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내 애가 아닌데요 2022.05.09.
황후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순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요요화가 여인인 걸 아는 그녀로서는, 딸이 눈도 깜빡하지 않고 엄청난 거짓말을 하자 헛웃음이 나온 지경이었다. 그러다 황후는 아직까지 배를 감싸고 있는 딸을 보자 분노가 치솟아 일갈했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눈치껏 해도 될 거짓말이 있고 절대 하면 안 될 거짓말이 있지! 감히 어미 앞에서 그따위 거짓말을 해?!”
9황녀는 어머니의 말에 더욱 화가 나 외쳤다.
“왜 거짓말이라 생각하세요? 어마마마가 뭘 아신다고요?”
황후는 너무 화가 나서 딸의 얼굴조차 보기 싫어졌다.
“대체 그 고집은 누굴 닮은 게냐. 네 언니들은 하나같이 출중하고 영민한데, 왜 혼자만 멍청한 데다 고집불통인 거냐! 제발 네 언니들의 반의반의 반이라도 닮아보아라!”
9황녀는 입술을 깨물고서 황후를 노려보다가 확 몸을 돌려 뛰쳐나가 버렸다.
“저게, 저것이!”
황후는 입술을 떨다가 제자리에 앉아 머리를 감쌌다. 고 상궁은 9황녀가 떠나자 심신 안정에 좋은 회로차를 끓여와 건넸다.
“이걸 드시고 좀 진정하세요, 황후마마.”
황후는 찻잔을 잡긴 했으나 흥분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하고 한동안 식식거렸다. 한참 만에야 황후는 눈을 질끈 감고서 말했다.
“황녀가 자기가 회임했다고 거짓말하더군. 말이 되는 거짓말을 해야지.”
“이런. 요 대인을 많이 사모하시나 봅니다.”
“후우. 황녀가 대체 누굴 닮은 건지 모르겠어. 내 친정 식구 중에 저런 성질머리는 아무도 없는데 말이다.”
“요 대인은 정말 선인 같은 자태를 지니셨지 않습니까. 첫사랑에 빠지면 안 그런 사람도 쉽게 흥분하지요.”
“그 애는 첫사랑에 빠지기 전에도 쉽게 흥분했다.”
고 상궁은 위로차 좋게 말하긴 했으나, 사실 그녀도 9황녀의 성질머리가 원래 그렇다는 걸 알기에 더 반박하진 못하고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 황후가 머리가 많이 아픈지 차도 마시지 않고 찻잔을 내려놓자, 고 상궁은 다시 좋은 소리를 해주었다.
“염려 마세요. 9황녀께서 성정은 조금 다급하시지만 그래도 영민한 분이 아니십니까. 황후마마야 황녀님의 친모이시니 앞에서 이런 소리도 하고 저런 소리도 하는 거지요. 밖에서까지 그런 말씀을 하진 않으실 겁니다.”
고 상궁의 위로에 황후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혼담이 오간 지 사흘 정도가 지났을 때다. 일단 정식으로 혼담이 오가게 되면 분명 화음 수도 전체가 떠들썩할 텐데. 아직 본격적으로 일이 진행되는 건 아닌지라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관련된 몇몇뿐이었다. 하지만 언제 공식적인 혼담이 오갈지 모르는지라,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이국사 일은 계속해야 하기에 나는 평소처럼 의복을 잘 차려입고 입궐했다. 그런데 월무궁 근처에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길가에 서 있던 낯익은 태감이 내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요 대인, 안녕하십니까?”
“예.”
얼결에 인사를 받으며 보니 황제의 측근 태감인 송 태감이었다.
“송 공공.”
나는 뒤늦게 아는 척을 하면서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 사람이 며칠 전에 파격적인 혼담을 가지고서 우리 집에 다녀갔지. 그런데 갑자기 내게 말을 걸다니. 이제 본격적으로 혼담을 진행하겠단 폐하의 뜻인가? 얼마나 초조한지 혓바닥이 다 간지럽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래도 평온해 보이려 애쓰며 나는 송 태감에게 물었다.
“공공께서 여기는 어쩐 일인가? 혹시 월무궁에 가는가?”
내 질문에 송 태감은 은근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소인은 요 대인을 뵙기 위해 여기서 기다렸습니다.”
진짜 혼담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하지만 왜 나한테 직접? 우리 부모님한테 말하지 않고? 내가 얼떨떨해서 송 태감을 바라보자, 송 태감은 손으로 큰길을 가리키며 권했다.
“폐하께서 요 대인을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이리로 가시지요.”
곧 수업할 시작이고 13황자가 날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은 황제 앞에선 통하지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송 태감을 따라갔다. 송 태감이 안내한 곳은 당연하겠지만 편전에 있는 황제의 개인 서재 겸 집무실인 태직전이었다. 커다란 전각 앞에 서자 더욱 심장이 거세게 뛴다. 아니, 진짜로 폐하랑 일대일 독대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관직에 오르긴 했지만 나는 아직 높은 직급이 아니라 황제와 이렇게 독대할 일이 없었다. 여럿이서 함께 배알하거나 먼발치에서나 한두 번 보았을 뿐. 가장 가까이에서 본 게 사냥대회 때 일인데, 갑자기 태직전에 불려갈 줄이야.
“폐하. 요 대인이 왔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송 태감은 거침없이 문 안쪽으로 고했고, 곧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시지요.”
송 태감이 웃으며 말했고, 이젠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몇 개 문을 지나가자, 혼자 사용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황제의 모습이 드러났다. 13황자의 수려한 용모가 어디에서 나온 건지 알 수 있는 얼굴을 한 황제는 위엄 있는 태도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이국사가 되기 전 잠시 교육받은 일을 떠올리고서 적당한 위치에서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서 천천히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빠르게 날아오는 게 느껴졌다. 당황해서 얼결에 잡아채고서 내려다보니 문진이었다. 돌……문진은 아니고. 쇠 문진도 아니고. 다행히 좀 말랑한 문진이긴 한데. 이걸 왜 던진 거지? 나는 문진을 멍하게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황제를 보았다. 황제는 기가 막히단 얼굴로 턱을 떨고 있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나한테 집어던진 거구나! 그걸 깨닫자마자 나는 황급히 얼른 머리를 박고서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폐하. 문진을 머리로 받는 건 처음이라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황제가 설마 다짜고짜 문진을 집어던지는 일이 있으리라고는 상상해 본 적도 없는 거지만. 다른 대신들도 다 문진에 대가리 박으면서 일하나? 하여튼 아주 X 됐다 싶어서 그렇게 옹송그리고 있자니, 황제가 헛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황제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지시했다.
“되었다. 머리를 들라.”
머리 들라 해놓고 이번엔 벼루 던지는 거 아니겠지. 나는 덜덜 떨면서 머리를 들었다. 그러고서 보니, 다행히 황제는 또 뭘 던질 자세는 아니었다. 안도도 잠시. 곧 황제가 왜 갑자기 날 불러서 문진을 집어던진 건가 의아해졌다. 13황자를 나와 혼례 시키기로 하긴 했는데, 막상 혼례 시키려고 보니 아까운가? 어쨌든 우리 두 사람이 혼인하고 나면 사방에서 수군거릴 거 아닌가.
“요 이국사. 9황녀가 짐을 찾아와 아주 엄청난 이야기를 꺼내더군. 자신이 이국사의 아이를 회임했다고 말이야. 이국사. 어디 짐작 가는 바가 있나?”
그러나 황제가 꺼낸 이야기는 ‘내가 아들을 가르치라 했지 유혹하라 했느냐!’는 호통보다 더욱 지엄하고 무서웠다. 나는 입을 벌리고 멍하게 황제를 쳐다보다가 다급히 머리를 바닥에 박고서 외쳤다.
“폐하. 천부당만부당 만만부당 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신은 씨가 없사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가 다시 헛기침을 터트렸다. 하지만 겁이 나서 고개도 못 들고 있자니, 잠시 뒤. 황제가 아까보다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지시했다.
“고개를 들라. 경이 아무리 재주가 좋다 한들 그런 재주까지 없다는 건 짐도 안다.”
그 말에 안도해서 고개를 들고 보니, 황제가 이제는 팔에 머리를 괸 채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어 일단 가만히 기다리자, 황제는 한참 후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경에게 그런 재주가 없단 건 알지. 하지만 황녀는 자신이 회임했다고 주장하고 있어. 경과 13황자 사이에 혼담이 오간단 말을 어디서 듣고는 그러는 모양이다.”
그걸 잘 알면서 왜 나한테 문진을 집어던지신 거죠……?
“나와 황후에게 화를 내고 끝내면 차라리 낫지. 하지만 황녀는 경과 자신을 혼인시켜주지 않는다면 이 사실을 모두에게 말할 거라 떠들다 갔어.”
회귀 전에도 회귀 후에도 9황녀는 미쳤구나. 나는 멍하게 황제를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지는 이제 알겠다. 그러나 아직도 황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더러 9황녀를 달래기라도 하란 건가? 나는 일단 입을 다물고서 황제가 지시를 내리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러기를 다시 한참. 마침내 황제가 눈을 감고 눈두덩이를 누르면서 말했다.
“9황녀가 이유도 없이 이럴 리는 없지. 아마 경이 황녀가 홀릴 만한 일을 했을 거야. 그렇지?”
아니요.
“짐작 가는 바가 없습니다, 폐하.”
“그래도 무언가가 있었으니 그 아이가 그 난리를 부리는 거겠지.”
“…….”
“요 이국사.”
“예, 폐하.”
“무조건 이 일을 해결하라.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짐은 9황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경이 남장한 여인이란 걸 밝혀야만 한다.”
왜 불똥이 나한테 튀는데?!
“그러면 요씨 가문은 적자가 없으니, 먼 방계의 친척을 데려와 후계자를 세워야겠지. 자네와 자네 양친에겐 미안하지만 짐은 군주이기 이전에 아비로서 내 딸의 체면을 지켜야 한다. 알았느냐?”
알 리가 있나! 그냥 황당할 뿐이다. 내 남장을 가지고 아주 요긴하게 써 드시는구나. 남장해서 제대로 혼인하지 못할 테니 아무도 원하지 않는 13황자와 혼인하라 하더니. 이제는 9황녀 체면을 지키라 협박해? 부모인 자기들도 못 하는 걸 나더러 어쩌란 거야? 그렇다고 내가 9황녀와 따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녀가 마음을 돌리게 하기도 힘들잖아? 속으로 쏟아내고 싶은 말이 많지만 그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뭘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그저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 * * 날 향한 9황녀의 마음을 돌리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9황녀는 날 제대로 본 건 두 번뿐이니, 분명 내 성품에 반한 건 아닐 거다. 내가 9황녀를 구해 주었고, 그때 본 얼굴이 아주 잘났기 때문에 반한 거겠지. 그렇다면 비슷한 조건의 다른 사내가 나타난다면 9황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만큼 잘났고 9황녀에게 좋은 인상을 주되 혼인이 가능한 진짜 사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수를 쓸 때는 주의점이 있다. 아무 사내를 붙였다가는 황제나 황후가 날 죽이려 들 거란 점이었다. 그렇다면 황제가 인정할 만한 사윗감을 물색해 9황녀에게 보이고, 9황녀가 그자를 마음에 들어 해야 내가 무사하겠군. 아…… 어렵네. 나만큼 잘난 얼굴을 어디서 찾아? 여기서부터 막막한데? 그런데 한참 고민에 잠겨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스승님.”
무거운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와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앞에 제자가 서 있었다.
“전하.”
이에 놀라서 그를 부르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새 월무궁으로 향하는 좁은 길목이었다. 그러니까…… 13황자가 그 길목에 서 있다가 나와 부딪힐 뻔한 것이다. 아니, 설마. 여기서 날 기다리고 있던 거야?
“송구합니다. 뭘 좀 생각하느라 전하를 몰라뵈었습니다.”
나는 얼른 13황자에게 사죄를 했다. 그러나 13황자는 입가에는 미소를 띠고 있는데 눈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좀 화난 얼굴 같았다. 그걸 보자 수업 시간이 한참 지났단 게 떠올라, 나는 다시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월무궁에 가던 길에 폐하께 잠시 불려가서요. 수업에 늦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사죄하고서 13황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13황자는 이제는 아주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정체불명의 표정에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뭐야. 넌 또 뭐가 문제인데.’
하지만 대놓고 물을 기력도 없어서 멍하게 보고 있자니, 13황자가 같이 걸어가자고 월무궁 쪽으로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아홉째 누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러시더군요. 누님의 배 속에 제 조카가 있다고요. 그 아비가 스승님이라던데.”
그 어마어마한 말에 발에 힘이 빠져서 그만 비틀하고 말았다.
하지만 13황자가 대번에 날 잡아 끌어당기는 바람에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그러나 너무 그와 가깝게 붙어버렸다. 눈이 마주치자 13황자는 눈매가 슬쩍 휘어지게 웃더니 조롱조로 말했다.
“이리저리 바쁘시군요. 이 제자와 혼담을 주고받으시면서 누님과 거사까지 치르셨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