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아, 안 돼…… 안 돼…….”
망연자실한 카미유는 오토가 사라지자마자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지거나 흔들린 적 없던 카미유였지만, 이번에는 이야기가 달랐다.
카미유에게 있어 오토는 유일한 주군이자 친동생과 같은 존재.
그런 오토가 대업을 완수하자마자 사라져 버렸으니, 카미유의 입장에선 가족을 잃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카미유는 덜덜 떨리는 손을 불끈 움켜쥐고,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났다.
오토를 잃은 상실감은 어마어마하게 커서, 사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카미유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었다.
오토가 모든 걸 바쳐서 이룩한 이 위대한 업적을 지키는 것이 지금 카미유가 해야 할 일이었다.
오토가 사라진 이상 현재로서는 이 사태를 수습할 사람은 카미유만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당장 연합군 총사령관인 오토가 사라졌다는 것부터 숨겨야 했다.
기껏 대업을 이룩했는데, 여기서 오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대륙은 또다시 혼란에 빠질 터.
“모두 주변을 경계하라! 철통같이 경계하고, 그 누구의 시선도 허락하지 마라!”
“예! 카미유 경!”
카미유는 재빨리 주변에 자리해 있던 마검사들, 그리고 기사들과 함께 인(人)의 장막을 형성했다.
‘전하의 검부터.’
카미유는 땅에 떨어진 오토의 검 쿠란과 대학살의 서, 그리고 절대군림부터 챙겼다.
쿠란이야 그렇다 쳐도, 대학살의 서와 절대군림은 그 누구의 손에도 들어가선 안 되는 것.
자칫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다간 기껏 꺼뜨린 세계대전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토가 남긴 물건들부터 수습한 카미유는, 이를 악물고 휘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하라. 전하에 대한 말이 새어나가선 안 된다. 알겠나.”
“예, 카미유 경.”
“전하께선 부상을 입으셨으나, 치료를 위해 잠시 모습을 감추신 것이다.”
카미유는 사라진 오토를 대신해 총사령관 대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해내었다.
오토가 사라진 빈자리를 메꿀 사람은 그가 유일했고, 또한 그게 오토가 바라는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전하…… 전하……,’
물론 그 와중에 카미유의 가슴 속에서는 피눈물이 철철 흘러내렸다.
사실 카미유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침착한 척, 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 속은 말이 아니었다.
그저 평생 살아온 습관대로 뒷수습을 하고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연합군이 대륙의 패권을 차지하게 된 최후의 전투는, 오토가 없는 상태에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 * *
“……이 느낌은.”
한편, 잘츠부르크 가문에 머물고 있던 엘리제는 갑작스레 공허한 느낌이 들어 흠칫 몸을 떨었다.
마음 한편이 텅 비어 버린 듯한 느낌……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갑작스레 사라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었다.
‘아니, 아닐 거다.’
엘리제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쯤 승전보가 울려 퍼졌을 테고, 그는 돌아올 것이다.’
그런 진부한 이야기 따위, 사절이었다.
엘리제는 자신이 전쟁터에 나간 연인이 돌아오지 못하는 슬픈 전개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곁에서 지켜주고 싶었는데.’
문득 오토를 따라 전쟁터까지 따라나설 수 없던 게 후회되었다.
현재 잘츠부르크 가문 사람들은 공식적으로 유폐당한 상태였다.
그것은 잘츠부르크 가문이 아라드 제국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는 오명을 피하기 위한 오토의 조치였기에, 엘리제는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
엘리제는 대업이 완수되고 나면, 평생을 오토와 1분 1초도 떨어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간 떨어져 지낼 만큼 떨어져 지냈기에, 이제는 평생의 반려자로서 눈 감는 그날까지 함께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음 날.
“아!”
엘리제는 연합군이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했단 소식을 전해 받았다.
이제 모든 족쇄는 해방이었다.
지금 이 시간부터 오토와 평생을 함께하기만 하면 되었다.
엘리제는 오토를 만나기 위해 전선으로 달려가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엘리제에게 들려온 소식은 청천벽력이었다.
“……아가씨.”
카미유.
오토와 함께 전선에 있어야 할 그가 잘츠부르크 가문에 나타났다는 것은, 대단히 좋지 못한 징조였다.
“……카미유 경.”
엘리제는 난생처음으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질 않았다.
“전하께서…….”
카미유가 힘겹게, 억지로 토해내듯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미안하다고, 보고 싶을 거라고도 하셨…….”
엘리제는 이어지는 카미유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니다.”
엘리제가 카미유의 말을 부정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카미유 경.”
“전하께선…….”
“아니다.”
엘리제는 카미유의 말을 조금도 믿지 않았다.
“장난기가 도진 건가? 내게 그런 장난은 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너무 짓궂지 않은가.”
“……아가씨.”
“어디 있는 건가? 보고 싶다. 제발 부탁이니까 이제 그만 나와라.”
엘리제의 눈이 마치 정신 나간 사람의 것처럼 카미유의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면 특유의 그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씨익 웃고 있을 것 같은데, 없었다.
“아아…… 아아아…….”
엘리제가 오열했다.
털썩,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쏟아내는 엘리제의 모습이란 전쟁의 여신이 아니었다.
지금 엘리제는 그저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가엾고 처량한 여자일 뿐이었다.
엘리제를 시작으로, 오토의 실종은 극소수의 주변 인물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저, 전하께서…… 전하께서 사라지시다니…….”
“내 손주가 대체 어딜 사라졌다는 것인가? 이보게, 카미유. 말을 해 보게.”
“우리 오토가 사라지다니. 이럴 수가…….”
모두가 오토의 사라짐을 슬퍼했다.
“뺀질이…… 결국 선을 넘었구나. 내 그리 경고했거늘.”
카이로스는 오토가 어째서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알았기에 안타까워하며 애꿎은 술만 콸콸 들이부었다.
카이로스는 분명히 경고했다.
허공법계에 자주 접속하고, 정해진 역사를 밥 먹듯이 바꾼다면 생명체로서 이 세계에서 존재할 권리를 박탈당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거라고.
물론 오토의 심정이야 백번, 천번 이해했다.
오토가 그러지 않았다면 이 세계는 전쟁으로 인해 황폐화되었을 테니까.
카이로스는 오토가 이 세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에, 쓸쓸히 홀로 폭음하며 그 위대한 희생정신과 업적을 기리며 추모했다.
그렇게 모두가 웃음을 잃었다.
엘리제, 카미유, 카이로스, 카심, 펭이, 쿠란, 아드리아나, 올리브, 지안카를로, 콘라드, 바그람, 스푸너, 와지르, 핫산 등등등.
오토가 평화로운 세상을 선물하고 떠났건만, 정작 당사자 없이 남겨진 이들의 삶은 깊은 슬픔으로 인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 * *
이렇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법을 찾아서, 그를 되찾을 거다. 약속했다, 내가 찾아가기로.”
예전에, 오토가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
엘리제는 약속했다.
어느 날 오토가 사라지는 날이 오거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찾아가겠다고.
“동의합니다, 아가씨.”
카미유도 엘리제와 뜻을 같이했다.
그들은 이대로 오토를 보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10년이 걸리든 100년이 걸리든 어떻게든 오토가 다시 나타나게 만들 생각이었다.
엘리제와 카미유의 주도하에 대책회의가 열렸다.
“어르신.”
엘리제가 카이로스에게 물었다.
“제발, 제발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
“무슨 대가를 치러도 좋습니다. 그를 다시 되찾을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그러나 카이로스라고 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허허.”
카이로스 또한 오토를 잃어서 슬프긴 매한가지였다.
그간 오토와 미운 정 고운 정이 얼마나 들었던가?
문제는 카이로스조차 오토의 사라짐에 대한 해결 방법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녀석은 선을 넘어도 너무 넘었다. 사실 녀석을 다시 나타나게 할 방법은…… 없다.”
드래곤인 쿠란과 아드리아나 부부 역시도 회의적인 의견을 내었다.
“모르긴 몰라도…… 오토가 우리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것을 거스른 모양이다. 가엾은 녀석…….”
“그 어떤 고대의 마법도 우리 오토를 다시 나타나게 할 순 없을 것 같구나.”
금기를 연거푸 어긴 대가를 결코 작지 않아서, 그 어떤 마법으로도 오토의 존재를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나게 할 방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절대,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절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제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이대로 그 사람을 잃을 순 없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해 희생한 게 얼마인데, 이대로 보낼 순 없습니다.”
그러나 뾰족한 방법이 없는 이상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때문에, 분위기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침울해져 갔다.
“녀석을 다시 나타나게 하려거든 우주의 법칙마저 거스를 강제적인 계약이 필요하거늘…….”
바로 그때였다.
스으으으!
엘리제의 앞에 놓여 있던 오토의 유품, 그러니까 그가 이 세계에 남기고 간 물건들 중 하나인 대학살의 서에서 찬란한 황금색 서광(瑞光)이 뿜어져 나왔다.
“……!”
“……!”
“……!”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학살의 서가 이렇듯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은 명백히 기이한 일이었기에, 모든 이들의 얼굴이 막연한 기대감이 떠올랐다.
어쩌면 오토가 저 대학살의 서를 통해 빠져나와 다시 현신(現身)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 *
“……하아.”
오토는, 게이머 김도진은 텅 빈 방 안에서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오토는 완전히 소멸한 게 아니었다.
비록 오토 드 스쿠데리아로서 저쪽 세계에서 추방당했지만, 본래 살던 세계인 지구로 돌아온 것이다.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만…… 김도진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
며칠 전.
본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온 이후.
김도진은 시름시름 앓으며 상상할 수 없는 심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가슴은 뻥 뚫린 것처럼 공허했고, 영혼은 이미 사라져 고통을 느끼는 육신만 남아 있는 듯했다.
저쪽 세상이 사무치게 그리운데, 갈 수 없다는 현실이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형벌이었다.
차라리 소멸했더라면, 목숨을 건지지 못했더라면 더 나았을 터였다.
그러나 저쪽 세상에서의 기억이 생생한데, 본래 살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건 상상을 초월하는 정신적 고통을 유발했다.
어쩌면 다시 본래 살던 세계로 돌아온 것이 우주의 법칙이 내리는 천벌인지도 몰랐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김도진은 하루하루 눈물로 지새우며,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가야만 했다.
이 세계에서, 그에게는 아무런 권능도 발휘하지 못했다.
저쪽 세계에서 절대적인 권능을 발휘하던 오토 드 스쿠데리아는 없었다.
이곳에서는 그저 남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 무력감에 절망감이 더 컸는지도 몰랐다.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김도진은 식음을 전폐한 채 게임 영지전쟁에 매달렸다.
게임을 플레이하다 보면 그때처럼, 오토 드 스쿠데리아에 처음 빙의했을 때처럼 저쪽 세상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때문이었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김도진의 눈에서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게임 속 캐릭터들을 볼 때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행복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엘리제…….”
김도진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모니터 속 엘리제를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럴 때마다 만져지는 것은 사랑하는 엘리제가 아닌 그저 모니터의 단면일 뿐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게임을 플레이하고, 플레이하고, 또 플레이해도 이전과 같은 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고통을 참아내며 게임에 매달려 보았지만, 그럴수록 정신적인 괴로움은 더욱 커져 갈 뿐이었다.
그렇게 김도진은 지옥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소중한 사람들을,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상실감에 시달리면서.
그렇게 죽지 못해 살아가던 어느 날.
똑똑똑.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김도진은 반응하지 않았다.
반쯤 넋이 나가 공허해진 그에게 외부의 소음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게임 속 소중한 사람들의 모습만을 들여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보고…… 싶어.”
그러던 그때.
촤라라라!
쿠웅!
섬광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현관문이 두부 썰리듯 두 동강이 나 허물어졌다.
김도진도 그런 갑작스러운 사태에는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스윽.
김도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엘리제.
그토록 보고 싶었던 그녀가 검을 움켜쥔 채 김도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에는 카미유가 자리했고, 카이로스와 카심도 있었다.
‘내가 드디어 미친 건가? 아니면…… 꿈인가.’
김도진은 제 눈을 의심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이건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저쪽 세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어떻게 여기 와 있단 말인가?
하지만 상관없었다.
꿈이든 뭐든 아무래도 좋았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소중한 사람들이 눈앞에 있는데 뭐가 중요할까.
“전에 말하지 않았나. 반드시 찾으러 오겠다고.”
엘리제가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비록 겉모습이 바뀌었을지언정, 오토를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단지 게이머 김도진의 모습뿐만이 아니었다.
장담컨대, 엘리제는 오토가 그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눈은 오토의 겉모습만이 아닌 내면, 영혼의 본질을 볼 수 있었으니까.
“어, 어떻게…… 어떻게…….”
김도진은 너무나도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저들이 다른 세계에 있는 자신을 찾아올 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