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분노한 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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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분노한 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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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분노한 린화
2022.05.23.
선안의 긍정적인 대답에 나는 완전히 안도했다.
안 그래도 13황자에게 명단을 빼앗긴 후로 이제 어쩌나 힘겨워하고 있었는데. 그가 뺀질뺀질한 친우가 아니라 의리로 빛나는 친우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선안이 혹시라도 마음을 돌릴까 봐 최대한 좋은 말을 퍼부었다.
“내가 다 방법을 찾아내서 우연히 자네와 9황녀 전하가 마주칠 기회를 만들겠네. 그때 내가 엉터리로 행동할 테니 자네는 딱 비교되도록 잘 굴면 돼.”
“그럴 기회 만드는 게 쉬울까?”
“해봐야지.”
황제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주려나? 안 도와줄 거 같긴 한데. 어쨌든 최대한 머리를 굴려 가면서 방법을 강구해야겠다.
그런데 선안이 갑자기 차를 마시면서 표정이 미묘해졌다.
“왜 그러나?”
나는 그가 혹시 마음을 바꾸어 버릴까 봐 덜컥 겁이 나서 물었다. 그러지 마라, 친구야.
선안은 찻잔을 완전히 내려놓지 않고 두 손으로 어중간하게 든 채 주저하다가 물었다.
“전에 자네가 그랬잖나. 자네 누이가 날 연모한다면서.”
아. 회귀 전에 선안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가 의심을 살 뻔했을 때. 그 핑계를 대고 벗어난 적이 있지. 그때 자기는 린화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전혀 신경 쓰지 않은 눈치더니. 의외로 생각하고 있었나?
두 번째로 덜컥 겁이 났다. 이런. 선안이 린화를 마음에 두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선안에게 9황녀 일을 부탁한 건, 린화와 선안이 맺어지지 않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린화가 다른 사내와 혼인해서 잘 지낸단 걸 알기 때문이었고.
그런데 이렇게 되면…… 쌍방이 좋아하는 거라면 선안과 린화가 이어지지 않는단 걸 알아도 이 일은 진행하면 안 되지 않을까?
“혹시 자네도 린화에게 관심 있나?”
슬며시 떠보자 다행히 선안은 바로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린화 낭자는 좋은 사람이지. 하지만 난 친우 동생과는 이어지고 싶지 않네.”
“왜?”
집안 웃어른들이 혼담을 결정하는 입장 상, 철저하게 가문끼리 이해득실을 따져서 혼인하는 게 아니라면, 여식들은 자기 남자 형제나 사촌 형제들의 지기들, 혹은 그 지기의 형제들과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중매를 통해 상대의 인품에 대해 듣는 것보다 실제로 그 사람이 어떤지를 곁에서 보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아들들 역시 마찬가지여서, 여자 형제들의 지기나 자매들과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유별나게 조건이 좋은 상대가 없다면 또래의 남녀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연결되곤 했다.
그러니 선안의 저런 말은 흔히들 하는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안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당연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가 자네 누이와 혼인해서 자네와도 누이와도 싸우지 않고 평온하게 지내면 아주 좋겠지. 하지만 한쪽과 틀어지기라도 하면 다른 한쪽과도 틀어지지 않나. 수습할 수 있는 싸움도 더 감정에 골이 깊어질 수도 있어. 그러면 나는 아내와 친우 모두와 멀어지게 되지 않나.”
나는 감동해서 선안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나랑 멀어지고 싶지 않단 거지?”
그 말에 선안은 얼굴을 구기더니 항의하듯 탁자를 두드렸다.
“내 말을 왜곡하다니!”
거기에 웃음을 터트리자, 선안이 덩달아 따라 웃어대면서 분위기가 한창 좋아질 때였다.
문밖에서 무언가 묵직한 것이 바닥으로 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냐.”
남들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는 아닌지라 놀라서 외쳤으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선안은 벌떡 일어나더니 대번에 문가로 걸어가 미닫이문을 거칠게 열어버렸다.
뜻밖에도 문을 열자 보인 건 예전에 나한테 강탈해 간 팔찌를 두 손으로 어정쩡하게 들고 선 린화였다.
정확히 어느 시기에 강탈해 갔는지는 회귀한 후라 생각나지 않지만, 하여튼 린화가 저 팔찌를 강탈해 간 이유는 기억이 난다. 저 팔찌가 나한테 진짜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린화는 사이가 좋아진 뒤에도 저 팔찌를 내게 돌려주지 않았다. 혼인할 때도 가지고 가버렸지. 그런데 저걸 왜 들고 섰어?
“린화. 네가 왜 여기 있어?
팔찌는 왜 들고 선 거래?
내 질문에 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팔찌를 꽉 붙잡고서 나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나는 린화가 나와 선안의 대화를 엿들었다는 걸 눈치 챘다.
‘어디부터 엿들은 거야?’
당황스럽지만 선안 앞에서 엿들었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잠시 주저하는 사이. 린화는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내 책상에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세게 팔찌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빌려 간 팔찌를 돌려주러 왔어.”
강탈이 언제부터 빌려 가는 거였나.
선안 앞에서 린화의 체면을 지키느라 솔직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있자니, 의외로 선안만 오면 수줍은 규수처럼 굴던 린화가 오늘은 쌀쌀맞게 말했다.
“돌려주었으니 이만 가볼게.”
린화는 그러고는 선안 쪽을 홱 돌아보더니, 꾸벅 묵례만 가볍게 했다.
선안도 예를 갖추어서 묵례했으나 린화는 거의 그를 무시하고 나가버렸다. 역시 뭔가 들은 모양이다.
린화가 멀어지자, 선안은 어느 정도 기다리다가 외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더니 자기 하인을 노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중요한 얘기를 할 테니 문밖을 지키라 하지 않았느냐! 왜 다른 사람이 여기 들어오게 한 게야!”
내가 있는 곳에서 하인은 보이지 않았으나 다급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도련님! 낯선 여종 하나가 주위를 어슬렁거리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 그쪽을 살피는 사이 이 댁 아가씨께서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선안의 노한 목소리가 바로 뒤를 이었다.
“그걸 변명이라고 하느냐. 린화 아가씨가 일부러 몰래 우리 방에 들어오기라도 하려 했단 게냐!”
선안이 하인의 말을 못 믿어서 저렇게 말하는 게 아닐 것이다.
선안은 다만, 하인의 말대로라면 린화가 ‘실수’로 손님이 있는 내 방에 찾아온 게 아니라 고의로 찾아온 게 되니까, 린화의 체면을 위해 일부러 저렇게 화난 척해주는 거였다.
이건 린화가 우리 대화를 몰래 엿들으려 한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란 명령이기도 했다.
“너희가 다른 데 한 눈이 팔린 상태였으니 린화 아가씨는 당연히 손님이 온 줄 알지 못하지! 괜히 혼나기 싫으니 린화 아가씨를 탓하지 마라!”
한소리를 마친 선안은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날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너, 나 가고 머리카락 다 뽑히는 거 아니냐.”
* * *
선안의 염려처럼, 린화는 자신의 처소로 걸어가며 ‘선안이 돌아가고 나면 언니의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 버리리라’ 맹세했다.
“애기씨. 애기씨. 천천히 가세요. 넘어지십니다!”
월미가 다급히 린화를 쫓아가며 불렀으나, 상처받은 린화는 조금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린화는 계속 눈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사실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나무에 부딪힐 뻔한 린화를 월미가 다급히 붙잡아 구해냈다.
“애기씨. 왜 이러십니까? 괜찮으세요? 일부러 온 걸 알고 도련님이 꾸짖으시던가요?”
“어딜 요화 따위가 날 꾸짖겠어?”
“그런데 왜 우시나요? 설마 선안 공자께서 애기씨께 한소리 하진 않으셨을 거잖아요.”
린화는 입술을 깨물고서 월미를 바라보다가 참지 못하고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요요화 그 배신자가 내가 선안 오라버니를 연모하는 걸 알면서. 선안 오라버니를 9황녀 전하와 맺어주려 하고 있어.”
“예?”
월미는 놀라서 펄쩍 뛰었다.
“왜요? 아니, 그게 가능한가요? 황제 폐하나 황후 마마 사이에서 중매를 서기엔 도련님은 아직 관직이……?”
“그러니까!”
린화는 거칠게 바닥을 쾅 걷어찼다.
“나서기 쉽지 않을 텐데도 일부러 나서서 저러고 있다고! 내가 옛날부터 선안 오라버니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
“애기씨…….”
“어머니도 내가 선안 오라버니와 혼인할 수 있을 거라 했어. 둘 다 정혼자가 없고, 선씨 가문도 명문세가에다 선안 오라버니와 요화가 절친한 사이니까! 어머니도 선안 오라버니가 참 괜찮은 성품이라 하셨어. 지금은 선안 오라버니가 대과를 준비 중이라 나서지 않지만, 대과에 꼴찌로라도 급제만 해오면 선씨 가문에 매파를 보내주겠다 하셨다고! 요요화가 선씨 가문에 나에 대해 좋게 얘기해주기만 해도 혼인에 아무 문제 없는데!”
린화는 말하다 보니 더욱 화가 나서 이를 갈았다.
물론 선안이 요화에게 말하는 걸 들으니 그는 친우의 누이들과는 맺어지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어차피 혼사는 가문 어른들이 정하는 거였다. 그가 원하지 않더라도 요씨 가문에서 선씨 가문에 매파를 보내 혼담을 넣으면 선씨 가문에서는 요화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혼담을 받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요요화가 일을 이렇게 망치다니!
‘배신자!’
린화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가 선안 오라버니 좋아하는 것까지 다 말해 버리고!’
그 마음을 알면서도 선안은 9황녀와 맺어지길 원했으니, 린화는 사실상 뻥 차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모멸감에 린화는 얼굴에 열이 올라 결국 쪼그리고 앉아 울고 말았다.
‘미운 언니라도 자매는 우리 둘뿐인데. 언니가 뒤에서 저런 비열한 짓을 할 줄 몰랐어!’
* * *
선안이 돌아간 뒤.
나는 린화에게 찾아가고 싶었지만 입궐해야 할 시간이 아슬아슬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린화가 내려놓고 간 팔찌만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일어나 입궐할 준비를 했다.
선안이 기껏 9황녀 전하에 대한 일을 돕겠다고 나서주었는데. 린화가 저렇게 깽판을 치고 가니 제대로 안도할 수조차 없었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월무궁으로 가 13황자와 책상을 마주하고 앉게 되니, 당연히 평소보다 더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게다가 며칠 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제자는 내가 가진 명단을 북북 뜯고서 나더러 정숙하지 못하느니 어쩌니 해댔지 않은가.
‘젠장. 저는 정숙한가?’
……정숙하네. 아주 정숙하지. 회귀 전에도 제자는 미혼이었고 다른 여인과 염문을 뿌리지도 않았으니까.
외국 공주와 혼담이 오갈 뻔한 적이 있지만, 그 일은 결국 엎어졌고.
그 외 제자가 어떤 특별한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긴 하다.
“스승님.”
그렇게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면서 조용히 서책을 펼칠 때였다. 머리 위로 난데없이 13황자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나는 종이를 한 장 한 장 느리게 넘기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13황자가 자기 책상에 거만하게 앉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눈이 마주치자, 뜻밖에도 꿀처럼 달콤하고 포근한 비단처럼 따뜻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며칠 전에는 제자가 너무 흥분하여 스승님께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그날 일로 많이 속상하셨습니까?”
분명 제자는 온화한 모습으로 말을 거는데, 오히려 그가 저렇게 말하니 등골이 더 오싹해졌다.
와. 씨. 쟤는 좋게 말해도 무섭네. 무슨 꿍꿍이야? 무슨 꿍꿍이기에 갑자기 친한 척이야?
게다가…… 숙이고 살 때는 늘 수수하게 입었으면서. 오늘은 옷차림이 왜 저리 화사해? 때와 장소에 어울리지 않아 보일 정도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건 아니지만, 평소 거의 장식 없는 차림을 하고 다니던 데 비교하면 분명 신경 써 입은 복색이었다.
왜 저러지? 왜 평소보다 꾸미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