얼려 죽인다! 귁귁! 조심해야 한다! 귀익!”
“헉!”
놀란 카심은 즉시 검을 뽑아들었다.
“적이다! 현혹되지 말고 처단하라!”
“예! 카심 경!”
카심 일행은 설녀라 검에 퇴마(退魔)의 주문을 부여하고, 설녀들과 맞서 싸웠다.
전투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카심 일행은 평범한 기사들이 아닌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검사들이었기에, 악령인 설녀들과의 전투에서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
촤라락!
카심의 검이 마지막 남은 설녀를 두 동강 냈다.
“다들 고생했…… 헉?!”
카심은 무심코 주변을 돌아보았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 아무도 없어?!’
정신을 차려보니 혼자였다.
펭이도, 함께 툰드리아로 온 마검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백시현상일 뿐.
‘다들 어디 간 거지?’
카심은 정신을 집중해서 주변을 탐지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평범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설녀라는 악령들이 만들어 낸 공간왜곡 같은 건가?’
카심은 그렇게 판단을 내리고는, 일단 백시현상이 끝날 때까지 제자리에서 대기하기로 했다.
무턱대고 움직였다간 일행과 더욱 멀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 * *
한편, 오토는 툰드리아로 갔던 마검사들로부터 긴급한 보고를 받았다.
“전하!”
카미유가 오토에게 말했다.
“큰일 났습니다!”
“으응? 큰일?”
“카심 경이 작전 중 실종되었답니다!”
“또???”
오토는 어이가 없었다.
노르딕 산에서 산사태에 휘말렸던 게 불과 몇 달 전인데, 또다시 행방불명될 줄이야.
‘이거 찾으러 가야 돼?’
이쯤 되니 카심이 사라졌다고 해도 걱정이 1도 되지 않는 오토였지만, 그렇다고 유기(?)할 순 없는 노릇.
“이동 중에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는데,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답니다.”
“휴.”
오토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짐 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