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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레벨 악덕영주가 되었다-394화 (395/401)

#제394화

“대공 전하! 어서 피하셔야 하옵니다!”

“대체 어디로 피하란 건가? 이제 온 대륙이 나를 잡아 죽이려 들 텐데!”

“하, 하지만…….”

“나는 황족으로서, 아라드 제국의 대공으로서 죽을 것이다.”

“대공 전하…….”

“황가의 일원이 어찌 평생을 도망쳐 다니며 대륙을 떠도는 부랑자로 살겠는가?”

그렇게 말한 테르테미안이 자신의 기사들, 그리고 심복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들은 어서 피신하라.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나는 침몰하는 배에 불과하니, 가서 새로운 주인을 찾아라.”

“대, 대공 전하!”

기사들과 그의 부하들이 넙죽 엎드려 통곡했다.

“어찌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저희도 대공 전하와 함께하겠사옵니다!”

“대공 전하를 버려두고 저희끼리만 도망칠 순 없사옵니다!”

“죽더라도 대공 전하와 같이 죽겠사옵니다!”

그런 기사들과 부하들의 반응에 테르테미안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표정을 굳히며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이런 어리석은!”

테르테미안이 버럭 소리쳤다.

“나와 함께 죽는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대공 전하!”

“가라! 어떻게든 도망쳐서 살아남아라! 살아남아서, 파라곤에게 가라! 내 복수를 해야 할 것이 아닌가!”

테르테미안은 그렇게 소리치며 기사들과 부하들을 내쫓았다.

“지금 너희들이 기댈 곳은 오직 파라곤밖에 없다! 이 위기를 넘기려면 파라곤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야 한다! 그래야 황가의 존속이 계속될 것이란 말이다!”

테르테미안은 오토가 로웨나를 배신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모두가 오토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지금, 믿을 건 오직 파라곤뿐이었다.

로웨나가 오토의 손에 제거당하고 나면, 남은 황족은 오직 파라곤 하나.

파라곤이 반 오토 세력의 수장이 되어 아라드 제국의 황위를 지켜내는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너희가 파라곤에게 가는 것이 곧 내 복수를 이루는 길일 터. 그러니 어서 가라. 더는 말하지 않겠다.”

테르테미안이 돌아섰다.

“대공 전하…….”

기사들과 부하들은 그런 테르테미안을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다가, 이내 곧 이를 악물었다.

테르테미안의 말이 옳았다.

지금은 파라곤의 세력에 가서 붙는 것만이 테르테미안의 복수를 이룰 유일한 방법이자 아라드 제국의 황가를 존속시킬 최후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테르테미안은 조용히 로웨나가 오기를, 자신의 최후를 기다렸다.

* * *

“으악!”

“으아아아아악!”

콰앙!

와장창창!

밖이 소란스러워지나 싶더니, 문이 부서지고 로웨나가 기사들을 이끌고 테르테미안이 자리한 어전에 들어섰다.

“오셨소.”

테르테미안이 로웨나를 반겼다.

“좀 늦었구려, 누님.”

이미 죽음을 받아들인 테르테미안은 태연자약했다.

오죽했으면 로웨나를 향한 그 어떤 적개심조차 드러내지 않을 지경이었다.

“동생아. 진작 항복했으면 목숨만은 살려줬을 것이 아니냐.”

로웨나가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테르테미안을 향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붉은 눈은 이미 정상인의 것이 아니었다.

군대를 일으킨 직후부터 시작된 그녀의 광증은 전투가 거듭될수록 더욱 심해져서, 이제는 완전히 피에 미친 악귀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학살, 학살, 그리고 또 학살.

그녀는 전투에서 승리할 때마다 학살을 거듭했고, 그 숫자가 벌써 수만 명을 가뿐히 넘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그녀는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원한을 산 상태였다.

그녀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최소 수십만에서 많게는 백만 단위에 달할 지경.

만에 하나 황위에 오른다고 해도 백성들로부터 황제로 인정받고, 충성을 기대하기란 불가능했다.

민심을 잃을 대로 잃어서, 공포로서 철저히 억압하는 게 아닌 한 정상적인 통치는 꿈도 꿀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하하하하하하!”

테르테미안이 그런 로웨나를 바라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보시오, 누님. 어쩜 그리 정신을 못 차리시고 그러시오.”

“뭐라?”

“아직도 모르겠소? 이게 다 오토 드 스쿠데리아의 계략이라는 것을? 우린 놀아나는 거요. 그 교활한 놈의 손바닥 위에서 말이오.”

“깔깔깔깔깔!!!”

로웨나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뭐? 그가 우리를 가지고 논다고? 깔깔! 깔깔깔!”

“…….”

“나와 그 사람의 관계를 이간질하려 해 봐야 아무 소용없어. 흐으.”

로웨나는 테르테미안의 말을 눈곱만큼도 믿지 않았다.

“그거 알아? 오늘날 벌어진 이 상황조차 그가 의도했던 것이라는 걸?”

“허어.”

“그는 너와 파라곤과 손잡은 척하고 내 뒤를 봐주고 있었어. 그런데 뭐? 그가 나를 가지고 놀아? 깔깔깔깔깔!”

“정녕 그렇게 믿소?”

“그는 북부제국군과의 전투 당시 입은 후유증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이야. 그런 사람이 우릴 가지고 놀아서 얻는 게 뭐지?”

“그걸 믿소?”

오토의 몸이 좋지 않다는 것은 테르테미안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오토가 정말 로웨나를 황위에 올려놓기 위해 이러한 일들을 꾸몄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시한부라는 말은 필시 거짓말이리라.

“그가 수도를 장악하고, 오라버니를 체포했어. 이제 너도 사라질 테니, 남은 건 파라곤뿐이지. 파라곤만 없애 버리면, 대제국 아라드의 황위는 내 것이 될 거야.”

“크하하하하하하하!”

테르테미안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누님은 끝까지 그 교활한 사기꾼에게 놀아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겠구려. 크하하하하하하! 배신당하고 등에 칼이 꽂히고 나서야…….”

그 순간.

푸욱!

로웨나의 검이 테르테미안의 목젖을 꿰뚫었다.

“컥, 커헉!”

피를 토하는 테르테미안.

푸화아아악!

목에서 시뻘건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와 로웨나의 얼굴을 적셨다.

할짝!

로웨나가 동생의 피를 손으로 핥으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다고 내가 넘어갈 것 같아?”

“커허억…….”

“그 누구도 나와 그의 사이를 이간질하지 못해. 깔깔깔깔깔!”

로웨나는 쓰러진 테르테미안을 내려다보며 격앙된 광소를 터뜨렸다.

“……어, 어리석은. 커억.”

테르테미안은 더는 말하지 못했다.

핏물이 차오른 목구멍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컥컥거리다가 잠잠해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아라드 제국 내전의 한 축이었던 테르테미안은, 누나인 로웨나의 손에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역사에서 퇴장하고 말았다.

“들어라.”

“예, 대공 전하.”

“충성을 맹세하는 자들은 살려두되, 저항하는 자들은 모두 죽여라. 또한.”

로웨나는 단순히 거기서 멈출 인간이 아니었다.

“테르테미안의 통치를 받던 자들도 모두 죽여라. 단 하나도 남김없이.”

“대, 대공 전하.”

로웨나의 기사들은 그녀의 잔혹한 명령에 그만 경악해버렸다.

테르테미안과 그 주변 인물들, 그리고 군인들을 죽이는 것까지는 백번 양보해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테르테미안의 통치를 받던 이들, 그러니까 이 일대의 백성들을 죽이라는 것까지는 도저히 따르기 힘든 명령이었다.

이 지역 일대에서 테르테미안의 통치를 받던 백성들만 어림잡아 수십만 명.

그들을 모조리 죽인다?

그런 학살극을 벌였다간 그 원한이 일파만파로 퍼져 나갈 터.

그건 정말이지 해선 안 되는 행동이었다.

아라드 제국의 남부지역 일대를 완전히 적으로 돌이기에 충분한 악수(惡手)였던 것이다.

“죽여라.”

그러나 로웨나는 단호했다.

“테르테미안의 통치를 받고, 충성을 바치던 자들이다. 반역자들을 살려둘 순 없으니, 모두 죽여라. 구덩이를 파고, 모조리 파묻어 버려라.”

“…….”

“처형에 그 누구도 예외는 없어야 할 것이다. 살아 있는 생명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말살하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로웨나는 대학살극을 강행했다.

그런 짓을 했다간 적들의 저항이 더욱 거세질 테고, 파라곤에게 명분을 쥐어주게 될 것인데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 * *

테르테미안이 로웨나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자 대륙의 세력 구도는 새롭게 재편되었다.

테르테미안에게 협력하던 여러 국가들과 세력들은, 일제히 파라곤에게로 달려가 충성을 맹세했다.

로웨나의 성격상 테르테미안과 손잡았던 이들을 살려둘 리 없었으므로, 파라곤과 손잡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죽은 테르테미안을 섬기던 자들 역시 유언대로 파라곤에게로 달려갔다.

그렇게 파라곤은, 테르테미안이 가지고 있던 세력의 3분의 2를 흡수하면서 초거대 세력의 수장이 되었다.

단일 세력으로는 로웨나마저 압도할 만큼의 군사력과 동맹을 갖게 된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로웨나의 실책이었다.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보여준 잔혹한 학살과 보복으로 인해 민심을 잃을 대로 잃어서, 주변 세력들의 경계심과 적대감을 사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테르테미안이 퇴장한 대륙의 정세는 오토의 연합군, 로웨나군, 그리고 파라곤으로 삼파전의 형국을 이루었다.

한편, 오토는 연합군을 이끌고 빠르게 남하했다.

오토의 마음은 급했다.

‘시간이 없다. 늦으면 로웨나가 대학살극일 벌일 거다.’

오토는 로웨나가 테르테미안의 통치를 받던 백성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전쟁이 시작된 이후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학살을 자행하며, 살육의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 그녀가 테르테미안을 쳐부수는 데 성공했다면, 무슨 짓을 벌일지 안 봐도 훤한 것.

필시 승리를 자축하며 대학살극을 벌일 게 분명했다.

척! 척! 척! 척!

쿵! 쿵! 쿵! 쿵!

오토의 다급한 마음 때문에, 연합군의 행군 속도는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대지의 군화를 가지고 있는 덕분에, 연합군은 매우 빠르게 행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테르테미안이 지배하던 영토의 핵심 지역인 아케인을 향해 쉴 새 없이 달려가던 무렵.

“전하!”

와이번을 타고 정찰을 나갔던 카미유가 황급히 오토에게 보고했다.

“아케인에서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

“로웨나군의 병사들이 아케인의 백성들을 산 채로 구덩이에 파묻고 있답니다! 벌써 수천 명이 생매장당했다는 보고입니다!”

황급히 달려왔건만, 끔찍한 학살극이 이미 시작된 모양.

문제는 아직 아케인까지는 200킬로미터도 더 넘게 남은 상황.

대지의 군화를 이용해 아무리 빠르게 행군한다 해도 꼬박 하루 정도의 시간은 더 필요했다.

“……어쩔 수 없네.”

오토가 기어코 대학살의 서를 펼쳐 들었다.

사실 지금 오토는 대학살의 서를 사용해서는 안 되는 상태였다.

몸 상태도 안 좋고, 대학살의 서에 있는 영혼에너지도 얼마 없었다.

또한, 존재가 이 세계에서 사려지려는 증상이 나타나는 이 시점에 무리하게 힘을 사용한다는 건 오토에게 있어 독약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토가 대학살의 서를 꺼내든 이유는, 다름 아닌 대의 때문이었다.

로웨나의 학살은 근면·성실했다.

24시간이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몇만 명 정도는 땅에 파묻혀 생매장을 당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오토는 그들의 억울하고도 무고한 죽음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개인의 생존과 부귀영화보다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움직여온 게.

‘그들이 죽게 내버려둔다는 건…… 지난 몇 년 동안의 내 모든 노력과 행적을 부정하는 거겠지.’

어차피 이 세계에서 존재가 지워진다는 것은 기정사실.

이미 여러 차례 거스른 우주의 법칙을 한 번 더 거스른다고 한들 뭐가 달라질까.

‘제발 별일 없기를.’

오토는 갑자기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대학살의 서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우웅!

뒤이어 오토를 중심으로 실로 거대한, 연합군 모든 장병들을 감싸고도 남는 마법진이 형성되었다.

“내 의지가 거하는 곳, 그곳에 내가 강림하리라.”

다음 순간.

번쩍!

거대한 마법진이 새하얀 빛을 토해내며 연합군 전체를 집어삼켰다.

* * *

“으아아아아악!”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으아아아아앙!”

로웨나의 기사들, 그리고 장병들은 명령에 따라 백성들을 커다란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으앵! 으애애애앵!”

“응애! 응애애애애애애!”

“아저씨! 잘못했어요! 살려주세요!”

어린 아이들도, 심지어 어머니의 품에 안긴 갓난아기조차 구덩이에 가차 없이 던져졌다.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끔찍한 학살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학살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규모 병력의 등장으로 인해 중단되어야만 했다.

“……!”

“……!”

“……!”

로웨나군은 저 멀리 대규모 병력이 모습을 드러내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어떤 보고나 징후도 없었는데, 까마득하게 많은 숫자의 병력들이 어디서 솟아났는지 그들로서는 당최 모를 노릇이었다.

이윽고 그 대규모 병력이 학살의 현장을 향해 매우 빠른 속도로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다다다다다다다다!!!

두두두두두두두두!!!

쿵쾅쿵쾅쿵쾅쿵쾅!!!

지축을 뒤흔드는 울림과 함께, 연합군이 성난 파도처럼 로웨나군을 덮쳤다.

연합군.

불패의 지휘관 오토가 이끄는 군대가 무고한 백성들을 학살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이곳 아케인에 강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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