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도주 계획을 세우다 (3/159)

4화. 도주 계획을 세우다2022.03.14.

여유 부릴 시간 따윈 없다. 결심한 다음 날. 나는 곧장 친구인 선안의 집으로 찾아갔다. 동생 린화가 이 사실을 알면 길길이 날뛰면서 ‘언니가 왜 선안 공자를 찾아가? 언니 선안 공자한테 흑심 있어?’라고 날뛰겠지만 어쩔 수 없다. 선안의 외가가 좀 은밀하고 어두운 일을 한다고 들었는걸. 아니, 그런 걸 떠나서. 애초에 린화가 나와 선안 사이를 의심하는 것부터가 터무니없다. 선안은 날 호색한 사내로 알고 있는데. 린화가 중간에서 날뛰면 그게 더 별나 보이지 않을까?

16549641923764.jpg“요 공자 아니십니까?”

내가 그 집 대문 앞으로 가자 문지기가 대번에 얼굴을 알아보고 반갑게 물어주었다.

1654964192377.jpg“잘 지냈나?”

16549641923764.jpg“저야 늘 그렇지요. 요 공자께선 언제 봐도 훤칠하십니다.”

나는 문지기에게 늘 그렇듯 동전을 한 움큼 건네고서 물었다.

1654964192377.jpg“안이는? 안에 있나?”

16549641923764.jpg“말도 마십쇼. 또 도박장에 갔다가 끌려 오셨습니다.”

1654964192377.jpg“이런.”

내가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차자, 문지기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16549641923764.jpg“우리 선 공자님이 요 공자님만큼만 점잖으시면-.”

16549641923802.jpg“뇌물 몇 푼에 아부가 과하다, 식아.”

문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문지기는 얼른 말을 멈추었다. 곧 커다란 대문이 안쪽에서 열리더니, 미소 짓는 선안의 모습이 나타났다.

16549641923764.jpg“어이구, 그냥 하는 말씀입죠.”

문지기는 선안이 설마 자기 말을 다 들었을 줄 몰랐는지 얼른 발뺌했다. 선안은 코웃음을 쳤으나 기분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16549641923802.jpg“그리고 이놈이 점잖긴 뭐가 점잖아? 보는 여인마다 꼬리를 흔들고 다니는 바람둥인데.”

아니, 기분 나빠하고 있나. 선안의 진지한 타박에 문지기가 쩔쩔매며 웃었다.

16549641923764.jpg“아이고 참, 도련님도.”

가벼운 잡담은 이쯤 했으면 됐다 싶어서, 나는 문지기의 등을 두어 번 두드리고서 선안의 팔을 잡아끌었다.

1654964192377.jpg“안이, 나랑 얘기 좀 해. 중요한 얘기네.”

16549641923802.jpg“이 바람둥이. 우리 집 식이까지 홀리려고?”

1654964192377.jpg“뭐라는 거야?”

괜히 툴툴대는 선안의 팔을 잡고서, 나는 그의 방 안으로 걸어갔다.

16549641923802.jpg“내 방에 가는데, 왜 자네가 앞장서는지 모르겠어.”

선안은 툴툴대면서도 순순히 따라와 주었다.

16549641923802.jpg“차는? 아주 향이 좋은 차가 들어왔어. 자네도 좋아할걸?”

1654964192377.jpg“됐어.”

방 안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문부터 닫았다.

16549641923802.jpg“차 안 마신다고?”

내가 의자에 앉자, 선안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16549641923802.jpg“왜? 넌 우리 집 차 좋아하잖아?”

1654964192377.jpg“내가 좋아하는 건 자네 집 차가 아니야, 안이. 자네 집 시비 월향이지.”

선안은 코웃음을 쳤다.

16549641923802.jpg“자랑이라고 하는 말인가? 그런 속내는 최소한 감추려 노력이라도 하지 그래?”

1654964192377.jpg“알았어. 내가 좋아하는 건 자네야.”

눈썹 양 끝을 내리고 말하자, 선안은 혀를 차고서 손을 내저었다.

16549641923802.jpg“엎드려 절 받기로군. 됐네. 그보다 무슨 일인데? 자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월향이조차 안 보겠다 할 정도면 심각한 일이라도 있나?”

있지. 상상하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지금 선안에게 ‘내가 미래를 겪고 과거로 돌아왔다. 내 제자가 미래에 황제가 되더라’고 말하면 저 자식은 기겁해서 내 입부터 틀어막을 것이다. 미래에 누가 황제가 될 거라고 말하는 건, 역심 섞인 발언으로 몰릴 수도 있으니까.

1654964192377.jpg“저기, 안이. 자네 외가가 은밀하고 어두운 일을 한다고 했잖나.”

나는 사정 설명을 생략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외가 이야기가 나오자 선안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선안의 외가인 유씨 가문은 음지에서는 잘 나가는 가문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사대부 공자들과만 어울려 성장한 선안은 자기 외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지금 선안의 표정이 좋지 않은 것도, 내가 외가 이야기를 끄집어내서일 것이다. 그는 늘 외가가 부끄럽다고 말했으니까.

1654964192377.jpg“혹시 아무도 모를 은신처 같은 것도 구할 수 있나?”

하지만 이쪽은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나는 두 손을 꼭 모아쥐고서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1654964192377.jpg“왜, 가짜 신분패라던가 그런 것도 넣어서.”

그런데…… 어째서일까. 선안은 굳은 얼굴로 날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1654964192377.jpg“안이?”

그 표정이 마모된 돌처럼 보일 지경이라, 나는 걱정스럽게 선안을 불렀다.

1654964192377.jpg“내가 자네 외가 얘기해서 화났나? 미안해. 정말 급한 일이어서.”

하지만 선안은 말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려니 불편해져서, 나는 조심스럽게 그를 또 불렀다.

1654964192377.jpg“안이?”

그 순간. 선안의 표정이 섬뜩하게 변했다. 순식간에 그의 손이 내 목덜미에 닿았다. 그가 내 목을 움켜잡은 것이다.

16549641923802.jpg“너 누구야.”

게다가 미친놈이 이상한 말을 했다. 심지어 질문을 던져놓고 대답을 들을 마음은 없는지, 목을 잡은 손에서 힘도 빼지 않았다. 목뼈가 안으로 눌리며 숨쉬기가 힘들어져서, 나는 덩달아 그의 목을 꽉 틀어쥐었다. 놓으라고 발버둥 치는 것보단 그게 제일 빠를 것 같았다. 서로의 목을 조르며 버티기를 한참. 마침내 선안이 내 목을 놓았다. 나는 좀 더 버티고 싶었으나, 기침이 미친 듯이 튀어나와서 그러지 못했다. 허리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손을 놓고서 나는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기침은 목구멍이 욱신거릴 만큼 튀어나온 후에야 이물감을 남기고 사라졌다. 나는 가슴을 계속 퍽퍽 두드리면서 선안을 노려보았다. 같이 목을 졸랐는데도 그는 멀쩡해 보였다. 멀쩡한 모습에 서늘한 눈동자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짓을 보자 뒤늦게 화가 치솟았다.

1654964192377.jpg“개새끼. 미쳤어?”

나는 참지 못하고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그러나 선안은 오히려 이번에는 내 양 손목을 세게 쥐며 물었다.

16549641923802.jpg“내 질문에 대답부터 해. 너 누구냐고.”

1654964192377.jpg“이 나쁜 자식아, 내가 할 말이다. 누구냐. 내 친구 안이는 너처럼 폭력적인 인간이 아니야.”

16549641923802.jpg“!”

1654964192377.jpg“아니, 자넨 내일부턴 내 친구도 아니야. 다짜고짜 사람 목을 조르다니.”

독 먹고 죽어서 회귀한 지 이제 막 사흘째인데. 사흘 만에 목 졸려 죽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아, 목이 너무 아프다. 거울을 보면 목에 빨갛게 손자국이 나 있겠지. 손자국이면 그나마 낫다. 손 모양 그대로 시퍼렇게 멍이 들지도 몰랐다. 그렇게 얼마나 씩씩거리고 있었을까. 눈가가 뜨끈해지면서 눈물이 고이려 할 즈음, 선안이 내 손목을 뿌리치듯 놓아주며 물었다.

16549641923802.jpg“내 외가 이야긴 어디서 들었나?”

나는 버럭 소리쳤다.

1654964192377.jpg“자네 주둥이한테서!”

그런데 외치고 나니, 뒤늦게야 심장이 철렁했다. 생각해보니, 선안이 내게 자기 외가 이야기를 한 시기가…… 불분명했다. 그가 전생에 외가 이야기를 해준 건 맞는데. 그게 어느 시점이었는지 모르겠다. 술 마시고 말실수를 한 다음 해줬던 거 같은데. 선안의 눈이 가늘어진다. 제기랄. 현생에선 아직 이야기해 주기 전이었나 보다. 그래서 의심했구나.

1654964192377.jpg‘이를 어쩌지?’

심장이 빠른 속도로 내 머리를 북처럼 두드려댔다.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해보라고 재촉하고 있었다. 기지를 발휘해서 나는 반쯤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654964192377.jpg“자네가 술 마시고서 그랬잖아.”

16549641923802.jpg“내가 언제. 기억 안 나는데.”

1654964192377.jpg“술 취해서 기억 안 나겠지! 내 누이가 자넬 좋아한다고 그랬더니, 자네가 외가 이야기를 했어! 내 누이랑 자넨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회귀 전 일어날 일이란 걸 빼면 사실이었다. 술 취한 내가 먼저 린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그가 괴로워하면서 외가 핑계를 대고 거절했다. 선안은 아직 이 시점에선 린화의 마음을 모르기에, 어리둥절한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곧 뜨악해 되물었다.

16549641923802.jpg“린화 소저가 날 좋아한다고?”

의도한 대로, 자기 외가 이야기에서 내 누이 쪽으로 화제가 돌아간 듯했다. 속으로는 안도했으나,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이를 으드득 소리 내어 갈았다.

1654964192377.jpg“좋아하지. 하지만 자넨 내 누이와 절대 못 맺어질 거야. 화난다고 사람 목 조르는 개새끼와는 가족 될 마음이 없거든.”

16549641923802.jpg“!”

선안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곧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16549641923802.jpg“맞는 말이야. 난 자네 누이에게 부족해.”

그 모습이 난데없이 처량해 보였다. 하지만 난 거기에 휩쓸리지 않고, 팔짱 낀 채 코웃음 치며 고개를 돌려버렸다. 내 분노를 단단히 보여주자, 선안은 뒤늦게 사과했다.

16549641923802.jpg“미안해. 자네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어머니 비밀을 알고 있기에…… 좀 의심했네.”

1654964192377.jpg“의심할 게 뭐 있나. 내가 자네 아니면 누구한테 이 얘길 듣는다고?”

16549641923802.jpg“좀 복잡한 일이 있어서. 실제로 암살자가 오기도 했고.”

1654964192377.jpg“암살자? 암살자가 왔다고? 누구한테? 자네한테?”

16549641923802.jpg“음. 뭐. 그냥 그렇지.”

그냥 넘어가기 힘든 어마어마한 단어를 말해 놓고서, 선안은 적당히 둘러대더니 몸을 일으키며 쑥스럽게 제안했다.

16549641923802.jpg“어쨌든 미안하니 은신처 구하는 건 내가 돕겠네. 한데 은신처는 갑자기 왜 구하나?”

1654964192377.jpg“나도 일이 좀 있어서.”

아까 그처럼 둘러대자, 선안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하지만 자기도 자기 사정을 다 얘기하지 않으면서 내 사정만 물을 수는 없다고 여기는지, 더 캐묻는 대신 어깨를 으쓱하고 문을 열었다.

16549641923802.jpg“따라오게. 돈만 있다면야 구하는 건 쉽지.”

16549642067254.jpg

  * * * 자신만만하게 집을 나간 선안이 날 데려간 곳은 그의 단골 도박장 천금수화였다. 설마 그가 도박장에 날 데려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해서 도박장 입구에 버티고 서서 물었다.

1654964192377.jpg“은신처를 도박으로 따야 하나? 꼭 여기 들어가야 해?”

선안은 고개를 젓고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16549641923802.jpg“도박하러 온 게 아니야. 이 도박장이 우리 외가 거네.”

1654964192377.jpg“지, 진짠가?”

회귀 전에도 그건 몰랐는데? 그가 도박장에 자주 다니는 건 알았지만 그냥 취미인 줄 알았다.

16549641923802.jpg“자넨 내가 여길 왜 다닌다 생각했나?”

1654964192377.jpg“도박쟁이라서.”

얼굴을 구긴 선안은 내 팔을 한 번 꼬집고는, 따라오라며 팔을 잡아끌었다.

1654964192377.jpg‘아…… 걸리면 부모님이 날 죽이려 들 텐데.’

붉은 주렴을 바닥까지 늘어뜨린 문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나는 눈을 딱 감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금수화는 화음 수도에서 가장 화려한 도박장이란 명성에 걸맞게 내부가 휘황찬란했다. 바닥과 기둥, 천장은 모두 금빛이었고, 사방에는 반투명한 천으로 만든 거대한 꽃들이 널려 있었다. 그 거대한 꽃들로 둘러싸인 독방에선 사람들이 도박을 하거나 술을 마셨고, 중앙에 있는 무대 위에서는 악공들이 곡을 연주했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공간에 잠시 얼어 있을 때였다.

16549641923802.jpg“어?”

선안이 지나가는 누군가를 보며 인상을 굳히더니, 내 팔을 두드리며 빠르게 말했다.

16549641923802.jpg“자네, 잠시만 여기 있게. 직원들이 오면 내 이름 대고 기다리는 중이라 해.”

1654964192377.jpg“자넨?”

16549641923802.jpg“잠시만.”

그 말을 끝으로 선안은 돌연 어딘가로 뛰어가 버렸다. 나는 그 하나만 보고 익숙하지 않은 도박장까지 따라왔는데. 순식간에 이 낯선 공간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당황해서 멀뚱히 서 있자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를 힐긋거리며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어댔다. 이 화려한 도박장 안에서 혼자 단정한 서생 복장으로 쩔쩔매는 내 꼴이 우스운 듯했다. 젠장. 은신처 구하러 왔다가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네. 나는 속으로 욕을 뱉었으나, 일단 선안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서서 그를 기다렸다. 직원 하나가 방으로 안내해주겠다며 다가왔을 때도 선안의 이름을 대고 거절했다. 그러기를 일각 정도. 슬슬 다리도 아프고 화도 나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 즈음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내가 가장 무서워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9642098851.jpg“설마…… 스승님?”

1654964192377.jpg“!”

16549642098865.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