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6화
오토는 알렉스 국왕이 따라준 와인을 한 모금 마시고는, 느긋하게 옥좌에 몸을 묻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싸구려네.”
“…….”
“입맛만 버렸어.”
오토가 보란 듯 와인을 알렉스 국왕의 머리 위에 따라 버렸다.
주르르르륵…….
피처럼 붉은 와인이 알렉스 국왕의 정수리에 떨어져 그의 이마를 타고 얼굴까지 흘러내렸다.
움찔!
알렉스 국왕은 그런 오토의 폭거에 몸을 떨었다.
왕족인 그가 평민들조차 경험하기 힘든 굴욕을 당했으니,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내, 내가 이런 치욕을…… 크윽!’
알렉스 국왕은 안간힘을 다해 분노를 억눌러야만 했다.
까딱 성질을 부렸다간 이대로 마칸 왕국이 멸망하는 건 시간문제에 불과했다.
애초에 오토, 카미유, 그리고 이오타 왕국의 마검사들 정도면 이곳 마칸 왕궁 한복판에서 학살을 벌이는 건 일도 아닐 테지만.
“어쭈.”
오토가 그런 알렉스 국왕의 속내를 훤히 들여다보고는 말했다.
“표정 봐라?”
“예……?”
“꼴에 열은 받나 보지?”
“아, 아닙니다.”
“맞는 거 같은데?”
“절대 아닙니다.”
알렉스 국왕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래? 정말 기분 안 나빠?”
“예, 전하.”
“애쓴다, 애써.”
“…….”
“살고는 싶은가 보네.”
“하하…… 하하하하…….”
오토의 조롱에도 알렉스 국왕은 그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살고는 싶은 모양이지.’
그런 알렉스 국왕을 바라보는 오토의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알렉스 국왕이 저지른 짓은 결코 가볍게 넘길 만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자국민 학살과 같이 천인공노할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도 그의 행동은 결코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는 아가르타를 이용해 주변국들의 도시를 공격하게 만들었고,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그건 매우 비열한 행동이었다.
알렉스 국왕은 민간인들이 많이 밀집해 있는 곳을 공격했다.
왜?
그래야 주변국들의 군대가 이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그쪽으로 움직일 테니까.
그러는 사이 마칸 왕국군은 주변국들의 병력이 움직이는 틈을 타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해왔고.
물론 국익을 위해서 한 행동일 테지만, 그래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
마칸 왕국과 아가르타의 동맹으로 인해 죽어 나간 민간인들의 숫자가 벌써 수만 명은 가뿐히 넘을 테니, 알렉스 국왕이 죽어 마땅한 전범이라는 것은 부정하기 힘든 사실이었다.
“어떻게 할래.”
“예?”
“이 일, 어떻게 수습할 거냐고.”
“…….”
“알지? 내가 입만 뻥끗하면 네놈은 물론 이 코딱지만 한 나라도 쑥대밭이 될 거라는 거.”
이쯤 되면 누가 악당이고 누가 불쌍한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갈 지경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강대국의 왕이 약소국의 왕을 상대로 갑질과 횡포를 부린다고 오해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알렉스 국왕이 절박한 표정으로 오토에게 물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시키는 건 뭐든 하겠습니다.”
“그래?”
“여부가 있겠습니까?”
“내 놔.”
오토가 알렉스 국왕에게 손을 내밀었다.
“예? 뭘 내놓으시라는 건지…….”
“대지의 군화 내놓으라고.”
“……!”
“싫어?”
알렉스 국왕은 오토의 말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대지의 군화는 마칸 왕국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성물이었다.
그 효과는 아군 행군 속도를 증폭시켜주고, 체력을 보존해 주는 것.
지휘관이 대지의 군화를 착용하고 있으면, 그가 이끄는 군대는 10시간 걸릴 거리를 5시간 만에 주파하는 게 가능했다.
또한, 체력을 보존해 주기에 장기간 행군하고도 곧바로 격렬할 전투를 치르는 것 또한 가능했다.
병력의 기동성을 높여 주는 성물이니만큼, 군사적으로 그 활용 가치가 무궁무진한 보물이었던 것이다.
마칸 왕국이 주변국들을 빠르게 기습해서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도 대지의 군화를 가지고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고.
“저, 전하. 그것은…….”
“아? 싫다?”
“그게 아니라…….”
“정해.”
오토가 알렉스 국왕을 압박했다.
“대지의 군화를 내놓던지, 아니면……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던지.”
“…….”
“10초 준다. 10, 9, 8, 7…….”
그 짧은 순간 알렉스 국왕의 입술은 실시간으로 바싹 말라 들어갔다.
하지만 그에게는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대지의 군화를 바치지 않으면 나라가 멸망할 판국인데, 일단 살고는 봐야지 않겠는가?
“3, 2, 1…….”
“드리겠습니다.”
알렉스 국왕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드릴 테니 제발 그것만은…….”
“내놓고 말해.”
오토의 말에 알렉스 국왕은 대지의 군화를 가져오게 해 공손히 바쳤다.
“오. 좋네.”
오토는 대지의 군화를 신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 보고 걸어 보는 등 착화감을 느껴보았다.
주르륵…….
알렉스 국왕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성물은 군주의 상징이자 세력의 핵심이 되는 아이템.
그런 성물을 이렇듯 손쉽게 빼앗겼으니, 눈에서 피눈물이 나오는 건 당연했다.
“두 번 말하지 않을 테니까 잘 들어.”
“……예.”
“살고 싶으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게 좋을 거야. 입이 근질근질 거려서 미치겠거든.”
“뭐, 뭐든 하겠습니다!”
알렉스 국왕이 정신 나간 사람―실제로 정신이 나갔지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 전하.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한번 두고 보자고. 과연 살려둘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없는지.”
오토가 느긋하게 다리를 꼬며 알렉스 국왕을 내려다보았다.
* * *
오토는 마칸 왕국의 왕궁을 내 집 안방처럼 차지한 채 알렉스 국왕을 종놈 부리듯 부려먹었다.
“아. 맛이 별로야.”
“죄, 죄송합니다.”
“다시 가져와.”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알렉스 국왕은 오토의 반찬투정에도 진땀을 뻘뻘 흘리며 비위를 맞추느라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했다.
덕분에 오토 일행은 이오타 왕국에 있을 때보다 더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제 어떡하실 계획이십니까?”
“일단은.”
오토가 카미유의 물음에 대답했다.
“아가르타를 움직이게 해야지.”
“……?”
“아가르타의 괴물들을 다른 쪽으로 움직이게 하고, 그러는 사이에 우리는 지저세계로 들어가서 성물을 탈취하는 거야.”
“빈집털이를 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정답.”
오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르타는 숫자가 얼마 안 돼. 몇백이 전부야. 하나하나가 무시무시한 괴물이라서 그렇지.”
“음.”
“최대한 본진에서 멀리 보낸 다음에 아가르타의 군주만 제거한다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작전이야.”
해볼 만하다고는 해도 위험천만한 작전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지저세계는 그야말로 미지의 세계.
그런 곳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것 자체가 목숨을 내놓는 것과 뭐가 다르겠는가?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미유가 걱정스레 물었다.
“몸도 성치 않으신데 그런 위험한 작전은…….”
“어쩌겠어.”
오토가 대답했다.
“상태가 안 좋긴 해도, 내가 직접 가지 않으면 더 위험해질 거야.”
“그냥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마검사들과 함께 작전을 수행하겠습니다.”
“그건 안 돼.”
오토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직접 가야 돼.”
“하지만…….”
“괜찮으니까 걱정 마. 회복되고 있잖아.”
오토도 직접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저세계에 대한 정보를 오직 오토만이 알고 있었기에, 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보를 알려 줄 순 있어도 오토만이 아는 지형지물에 관해서는 알려주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걱정 말고, 하루 이틀 정도 푹 쉬다가 가자.”
“예, 전하.”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하니까.”
바로 그때.
“……!”
카미유는 순간 제 눈을 의심했다.
스륵, 스르륵…….
오토의 몸이 마치 사라질 것처럼 반투명해졌다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저, 전하!”
“으응?”
“전하의 옥체가…….”
“내 몸이 뭐?”
오토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옥체가 희미해졌습니다.”
“에?”
“마치 유령처럼 반투명해졌단 말입니다.”
“그, 그래?”
오토는 당황했다.
그러나 거울을 봐도 몸이 반투명해졌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평소랑 똑같은데? 잘못 본 거 아냐?”
“아닙니다. 제가 분명 봤습니다.”
“그래? 확실해?”
“예, 확실합니다.”
“흐음.”
그러나 몇 번이고 거울을 들여다보아도 카미유가 말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멀쩡하잖아.”
“분명히 봤습니다.”
“에이, 잠깐 눈이 침침했던 거겠지.”
오토가 별일 아니라는 듯 피식 코웃음 쳤다.
“카미유도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카미유 역시 북부제국과의 전투 당시 이런저런 부상을 입었고, 마물들과 싸우느라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비록 오토나 엘리제만큼은 아니었지만, 몸 상태가 100퍼센트라고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잘못 본 거겠지. 신경 쓰지 마. 혹시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 얘기해 줘.”
“……알겠습니다.”
카미유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심 찜찜해 했다.
‘내가 정말로 잘못 본 건가? 아니다. 잘못 봤을 리 없다. 분명 전하의 옥체가 반투명해졌다 선명해졌었다.’
이상하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치 오토가 곧 사라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었다.
‘아니겠지. 설마 그럴 리가.’
카미유는 불안감을 떨쳐 버리려 애썼다.
“그나저나…….”
오토가 시계를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쯤 시작됐겠네.”
“예?”
“아마 지금쯤 로웨나가 테르테미안의 진영을 향해 진격을 시작했을 거야.”
“……!”
“파라곤도 테르테미안 진영을 향해 진격할 테고.”
“그, 그 말씀은…….”
“속전속결.”
오토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벌어질 전쟁이라면, 세계대전보다는 내전의 형태가 낫겠지. 최대한 빨리 끝낸다면, 그만큼 사람들도 더 죽을 테니까.”
카미유는 그제야 깨달았다.
오토가 마칸 왕국으로 오기 전에 이미 모든 계획의 수립을 끝마쳤고, 실행시켰다는 것을.
* * *
오토가 마칸 왕국에서 알렉스 국왕을 상대로 횡포를 일삼고 있을 그 시각.
“저 강철 거인들이 트리톤이란 말인가……!”
황제는 오토가 보낸 트리톤들을 사열하며 감탄했다.
오와 열을 맞춘 수천 대의 트리톤들의 위엄이란 가히 엄청나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듯했다.
수십 톤의 저 강철 거인들이 우르르 달려가서 적진을 초토화시키는 걸 상상하기만 해도 군사력이 족히 10배는 강해진 느낌이었다.
“참으로 든든하도다. 저런 전략 병기들을 보유했으니, 짐의 군대야말로 이 세계에서 최강일 것이다.”
“폐하,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황제를 둘러싼 군 수뇌부들이 고개를 깊게 조아렸다.
“트리톤들의 기동은 언제 감상할 수 있다던가?”
“내일부터 이오타 왕국의 마검사들이 본국의 기사들에게 조종법을 훈련시킬 예정이옵니다. 당분간 기다려 주시옵소서.”
“왜 직접 시범을 보이지 않고?”
“지금의 트리들은 개조하는 과정을 거쳐서 본국의 기사들에게 각인부터 해야 한다고 하옵니다.”
“각인……?”
“예, 폐하. 각인을 하면, 해당 국가의 기사들만이 트리톤을 조종할 수 있다고 하였사옵니다. 만에 하나 있을 트리톤의 탈취나 노획을 방지하기 위함이라 하오니, 며칠만 기다려 주시옵소서.”
“오오!”
황제는 듣기만 해도 기쁜 소식에 입이 찢어져라 좋아했다.
아라드 제국의 기사들만이 탑승하는 게 가능하다면, 트리톤을 잃어버릴 이유도 없을 터.
대륙 최강 대국인 아라드 제국의 국력이 더욱 견고해지는 기분이었다.
“알겠다. 짐이 기다릴 터이니, 그대들은 한시라도 빨리 트리톤들의 기동훈련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황제가 트리톤들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피워 올리던 그 시각.
“전군, 출정하라.”
“예! 대공 전하!”
갑옷을 입은 로웨나의 명령에 대륙 서쪽에 자리한 아라드 제국군이 동쪽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그들의 목표는 대륙의 중부지방.
테르테미안이 지배하는 영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