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누가 스승님을 건드렸습니까2022.03.17.
왜 내 제자 목소리가 도박장에서 들리는 걸까. 지금 시기라면 아직 내 제자님은 고분고분하고 심약한 13황자 흉내를 내고 있을 텐데. 등골에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기분이다. 하지만 분명 내가 들은 건 제자의 목소리였다.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고 서 있기를 몇 호흡. 점차 발소리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결국 목소리의 주인이 친히 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곳에서 스승님을 뵐 줄이야.”
역시나. 나보다 껑충 높은 눈높이에서 날 내려다보는 청려한 얼굴은 내 제자였다. 반사적으로 한숨이 새어 나오자 미소를 띠고 다가온 입가가 살짝 비틀려 올라갔다.
“반갑다고 해야 하나요?”
지척에 다가선 제자는 인사 대신 내게 조언을 구하듯 물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서 제자를 올려다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전-.”
‘전하께서 여긴 어쩐 일로 오셨느냐’고 말하려던 거였다. 그러나 질문은 완성되지 못하고 목구멍 너머로 도로 쏙 들어갔다. 제자가 접은 부채를 내 입에 가져다 댄 탓이었다. 미쳤나? 얼결에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이자,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제가 도박장에서 만난 걸 남들이 알아봐야 무엇이 좋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스승님?”
눈치 없게 자기 정체를 누설하지 말라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13황자가 궁궐 밖, 심지어 도박장 안에 있는데. 주위에 호위가 하나뿐이구나. 공개적으로 온 게 아니란 소리겠지. 닥치고 있겠단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제자는 그제야 부채를 거두어들이며 시선을 주위로 던졌다. 나 역시 덩달아 주위를 보았다.
‘선안 어디 갔어 선안!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선안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홀로 서 있을 땐 힐긋거리던 사람들이 제자가 곁에 와 서자 오히려 이쪽에 관심을 껐단 점이었다. 나는 주위 둘러보길 멈추고서 다시 제자를 보았다.
‘젠장. 심장아. 그만 좀 뛰어. 예상하지 못한 데서 만났다지만 혼자 너무 요란스럽잖아.’
제자가 여기엔 왜 온 걸까? 모르겠다. 전생에 제자가 도박장에 다녔던가? 모르겠다. 하지만 막상 제자는 아는 척 내게 와 놓고서, 내가 조용해지자 날 내버려두고 주위를 보느라 바빴다. 날 만난 건 당연히 우연일 거고. 혹시 달리 만날 사람이 있나? 그런데 내가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일부러 여기에 온 건가? 고민 끝에 나는 일단 제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막상 그를 부르려고 하니 막막해졌다. 젠장. 제자를 뭐라고 불러야 하지? 평소에 부를 땐 ‘전하’라고 했는데. 조금 전에 제자가 그랬잖아. ‘전하’라고는 하지 말라고. ‘13황자님’이라고 부르는 건 ‘전하’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욱 나쁘지. 하지만 도련님이라고 부르자니 내 차림새 역시 만만치 않게 부잣집 공자님 티가 났다. 그럼 동생? 미쳤군. 13황자가 날 죽이려 들 거야. 그러면…….
“저…… 제자님.”
고민 끝에 조심스레 호칭을 사용하자, 내내 주위만 보던 제자가 바로 내 쪽을 쳐다보며 눈썹 한쪽을 찡긋했다.
“제자님?”
그러고는 내가 한 말을 한 번 되풀이했다. 이 지칭도 별로일까?
“달리 부를까요?”
겁이 나서 나는 얼른 발뺌하고 물었다. 하지만 달리 지칭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걸. 우물거리고 있자니 제자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날 시험하듯 바라보았다. 그 꿰뚫어 보는 시선에 내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그러기를 몇 호흡. 숨쉬기가 힘들다고 여겨질 즈음. 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르세요.”
바짝 긴장하고 있던 터라 나는 냅다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말하고 나니 내가 감사할 일이 아니었지만. 젠장. 자기 사정을 고려해서 전하라 안 불러주는 건 나인데. 왜 내가 감사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아, 안 돼. 깊게 생각하지 말자. 이 제자와 관련된 일은 깊게 생각하면 할수록 화날 뿐이니. 물컹물컹 모여드는 역정을 감추고서, 나는 다시 주위를 보고 있는 제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자님. 저…… 혹시 여긴 왜 오셨습니까?”
제자는 내 쪽을 쳐다도 보지 않고 되물었다.
“그러는 스승님은 여기 왜 오셨는지요.”
“제가 먼저 여쭈었……지만 제가 먼저 대답해도 상관은 없답니다. 친구가 도박을 좋아해서요. 찾으러 왔답니다. 전 우애가 깊거든요. 제자님은요?”
나는 제자가 ‘도박하러 왔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설령 진심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제자는 대답하는 대신 픽 소리가 나게 웃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되물었다.
“우애?”
되묻는 것 같지만 조롱조였다. 방금 내가 한 말 어디에 조롱할 여지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그런 어투였다. 나는 찔끔해서 제자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네. 우애요.”
그러고서 제자의 조롱은 애써 모른 척하고 다시 물었다.
“제자님은 여기에 왜 오셨습니까?”
“나도 사람을 하나 찾으러 왔습니다.”
“사람이요?”
설마 그게 선안은 아니겠지. 과거에 제자와 선안 사이에 연분이 있었던가? 내가 안 보는 데에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는 제자와 선안 사이에는 이렇다 할 친분이 없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계시나 봅니다, 스승님.”
그의 전생 인맥을 머리로 떠올려 보던 게 표정으로 드러났을까? 돌연 제자가 머리 위에서 속삭였다. 흠칫해서 고개를 들자 그가 웃음기 띤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웃고 있다고 해서 진짜로 그 미소를 믿어선 안 된다. 전생에서도 그는 내게 늘 잘해 주었으나 마지막엔 사약을 내렸다.
“머리를 굴리다니요……?”
“글쎄요. 도박장에나 다니는 제자를 혼낼 방법이라도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하하. 제가 어찌…….”
“아니면 즐겁게 놀러 왔는데, 하필 보기 싫은 얼굴을 보아서 기분이 상하셨을까요?”
“예?”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단 멍한 표정으로 제자를 올려다보았다. 기껏 가라앉혔던 심장은 다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제자는 말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빈정거림이구나. 일부러 넋 놓은 표정을 하고 있자니, 제자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하긴. 지금 스승님께 이런 말을 해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말했다.
“스승님께서 찾으러 온 친우라면 보나 마나 선씨 가문의 안 공자겠지요. 잘 찾아서 가십시오.”
“제자님은…….”
“제 친우를 찾아보겠습니다.”
아아. 역시. 제자도 달리 찾을 사람이 있어서 여기에 온 거였어. 안심하는 머리 위로 제자가 마지막까지 빈정거렸다.
“마음이 가벼우신 건 알지만 주머니까지 가볍게 하진 마시고요.”
‘주머니 가볍게 하지 말라’는 건 도박하지 말란 뜻 같은데. 마음이 가볍단 건 대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오늘은 날 여기서 괴롭힐 마음이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이다. 나는 굳이 말대꾸하는 대신 순순히 “네.” 대답하고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얼른 와라 선안아. 네 친구가 몹시 곤란하다. 그런데 자기 친우를 찾아가겠다던 제자가, 잘 떠나는가 싶더니 돌연 내 목을 건드렸다. 그의 커다랗고 뜨거운 손이 목덜미에 닿자마자 나는 거북이처럼 목을 최대한 감추고서 어깨를 위로 올렸다. 잔뜩 움츠리고서 돌아보자 굳은 표정의 제자가 보였다. 그 표정을 보자 심장이 선뜩해졌다. 이런. ‘지금 시기’의 나는 아직 제자를 두려워할 때가 아닌데! 제자도 대외적으로 무시 받고 구박받는 황자이고!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무서워하다니. 내가 미쳤구나! 속으로 욕을 뱉으며 나는 다급히 둘러댔다.
“목, 이 좀 예민합니다. 건드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둘러대고 나니 변명이 좀 터무니없게 들렸지만 달리 생각나는 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도 나도 대외적으로 사내고 13황자도 사내이니 내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이진 않겠지. 나는 슬쩍 제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제자의 눈매가 몹시도 흉흉했다. 표정은 얼음장 같았으나 눈동자만큼은 한밤중 산에서 만난 호랑이 같았다. 그 태도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내 말을 이상하게 받아들였나? 예민하단 뜻을 다르게 받아들였을까?
“그게, 저는-.”
결국 다시 몇 마디 덧붙이려는데 제자가 찬바람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목. 누가 이런 겁니까.”
“네?”
되묻자마자 제자가 내 상의 옷깃을 쥐더니 뒤집듯 벌렸다. 기겁해서 펄쩍 뛰었으나 제자는 내 옷깃을 움켜잡은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재차 물었다.
“스승님 목의 손자국. 누가 이런 건지 여쭈었습니다.”
‘아! 아까 선안이!’
선안은 외가 일로 암살당할 뻔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 때문에 내가 알려주지 않은 자기 외가 사정을 이야기하자, 나를 의심해서 목을 졸랐지. 덩달아 나도 선안의 목을 졸랐지만. 하여튼 그때 손자국이 남은 모양이었다. 아차 싶어서, 나는 다급히 옷깃을 세워 목을 감쌌다. 하지만 제자의 손에 가로막혔다.
“제자님. 뭘 하시는 겁니까.”
엄격한 스승인 척 인상을 찌푸리며 말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그의 시선은 내 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누가 이런 겁니까. 두 번째 여쭙습니다, 스승님.”
당혹스러운 건 그가 좀 화난 것처럼 보인단 점이었다. 내 목에 고정된 그의 시선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만약 내가 회귀했다는 걸 숨기는 처지가 아니라면, 제자에게 대놓고 물어보았을 것이다. 너도 날 죽이고 싶어하면서 왜 화내는 거냐, 라고. 자기는 아예 코앞에서 날 독살했으면서. 목 졸려 죽은 것도 아니고 자국이 좀 남은 정도로 왜 저렇게 눈이 무서워진 거야? 자기가 죽여야 하는데 남이 죽일 뻔해서? 어라. 말하고 나니 이건가 본데? 그 생각을 하자마자 더욱 두려운 마음이 들면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원한이 깊으면 누군가 자기 원수를 대신 죽일 뻔했단 것만으로 저렇게 화낼 수 있을까?
“대답을 안 하시는군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목을 손으로 가리고 있자니, 제자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사정이 좀 있었습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둘러댔다. 선안이 내 목을 조른 건 화나는 일이지만, 그건 선안과 나 사이의 일이었다. 암살 위험에 노출되어 예민한 선안에게 그의 비밀을 내가 경솔하게 이야기해버린 탓이었다. 이 일은 남에게 얘기할 만한 화제가 아니니 제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제자와 아무 관련 없는 일이기도 하고. 그러나 제자는 집요했다.
“그 사정이 뭔지 물어보는 겁니다, 스승님.”
“제자님이 알아야 할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알아야 할 이야기가 아니라고요?”
“예. 사적인 일입니다.”
“…….”
화……났나? 내 말에 또박또박 계속해서 말대꾸하던 제자가 돌연 조용해졌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다가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제자를 보았다. 제자는 아까처럼 계속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뜻밖에도 그가 만개한 벚꽃처럼 미소짓더니 믿고 싶지 않은 말을 했다.
“그렇군요. 정 그러시다면 더 묻지 않겠습니다. 스승님께도 저 따위에게 말하고 싶지 않은 사정이 있겠지요. 하지만 제자 된 몸으로, 어찌 스승의 목에 상처 난 걸 보고서 그냥 보내겠습니까. 방으로 가시지요. 제자가 치료해드리겠습니다.”
뭐?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제자를 쳐다보았다. 절대로 안 될 일이었다. 목을 치료하려면 상의를 좀 풀어야 할 텐데. 나는 남장하고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