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급하게 소집된 회의.
“북부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오토가 입을 열었다.
“……!”
“……!”
“……!”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하나같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단 표정이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는 북부제국의 전력이 자세히 알려진 상황이었다.
오토와 엘리제가 폐관수련을 하는 동안 북부제국의 사령부에 심어 놓은 간첩들이 정보를 보내 오면서, 그 어마어마한 전력의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인데, 이제는 북부제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토가 수차례 경고했던, 예언에 가까운 사건이 정말로 벌어진 것이다.
“북부제국의 제1차 원정군은 흑해를 건너 이곳 뉘르키르에 상륙할 예정입니다.”
오토가 지휘봉으로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뉘르키르는 대륙의 북쪽 끄트머리에 자리한 지역으로, 야만부족들이 어업활동을 벌이는 작은 어촌 마을에 불과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보면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기에 더없이 좋은 위치였기에, 북부제국군의 함대가 그곳으로 향하리라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뉘르키르에 상륙한 북부제국군은 주둔지를 편성하고, 가장 먼저 키이우 왕국을 침공할 예정입니다.”
오토가 케레스를 돌아보았다.
“케레스 형님.”
“응!”
“회의가 끝나는 즉시 저와 함께 키이우 왕국으로 갑니다.”
“알겠어!”
“형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키이우 왕국에서 북부제국군을 최대한 빨아들여 줘야 합니다.”
키이우 왕국은 북부제국군에 있어 무덤이나 다름없는 곳.
잘만 싸운다면 북부제국군에게 엄청난 손실을 입히는 것도 가능하기에, 사실상 이 전쟁의 핵심과도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카심 경.”
“예, 여기 있습니다.”
“곧 북부제국군이 툰드리아도 침공할 겁니다. 이미 이종족들의 동맹을 이끌어내셨으니까, 방어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북부제국군의 침공을 저지한 뒤 전열을 가다듬고 역습을 펼치세요. 후방을 흔들어주시는 겁니다.”
“맡겨만 주십시오!”
“귁! 귁귁귁!”
카심과 펭이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그나르 님.”
“말하라.”
야만부족의 왕 라그나르가 대답했다.
“전사들을 이끌고 북부제국군의 상륙에 맞춰 퇴각하는 척 연기해 주십시오.”
“크흠!”
라그나르는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불편함 가득한 헛기침을 내뱉었다.
야만부족인 라그나르로서는 적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게 내키지 않는, 치욕스러운 행위 정도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런 치욕을 감당하라니? 대륙인들은 겁쟁이인가?”
“그게 아니라…….”
“그간 모든 준비를 끝마쳤으면 북부제국 놈들을 쳐부ㅅ…….”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시죠? 왜 그렇게 말이 많으신 거죠? 오라버니?”
그때, 갑옷을 입은 올리브가 나타나 라그나르에게 핀잔을 주었다.
“오, 올리브나? 다시 갑옷을……?”
“전하의 명령이 마음에 안 든다는 건 아니시겠죠?”
올리브가 은근슬쩍 주먹을 움켜쥐었다.
움찔!
그러자 라그나르는 언제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느냐는 듯 흠칫 놀랐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혹한의 자손들이…….”
“옛날 생각 좀 나게 해드려요?”
올리브의 그 말에 라그나르가 입을 꽉 다물었다.
그들의 어린 시절.
라그나르는 늘 올리브에게 두들겨 맞는 게 일상이었고, 야만부족의 왕이 된다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다.
만약 올리브가 야만부족에 질려 대륙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라그나르는 결코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터였다.
그래서 라그나르의 내면에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여동생 올리브에 대한 공포가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제가 최근 몇 개월 동안 단련을 좀 했는데, 예전 무력을 되찾았을지 한번 볼까요?”
“…….”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세요. 아시겠죠.”
라그나르가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끄덕였다.
‘시녀장님 나이스샷!’
오토는 슬쩍 올리브를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이고는 다시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는 이후로도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오토는 막힘없이, 그야말로 청산유수와 같이 명령을 내렸다.
‘불패의 지휘관이라더니.’
‘과연.’
‘이 전쟁은 질 수 없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오토가 총사령관으로서 보여 주는 능력에 고개를 끄덕이며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만큼 오토가 내리는 명령들에 뛰어난 전략·전술이 담겨 있었기에 믿음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토가 모두를 돌아보며 당부했다.
“아무도 죽지 마세요. 이게 제 마지막 명령입니다.”
그건 간절한 바람이었다.
오토는 누구도 잃고 싶지 않았으므로.
* * *
해군기지를 떠나 흑해를 건너는 북부제국의 제1차 원정군의 위용은 그야말로 대단했다.
마정석으로 만든 마공학 엔진을 탑재한 강철 군함들과 수송선들.
그 대규모 함대가 검은 바다를 가르며 이동하는 것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치이이이익!
함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허연 증기 역시도 그런 북부제국군의 함대를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게끔 했다.
그런 북부제국군 함대의 정중앙.
북부제국의 황제 바실리는 대장선이자 기함에 탑승한 채 멀리 보이는 대륙을 바라보았다.
“적들의 방어 병력은 얼마나 되나.”
“없다시피 합니다, 폐하.”
“그렇군.”
바실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효사거리가 되나?”
“예, 폐하.”
“쏴라.”
바실리는 망설임 없이 사격을 명령했다.
“함포를 방열하라!”
“방열하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함대의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군함들이 일제히 함포를 방열했다.
우웅!
함포들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더니, 이윽고 불을 뿜기 시작했다.
펑펑! 펑펑펑! 펑! 펑펑펑! 펑! 펑! 펑펑펑! 펑! 펑펑! 펑펑! 펑!
작은 어촌 마을인 뉘르키르에 포탄 세례가 퍼부어졌다.
자욱한 흙먼지와 포연이 흩어지고 초토화된 뉘르키르의 모습이 드러났다.
멀쩡한 건물은 아무것도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 또한 보이지 않았다.
대륙의 것에 비해 몇 배는 더 강력한 북부제국의 함포는, 그렇게 첫 번째 점령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좋군.”
바실리는 망원경을 통해 잿더미가 된 뉘르키르를 살펴보고는,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병력을 상륙시켜라.”
“예, 폐하.”
바실리의 명령에 북부제국군은 지상군을 상륙시킨 뒤 주둔지를 편성했다.
바실리는 주둔지가 편성될 때까지 기함 안에서 느긋하게 와인을 즐기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비로소 대륙 땅을 밟았다.
“황제 폐하 납시오―!”
척!
바실리의 상륙에 좌우로 도열해 있던 북부제국군 장병들이 일제히 차렷 자세를 취했다.
“황제 폐하께 경례!”
“충! 성!”
바실리는 그런 북부제국군 장병들의 마중을 받으며 언 땅에 입을 맞추며 정복자로서의 야욕을 드러내었다.
“대륙이여. 우리 민족이 왔노라.”
대륙 땅을 밟은 바실리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대륙 정벌은 북부제국의 오랜 숙원.
이번 원정은 선조들의 실패를 설욕할 절호의 기회.
게다가 군사력으로도 이미 대륙을 압도하는 상황이었으니, 사실상 이번 정복전쟁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야만부족들부터 차근차근 쓸어버리고, 과거 식인황제 카이로스가 쌓은 대장벽을 무너뜨릴 일만 남은 것이다.
“북부대공, 야만부족들의 왕, 그리고 키이우의 왕에게 사신을 보내라. 항복하면 그에 따른 보상이 있을 것이라고.”
“예, 폐하.”
바실리는 그렇게 명령을 내리고는, 황제를 위해 마련된 막사로 향했다.
며칠 뒤.
당연한 반응이겠지만, 지안카를로와 라그나르와 크바르는 바실리의 항복 권유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일방적으로 침공해온 주제에 항복을 권유한다는 건 사실상 협박이나 다름없는 것.
게다가 이미 오래전부터 전쟁을 준비해 오고 있었던 그들이 바실리의 항복 권유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어리석군.”
바실리는 외교관들이 시체가 되어 돌아온 걸 보고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바실리는 외교관들을 죽인 지안카를로, 라그나르, 그리고 크바르가 고마웠다.
바실리는 이번 사건을 문제 삼아 침공의 명분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지금 즉시 기동군단을 이끌고 키이우 왕국을 공격하라.”
“예, 폐하.”
그렇게 북부제국의 본격적인 침공이 시작되었다.
* * *
한편, 오토는 회의가 끝난 직후 케레스와 함께 즉시 키이우 왕국으로 향했다.
오토는 와이번을 타고 가거나 말을 타고 이동하지 않았다.
“이쪽으로.”
오토는 키이우 왕국으로 갈 사람들을 불러 모은 뒤 정신을 집중했다.
다음 순간.
번쩍!
오토 일행의 눈앞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이, 이건.”
카미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앞에 광활한 곡창지대가 펼쳐져 있었다.
비록 지금은 겨울이기에 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곳곳에 방어용 진지가 설치되어 있고,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걸 보면 키이우 왕국의 <베즈도리자 평야>가 분명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카미유가 홱! 오토를 돌아보았다.
“공간 도약 처음 해 봐?”
오토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고, 공간 도약……?”
“응.”
“맙소사.”
카미유는 너무나도 놀라서,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공간 도약 마법은 이 세계에서 이미 오래전에 실전되었다고 알려진 권능이었다.
오죽했으면 검과 마법의 명가인 쿤타치 가문에서도 공간 도약 마법을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까.
하지만 오토는 달랐다.
오토는 엘리제와의 폐관수련을 진행할 당시 마법 수련에도 매진했고, 그 결과 어릿광대의 재간 권능을 통해 공간 도약 마법마저 깨우친 상태였다.
비록 재사용 대기시간이 길고 이런저런 제약이 따르기는 했지만, 조건만 맞는다면 수천 킬로미터를 단숨에 도약할 수 있을 정도로 권능을 개발해냈던 것이다.
“뭘 이 정도 가지고 놀라?”
오토가 익살스레 말했지만, 카미유를 포함한 일행은 누구도 웃을 수가 없었다.
공간 도약 마법을 사용했다는 것은, 마법에 대한 오토의 경지가 대마법사 이상으로 발전했다는 뜻이었으므로.
“놀라는 건 나중에.”
오토는 그렇게 말하고는 즉시 발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까.”
갑옷을 입은 크바르와 키이우 왕국의 기사들이 오토 일행을 반겼다.
“오래간만입니다! 전하!”
그 와중에 애국노 로셴 백작 역시도 갑옷을 입고 지키고 있었다.
과연 오토의 예상대로, 로셴 백작은 도망치지 않고 기꺼이 전쟁에 참전했던 것이다.
“준비합시다. 곧 북부제국군이 들이닥칠 테니까.”
“예, 전하.”
이곳 베즈도리자 평야는 키이우 왕국과 북부제국군의 최대 격전지가 될 전장.
이곳을 지켜내느냐 마느냐에 따라서 전쟁의 판도가 180도 뒤바뀔 터였다.
오토는 베즈도리자 평야에 자리한 키이우 왕국군 진영에서 며칠을 머무르며, 북부제국군의 오기를 기다렸다.
“전하!”
와이번을 타고 정찰에 나섰던 마검사가 황급히 사령부로 뛰어 들어와 오토에게 보고했다.
“북부제국군이 진격해 오고 있습니다!”
“거리는?”
“한나절이면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알겠습니다.”
오토는 즉시 전투준비태세를 발령하는 한편 크바르와 함께 최전선에 자리한 성채로 이동했다.
쿵! 쿵! 쿵! 쿵!
척! 척! 척! 척!
이윽고 북부제국군의 대규모 병력이 베즈도리자 평야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 맙소사!”
“저런 대규모 병력이라니…….”
“빌어먹을!”
키이우 왕국군 장병들은 다가오는 북부제국군의 규모와 위용에 그만 기가 질려 버리고 말았다.
거의 30만 명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대군(大軍)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키이우 왕국군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
“모, 못 이겨!”
“히익?!”
개중에는 겁을 집어먹고 제자리에 주저앉거나, 아예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려는 자들도 있었다.
규모에서 오는 위압감과 압박감,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역병처럼 키이우 왕국군에 퍼져 나갔다.
‘두렵겠지.’
오토는 그런 키이우 왕국군 장병들을 탓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아무리 용기를 낸다 한들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건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는 것.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용기 있는 자가 칭송받을 리도 없을 터였다.
스윽.
오토가 나섰다.
“두려워 마라.”
오토의 나지막한 음성이 베즈도리자 평야로 퍼져 나가며 키이우 왕국군 장병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