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3화
황제는 오토가 트리톤을 바칠 것을 약속하자 크게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트리톤은 아라드 제국에게는 어마어마한 위협이었다.
만약 연합군이 5,000기가 넘는 트리톤을 앞세워 수도로 진격해온다면, 황제로서는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었다.
황제가 오토와 연합군을 경계하고, 견제하려 든 이유 또한 트리톤 때문이 아니던가?
그런데 오토가 먼저 트리톤을 바치겠다고 이렇듯 밀서를 보내왔으니, 황제의 입이 귀에 걸리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오토가 보낸 밀서에는 트리톤을 바침은 물론 그 설계도와 북부제국의 기술, 거기에 더해 게이볼그의 제작 방법까지 알려 줄 것이란 내용마저 적혀 있었다.
또한, 혹시나 모를 위협이 사라지는 대로 연합군을 해체해 불필요한 군사적 긴장감을 없애겠다고 했다.
즉, 사실상 무장해제를 선언한 것이다.
“으음. 과연 영웅이로다.”
황제가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오토 드 스쿠데리아가 야심이 있었다면 북부제국의 침공을 저지하는 데 솔선수범했을 리 없겠지.”
황제가 생각하기에도, 오토의 행적은 야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만약 오토가 야심이 있었다면 북부제국의 침공을 내버려둔 채 아라드 제국이 휘청이기를 기다렸을 것이고, 그때를 틈타 전쟁에 뛰어들어 어부지리를 노리는 게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오토는 북부대공의 손녀사위로서, 한 집안 사람이었다.
잘츠부르크 가문이 아라드 제국에 충성하는데, 사위인 오토가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야욕을 드러낼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렇듯 무장해제를 선언했을 테고.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공작의 작위를 하사해야겠군. 그래야 섭섭해하지 않을 터이니.’
본래 아라드 제국은 작위를 수여하는 것에 매우 인색하기로 유명했다.
제국의 백작만 되어도 어지간한 강대국조차 찍소리도 못할 만큼 어마어마한 권세를 휘두르기 마련이라, 함부로 작위를 남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오토는 예외였다.
북부제국의 침공을 막아낸 공로만 해도 최소한 백작 이상의 지위를 받을 자격이 있었고, 이번 밀서를 통해 그 공로는 더욱 높아진 셈이었다.
게다가 오토는 이오타 왕국이라는 신흥강국의 왕이었기에, 보수적인 아라드 제국의 중앙귀족들조차 작위 수여를 반대하지 않을 터였다.
‘이럼 짐이 형제들을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참으로 다행이로다.’
사실 황제도 내심 로웨나, 테르테미안, 파라곤을 신경 쓰고는 있었다.
다만 선황의 유언도 있고, 황족들이 얼마 남지 않은지라 숙청 대신 형제간의 우애를 추구했을 뿐.
그런데 트리톤을 확보하게 된다면 황제로서는 로웨나, 테르테미안, 파라곤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황제가 그 많은 트리톤을 보유하고 있는데, 형제들이 어딜 감히 반란을 꿈꾸겠는가?
즉, 오토의 이번 밀서는 황제에게 있어 앓던 이들을 시원하게 빼 준 격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황제가 오토를 기특해할 수밖에.
(중략)
바라옵건대 이번 밀서의 내용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시옵소서.
만일 이 사실이 새어나간다면, 주변국들이 폐하의 군대가 더욱 강해지는 것이 두려워 기습적으로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르옵니다.
물론 폐하의 군대가 그들을 응징할 것이오나, 힘없는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을까 두렵사옵니다.
(중략)
“허허.”
황제는 오토가 아라드 제국의 백성들까지 걱정해 주는 걸 보고 감탄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참으로 성군이로다. 이오타의 미래가 밝구나.”
황제가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밀서를 벽난로에 밀어 넣었다.
그렇게 오토가 보낸 밀서는 한 줌 재가 되어 흩어져 버렸고, 황제의 마음속에 싹텄던 의심의 싹은 말끔하게 사라져 버렸다.
단 한 장의 밀서가 대륙 최고 권력자의 마음을 들었다 놓은 것이다.
* * *
케레스와 로웨나의 결혼식은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르게 이루어졌다.
물론 잘츠부르크 가문과 황가의 결합이니만큼, 결혼식의 규모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결혼식은 이 세상에서 가장 성대하고, 호화스럽고, 사치스럽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세계 각국에서 최소 백작 이상의 하객들이 참석했고, 아라드 제국의 수도에 사는 백성들이 종일 꽃을 뿌렸으며, 황제가 직접 주례를 서기까지 했다.
물론 결혼 당사자인 케레스와 로웨나는 서로에게 전혀 마음이 없었고, 소 닭 보듯 하며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지만.
한편, 당연히 결혼식에 참석한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심기는 매우 불편했다.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입니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속은 타들어가는 듯했다.
본래 오토와 손잡고 형제들을 쳐부수고, 나아가 반란을 일으켜 황위에 오르려던 게 그들의 본래 계획.
그런데 오토가 지나치게 커 버린 게 문제였다.
이대로 오토와 손을 잡자니 뒤통수가 간질거려서 도무지 본래 계획을 밀어붙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황제를 움직여 오토를 제거한 뒤 삼파전을 벌이기도 애매했다.
“형님 폐하, 오토 드 스쿠데리아와 연합군을 이대로 놔두실 겁니까?”
“폐하, 저들을 견제하셔야 합니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황제를 충동질해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어허.”
황제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너희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겠지만, 그건 쓸데없는 걱정이다. 때가 되면 어련히 연합군을 해체하지 않겠느냐. 잠자코 기다려 보도록 하겠다.”
황제가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말하니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으로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빌어먹을. 일이 뭔가 꼬이는군.’
‘이러다가 누님이 오토 드 스쿠데리아와 진짜로 붙어먹고 우릴 쓸어버리는 건 아닐까?’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으로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눈알을 데록데록 굴리고는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조차 오지 않았다.
오토를 제거하자고 밀어붙이자니 황제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고, 그렇다고 기존 계획대로 오토와 손을 잡자니 뒤통수가 간지럽고, 가만히 있자니 혹시나 오토가 로웨나와 진짜로 붙어먹지는 않을까 두렵고.
‘이, 이러다가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게 밉보이기라도 하면?’
‘지금은 누구와도 적대하면 안 된다.’
결국,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오토를 뒤통수치려던 걸 포기했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아차! 싶은 순간에 파멸해 버릴 수도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간 잘 있었소? 껄껄껄!”
“정말 수고가 많으셨구려!”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앞다퉈 오토에게 다가가 친근함을 표시했다.
“아, 대공 전하들이 아니십니까.”
오토가 그런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오토는 그들의 속내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속이 타겠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로웨나와 함께 셋이 힘을 합쳐 나부터 제거할까 고민했겠지만, 정작 황제는 심드렁하고. 쯧쯧.’
이미 밀서를 통해 황제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기에, 오토는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의 입장이 난처해졌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절대 티를 내지는 않았다.
‘네놈들은 결국 내 손바닥 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지.’
오토는 속으로 냉랭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척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대했다.
그날 밤.
오토는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차례대로 만나 그들과 밀담을 속삭였다.
오토는 자신이 시한부 인생이며, 남은 시간이 얼마 없고, 마지막으로 그들을 황위에 올려놓겠다고 말했다.
결국, 로웨나에게 썼던 방법 그대로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을 속여 넘긴 것이다.
“그, 그랬소이까? 허어! 이를 어찌하면 좋소! 크흑!”
“아니 되오! 오토 국왕! 어찌 벌써 떠나려 하시오? 흑흑흑!”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오토가 시한부 인생이란 말을 듣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겉으로는 그를 걱정해 주는 척 거짓 눈물까지 보였다.
그들 입장에서, 오토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혹여 오토가 야망 때문에 그들을 토사구팽할지도 모른단 걱정이 싹 사라졌으니, 기존에 가졌던 경계심마저 누그러졌던 것이다.
“곧 때가 올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만 움직여주세요.”
그렇게 테르테미안과 파라곤은 또 다시 오토가 쳐 놓은 덫에 걸려들고야 말았다.
“알겠소. 내 기다리리다.”
“그대만 믿겠소.”
경계심 때문에 오토를 뒤통수치려 했으나, 결국 제자리걸음을 했을 뿐이었던 것이다.
* * *
“후우.”
숙소로 돌아온 오토는 그제야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 숨을 내쉬었다.
‘다 됐어.’
오늘로써 모든 사전작업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장기말들을 움직이기만 하면 돼.’
정말이지 홀가분했다.
막판에 황제, 로웨나, 테르테미안, 그리고 파라곤의 경계심 때문에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갔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로, 황가를 갈아치우는 것으로 방향성을 바꾸니 일이 너무나도 순조로웠던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던 것처럼…….
‘어쩌면 내가 운명을 거스르고 있던 건 아닐까?’
오죽했으면.
처음부터 생존이나 대의가 아닌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패왕의 길을 걸었다면, 이렇게까지 머리 아프고 고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정말 그랬다면 결과가 많이 달랐을 테고,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도 많이 달라졌을 테지만.
“……왔나.”
인기척을 느낀 엘리제가 슬며시 눈을 떴다.
“깼어?”
“아니다.”
엘리제는 졸린 기색이 역력하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오토를 반겼다.
“언제 돌아올지 기다리고 있었다.”
“아, 이야기가 길어져서. 늦어서 미안해.”
“얼른 와라.”
“응.”
오토는 대충 옷을 벗어 던지고 잠옷으로 갈아입고는, 엘리제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엘리제의 품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오토의 품 역시 엘리제에게는 더없이 안락하고 편안했다.
* * *
장기말들을 옮기기 전에 해야 할 마지막 일이 있었다.
‘절대권능을 완성해야 돼.’
마지막으로 오토가 해야 할 일은, 초월 등급의 성물인 절대권능의 완성이었다.
로웨나의 피로 만든 혈석(血石)인 <시산혈해>.
해적영주가 가진 푸른 사파이어인 <태풍의 핵>.
지저세계의 군주가 가진 성물인 <천지개벽>.
그리고 북부제국의 황제가 가진 자수정인 <강철심장>.
보석 형태로 된 이 4개의 성물을 조합하면, 초월 등급의 성물인 절대군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절대군림의 능력은…….
‘장기말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세력들의 군주들도 함께 움직일 거다. 그들을 제압하려면 절대군림이 필요해.’
절대군림의 효과는 모든 성물들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력.
소유자는 모든 성물들의 주인으로 인정받게 되고, 그걸 제어할 권한을 획득한다.
그렇다는 말은, 절대군림의 소유자가 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다는 말이나 다름없단 뜻이었다.
100인의 군주들이 가진 성물들을 무력화시키고, 심지어 그 권능을 빼앗아 사용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현재 오토는 절대군림의 다섯 가지 재료 중에서 세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우선 북부제국의 황제 바실리가 가진 두 개의 성물 중 하나인 강철심장.
오토는 기술력의 발전 속도를 높여 주는 강철심장을 바실리로부터 빼앗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오타 왕국의 해군참모총장인 드레이크가 태풍의 핵을 지니고 있었고, 아라드 제국 황제의 왕관인 군림의 보관도 미리 복제해서 바꿔치기를 끝마친 상태.
때문에, 오토는 로웨나의 피와 지저세계의 군구가 가진 성물인 천지개벽만 얻으면 절대군림을 완성하는 게 가능했다.
‘로웨나의 피는 마지막 재료야. 일단 천지개벽부터 얻으면 돼.’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저세계의 군주로부터 천지개벽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절대군림을 사실상 완성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카미유.”
“예, 여기 있습니다.”
오토의 부름에 카미유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짐 싸.”
“알겠습니다.”
“얼레?”
오토가 군말 없이 짐을 싸는 카미유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웬일로 고분고분하대?”
“예?”
“어디 가느냐는 둥 귀찮게 왜 자꾸 끌고 다니냐는 둥 불평불만 안 해?”
“언제는 불평불만 한다고 안 데려가신 적 있습니까?”
“없지. 헤헤헤.”
“근데 왜 놀라고 그러십니까?”
“너무 고분고분하니까 그렇지. 조카 태어난 지 얼마나 됐다고.”
“한동안 집에 있었으니까 이번엔 괜찮습니다.”
“그래?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내가 부려먹는 바람에 애 크는 것도 못 봤다고?”
“그럴 일 없습니다.”
카미유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번이 전하와 함께하는 마지막 모험이 될 것 같단 느낌이 듭니다.’
이별을 예감한 게 아니었다.
이번 여정은 대업을 이루기 위한 최후의 사전작업.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고 나면, 지난 몇 년과 같이 모험을 떠날 일은 없으리라.
왜?
세계에 평화가 찾아오면, 오토나 카미유나 새로운 왕조를 경영하느라 책상머리 앞에 앉아 있어야 할 테니까.
즉, 오토를 따라 짐을 싸는 것도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