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6화
연합군 수뇌부들은 이번만큼은 오토의 의견에 수긍할 수 없었다.
철수 혹은 후퇴?
상식적으로 수긍하기 힘든 결정이었다.
지금 북부제국군은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는 중이었다.
비전투손실이 엄청나게 일어나 전체 병력의 3분의 1은 제대로 싸울 수도 없는 상태일 게 분명했다.
그런데 왜 여기서 후퇴를 가정한 철수 명령을 내린단 말인가?
“그런 판단을 내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엘리제가 오토에게 물었다.
“총사령관 각하께서 그런 판단을 내리셨다면, 그에 따른 근거가 확실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엘리제는 지휘부 회의에서만큼은 오토에게 깍듯이 존대를 써 주었다.
오토의 직위가 총사령관이니만큼, 그에 따른 대우를 확실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있지.”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진짜 적은 북부제국군 장병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금부터 설명에 들어가겠습니다. 우리 정보국이 북부제국의 수뇌부들을 심문하고 입수한 기밀문서에 따르면.”
오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을 향해 다가가더니, 분필을 들고 설명에 나섰다.
“100년 전. 북부제국에 의문의 비행체가 추락했습니다. 그리고 그 의문의 비행체에는 우리가 사는 이 세계보다 몇천 년은 앞선 기술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북부제국은 그 의문의 비행체에 담겨 있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기술의 혁신을 이루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개발한 전략 병기가 우리가 상대했던 트리톤입니다.”
오토는 북부제국의 앞선 기술력의 비밀에 대해 설명해 주고는, 어째서 후퇴를 준비하는지도 이야기해주었다.
“북부제국의 황제 바실리에게는 그 의문의 비행체 안에 잠들어 있던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있습니다.”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라면…….”
“외계 종족인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들의 강함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오토가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결코 보여 주기식 엄살 같은 게 아니었다.
그 외계 종족들이 얼마나 강한지를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개개인의 전투력이 트리톤 10기 이상을 합친 것보다 강력했고, 우두머리격인 마신은 본래 시나리오에서 엘리제와 양패구상을 이룰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그걸 아는 오토로서는 때려 죽여도 북부제국군 진영으로 쳐들어갈 수가 없었다.
“지금 북부제국군 지휘부는 우리가 공격해 오길 기다리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오토가 지도를 가리켰다.
“……그래서 우리의 마지막 전투는 공격이 아닌 방어가 되어야 합니다.”
오토가 지도의 특정 지점을 가리켰다.
“아!”
“결국 제자리인가.”
“저곳은……!”
연합군 수뇌부들은 오토가 가리킨 지점을 보고 탄식했다.
북부 대장벽.
과거 카이로스가 야만부족과 북부제국의 침공을 대비해서 쌓은 그 위대한 장벽이 오토가 생각하는 최후의 전장이었던 것이다.
“곧 북부제국군이 자기 진영을 박차고 나오면, 트리톤들을 앞세워 아군의 안전한 후퇴를 도모할 겁니다. 그리고 대장벽 앞에서 적들과 맞서 싸울 겁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전투입니다.”
그런 오토의 말에 연합군 수뇌부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철수와 후퇴 명령에 수긍했다.
오토가 수집한 정보―사실 그런 적은 없었지만―를 믿지 않고 무턱대고 공격해 들어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이런 유리한 환경에서조차 철수와 후퇴를 결정했다면, 북부제국이 가진 비장의 카드가 그만큼 강력하다는 뜻일 게 분명했다.
“그럼, 언제든 철수하고 후퇴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세요.”
“예, 총사령관 각하.”
그렇게 마지막 전략 회의가 끝났다.
“전투준비태세를 갖추고 철수를 준비하라!”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하라!”
연합군은 오토의 명령에 따라 철수 작업에 나서고, 후퇴할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는 한편 북부 대장벽 위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대포가 설치되고, 수천여 개의 게이볼그가 준비되었다.
최후의 공성전을 위한 대비가 시작된 것이다.
그에 발맞춰 키이우 왕국군 역시도 자국 영토를 떠나 아라드 제국의 영토로 향했다.
최후의 전투에 참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 * *
전략회의를 마친 오토는 굳은 표정으로 저 멀리 북부제국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걱정되십니까.”
카미유가 오토에게 물었다.
“당연히.”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북부제국의 최후의 발악은 절대 만만하지 않을 거야. 그 정체불명의 외계 종족이 얼마나 강할지 짐작조차 안 되는 상황이니까.”
게임 영지 전쟁을 통해 경험한 것과 현실이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것을 알기에, 오토는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북부제국이 가진 패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력하거나, 혹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변수라도 발생한다면…….
오싹!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잘 극복하실 겁니다.”
카미유가 오토에게 용기를 주었다.
“지금껏 잘해 오시지 않으셨습니까. 준비도 철저히 하셨고.”
“그랬지.”
“공들인 만큼 좋은 결과가 있을 겁니다.”
“제발.”
오토가 표정에 간절함, 어떻게 보면 절박함마저 떠올랐다.
본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엘리제는 곧 있을 최후의 전투에서 전사할 예정이었다.
어쩌면 마신과 공멸(共滅)하는 것이 이 세계로부터 부여받은 그녀의 숙명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오토로서는 절박할 수밖에.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자는 심정으로 신중하게 행동하지 않았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었다.
“전쟁이 끝나면 뭐 하실 겁니까?”
카미유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오토에게 물었다.
“나야 뭐…… 엘리제랑 결혼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거 말고는 더 있나.”
“좋은 계획이십니다.”
카미유가 미소를 지었다.
애초에 오토의 성격상 대륙을 통일하겠다느니 하는 거창한 꿈이나 야망을 말할 리도 없었고.
“맘 같아선 어디 조용한 시골에 가서 영주 노릇이나 하고 싶네.”
“시골 영지의 영주 말씀이십니까?”
“지금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큭.”
카미유가 피식 웃었다.
오토의 시골 영주 시절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문득 지금과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럼 저는 시골 영지의 영주님을 모시는 기사 하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오토도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니 썩 괜찮은 계획 같기도 했다.
오토는 지난 몇 년 동안 산전수전공중전을 다 겪었고, 권력의 정점을 찍어보기도 했고, 무력 또한 갈고 닦을 만큼 갈고 닦은 상태.
이미 이룰 것은 다 이룬 상태였기에, 여기서 은퇴하고 귀농한다고 해도 딱히 이상할 건 없었다.
“어디 일 떠넘길 사람 없나?”
“예?”
“이미 이오타 왕국은 강대국이잖아. 내가 어떻게 자리를 비우겠냐고.”
“그건 그렇습니다.”
“적당한 놈 있으면 왕위를 물려줘 버리거나, 섭정으로라도 임명해서 부려먹을 텐데. 쩝.”
“전쟁이 끝나면 천천히 찾아보십시오. 어디 산 좋고 물 좋은 곳 하나쯤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겠다.”
오토가 히죽 웃었다.
“내 꿈이 엘리제랑 같이 나태하게 사는 거거든.”
“대륙 통일 같은 것보다는 훨씬 괜찮은 꿈 같습니다.”
그렇게 오토는 카미유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긴장을 풀었다.
최후의 전투를 앞둔 상황.
이런 시간이라도 있어야 스트레스를 덜 받을 테니까.
* * *
피를 토하고 쓰러졌던 바실리는 며칠 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스트레스를 받다 못해 뇌혈관이 터져버리는 바람에 그만 뇌출혈이 오고 말았고, 그 덕분에 혼수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하지만 북부제국군 군의관들의 치료에 힘입어, 바실리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깨어난 바실리는 이전과는 달라져 있었다.
안면 근육은 마비되었고, 입은 삐뚤어졌으며, 말은 어눌했고,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도 불편해지고 말았다.
뇌출혈의 후유증으로 인해 불편한 몸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문제는 그 후로도 계속해서 안 좋은 보고가 끝도 없이 올라왔다는 것.
“폐, 폐하! 해군기지가 적들에 의해 함락되었다고 하옵니다!”
“툰드리아 이종족들이 수도 50킬로미터 근처까지 진격해 왔다는 보고입니다!”
“해군기지를 점령한 적들이 본국의 훈련소와 군수공장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며 수도를 향해 진격하고 있다고 하옵니다! 폐하!”
그뿐만이 아니었다.
“폐하! 곧 보급이 끊길 예정이옵니다! 식량이 떨어져 가고 있사옵니다!”
야만부족의 영토에 자리 잡은 30만 북부제국군은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는 중이었다.
그 와중에 연합군이 쉴 새 없이 포격을 가해 오니, 장병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상황이었다.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 이 개 같은 놈…….”
바실리는 오토에 대한 증오를 불태웠다.
“볼코프 대공.”
“예, 폐하.”
“‘그들’을 소환해야겠다.”
“폐, 폐하!”
“이대로라면 본국의 패망은 기정사실이고…….”
바실리가 어눌한 말투로 으르렁거렸다.
“짐의 목숨조차 부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오나…….”
“지금으로서는 ‘그들’을 소환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시옵소서.”
결국, 바실리는 자신이 가진 최후의 패를 꺼내 들기로 결심했다.
이 최악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오직 ‘그들’을 소환하는 것밖엔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
“예, 폐하.”
바실리는 커다란 막사 안으로 들어가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빼 들었다.
100년 전.
북부제국의 최정예 기사들은 정체불명의 비행체 안에 있던 다른 세계의 존재들을 한 자루 검에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검은 오직 북부제국의 황제만이 소유할 수 있는 성물이 되었고, 대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그리고 오늘.
바실리가 검에 깃들어 있는 미지의 존재들을 불러내려 하고 있었다.
스으으으으……!
검이 시커먼 기류를 뿜어내며 바닥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내었다.
이윽고 검은 기류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바실리가 있는 막사를 빠져나가 북부제국군 진영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기류들은 각자 북부제국군에 소속되어 있는 가장 강력한 기사들과 트리톤들에 스며들었다.
“컥!”
“이, 이게 무슨! 크윽!”
“으아아악!”
검은 기류들은 북부제국군에 속한 기사들의 코와 입, 그리고 귀를 파고들어 그들을 육체를 장악해 나갔다.
그런 검은 기류들 중 가장 강력해 보이는 것은 북부제국의 최강자인 볼코프 대공에게로 향했다.
“크윽…… 크으으으으으윽……!!!”
볼코프 대공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검은 기류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직 조국을 위해서.
이 미지의 존재들이 진정한 힘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릇’의 역량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에, 볼코프 대공은 기꺼이 스스로를 희생했던 것이다.
이윽고 볼코프 대공을 비롯한 북부제국군 최고의 기사들에게 빙의된 미지의 존재들이 바실리의 앞에 섰다.
그중 볼코프 대공에게 빙의된 존재가 바실리에게 말했다.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단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라는 것과, 북부제국에 추락했던 정체불명의 비행체 안에 있던 미지의 존재들의 우두머리라는 게 전부였다.
“다른 세계의 황제여.”
‘그’가 바실리에게 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인가.”
“나는…….”
바실리가 대답했다.
“저 연합군의 패망과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비참한 죽음을 원한다.”
“그대의 염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가 바실리에게 약속했다.
“……좋군.”
바실리가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