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어쩌다보니 삼자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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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어쩌다보니 삼자 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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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어쩌다보니 삼자 대면
2022.05.26.


“스승님?”
내가 제자의 복색을 살피고 있자니, 13황자는 입가에 조금 더 또렷한 미소를 띠고서 나를 불렀다.

“속상해서 이 제자와는 대화도 안 하려 하시는지요?”
속상하냐고 물었는데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이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의 질문을 듣자, 일순간 린화와 그의 복색에 팔렸던 정신이 번쩍 돌아왔다.
나는 얼른 눈에 힘주고서 평소와 흡사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오늘 전하께서 평소보다 더욱 출중하고 수려해 보이시니 눈길이 어지러워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고서 슬쩍 눈치를 보니 제자는 가볍게 웃는데…… 꼭 그 표정이 ‘그럴 줄 알았다’에 가까워 보였다.

‘뭐가 그럴 줄 알았단 거지?’
어리둥절해 보고 있자니, 제자는 자기 앞에 놓인 서책을 펼치며 차분하게 말했다.

“가져온 서책을 보시지요. 오늘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습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수업이나 하잔 건가?
* * *
강의가 끝난 뒤.
나는 일부러 화원 쪽으로 천천히 걸으면서 선안과 9황녀가 자연스럽게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잠겼다.
혼인할 나이가 되면 미혼인 남녀는 잘 어울리지 못한다.
하지만 일단 혼담이 오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나 스치듯 인사하고 갈 기회를 만들기도 한다.
혼인 당사자뿐만 아니라 부모들도, 자기들이 맺어준 혼사에서 아이들이 잘살 수 있을지 궁금하기 때문이었다.

‘너무 특수한 상황이란 데 몰입하지 말고. 이 일도 그런 쪽이라 생각하자.’
나는 스스로가 중매인이란 가정하에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9황녀 전하가 외출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 하지만 안 될 거야.’
허락을 받으면 외출할 수 있지만, 9황녀는 지금 단단히 황제와 황후에게 찍힌 상태였다.
친자식이니 이 일로 아예 미워하게 되진 않겠지만, 외출을 자유롭게 허가해주진 않을 거다.
그렇다면 선안을 황궁에 데려와야 하는데.

‘무슨 핑계로 데려오지?’
* * *
내가 임의로 선안을 황궁에 데려올 수는 없었다.
관직에 오르지 않은 선안을 여기로 데려오려면, 아주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의 부름을 받거나 황족들의 초대가 있어야 했다.
13황자와 내가 사이가 가까웠더라면 그에게 선안을 초대해 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13황자가 아직 구박덩이 황자라지만 그에게도 황궁은 집이니, 손님을 초대할 권한은 있으니까.
그러나 제자는 나와 그렇게 오사바사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가 혼담이 오가고 있고 9황녀가 거기에 물을 끼얹으려는 걸 알고 있으니 잘 이야기하면 도와줄 것 같기도 한데…….’
날 최고의 자리로 이끌어 준 다음 독살시킨 놈이라 그런가. 도와주더라도 후환이 있을까 두렵단 말이지.
그렇다고 9황녀 본인에게 청할 수도 없었다. 나 역시 9황녀와 독대하기 힘든데, 9황녀에게 내 친구까지 데리고 오게 해달라 할 수가 있나.
염치를 불고하고 2황자나 6황자에게 부탁하자니 그들이 내 친구를 초대한 다음 9황녀를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아! 아니지. 9황녀는 부를 필요 없어.’
자기가 올 테니까!
* * *
나는 2황자와 6황자 중 누구에게 선안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2황자에게 가기로 했다.
얼핏 보면 6황자 쪽이 더 활발하고 사람과 잘 어울리는 듯했지만, 일전에 13황자가 아프단 핑계를 대고 날 불렀을 때. 2황자가 조금 더 유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자기에게 이득 될 게 없을 텐데도.
반면 6황자는 나랑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처음인데도 벌써부터 편을 나누려는 기세를 보였다.
선안을 데리고 갔다가 선씨 가문과 요씨 가문이 자기편이라 생각해 파벌처럼 여기게 된다면 곤란했다.
그러니 2황자가 적당하다. 마침 그를 만날 좋은 핑계도 있지 않은가.

‘13황자가 날 불렀을 때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면 되겠지.’
그렇게 대화를 시작했다가, 기회를 보아서 2황자가 선안을 초대할 만한 일을 만들면 된다.

‘2황자가 궁술을 좋아했던가?’
계획을 세우자마자, 나는 지체 없이 2황자가 기거하는 우현각으로 갔다.

“13황자 전하의 이국사인 요요화라 하네. 2황자 전하를 뵙고 싶은데.”
다행히 일단 외문을 넘어가고 나자 2황자의 태감이 전에 6황자의 연회에서 날 본 적이 있는지라 바로 알아보고 웃으며 반겨주었다.

“요 대인. 2황자 전하를 뵈러 오셨습니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 왔네. 전하께서 많이 바쁘신가?”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2황자의 태감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들어오라 손짓했다.

“전하께서 들어오라 하십니다.”

“고맙네.”
방 안으로 들어가자, 2황자가 반 정도만 세공된 보석들을 탁자에 늘어놓고 있었는 게 보였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보석들이 무슨 용도인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설명해주며 웃었다.

“곧 황자비의 생일이거든. 머리 장식을 주고 싶어서.”

“황자비 전하께서 참으로 좋아하시겠군요.”

“그래 주면 좋은데.”
2황자는 흐뭇하게 보석들을 내려다보다가 앉으라 손짓하며 내게 물었다.

“그래, 요 이국사는 내게 무슨 일로 찾아왔나?”

“일전에 전하께서 소인을 도와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13황자 전하께서 몸이 아프실 때요. 2황자 전하께서 나서주신 덕분에 6황자 전하와 9황녀 전하께 눈치 보이지 않고 나설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 그 일 때문에 왔나.”
2황자가 손짓하자 한 궁녀가 옷자락 스치는 소리도 내지 않고 다가와 탁자에 차를 내려놓고 물러났다.
아아. 얼굴 보기도 힘든 우리 월무궁의 기양이랑은 전혀 다르구나.
뭐 나중에 첩자로 밝혀지는 궁녀이니 충성심이 있을 리가 없겠지만…….

“열셋째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지. 그러니 우리가 측은지심을 가지고 챙겨주어야 해. 하지만 황후마마께 적자가 없다 보니 황자들은 내색하진 않아도 서로를 은근히 견제한다네. 이 때문에 열셋째가 많이 피해를 보고 있어.”
2황자가 혀 차는 걸 보고 있자니 13황자가 회귀 전에 2황자는 죽이지 않았던 게 기억났다.
음. 그래. 죽이지는 않았지. 이런 점 때문일까?
어쨌든 잘 됐다 싶어서 나는 몇 가지 화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보다가, 2황자가 궁술에 관심이 있단 걸 확신하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나는 잘됐다 싶어서 얼른 말했다.

“제 친구 중에도 궁술을 아주 잘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화살 세 개를 쏘아 표적 하나를 동시에 맞출 정도이지요.”
살짝 과장이 들어가긴 했지만 아주 거짓은 아니었다. 성공률이 좀 낮을 뿐, 몸 상태가 좋을 땐 정말로 가능했다.
2황자는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정말인가? 누구이지?”

“선씨 가문의 자제인데, 아직 중과까지만 급제하였고 대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하셨을 겁니다. 이름은 선안입니다.”

“선씨 가문이라면 알지. 꽤 명망 있는 사대부 아닌가.”
2황자는 선안이 아직 관직에 오르지 못했다는 데도 호기심을 보이다가 내게 밝게 제안했다.

“잘됐군. 곧 날이 추워질 텐데, 겨울이 되면 밖에서 마음껏 활을 쏘기 어려워지지. 더 추워지기 전에 몇몇이 모여서 활을 쏘고 놀면 좋겠군.”

“잘됐습니다. 저야 좋지요.”
나는 활짝 웃고서 슬쩍 운을 띄어보았다.

“여럿이 모여 패를 지어 놀면 더 재밌겠습니다.”
그가 6황자를 추가로 불러오길 원하며 한 말이었다.
6황자와 나, 선안 이렇게 셋뿐일 때는 9황녀도 황후 눈치가 보여서 오기 힘들겠지만, 여기에 가족들이 몇 끼어 있으면 9황녀도 구경한다면서 자연스럽게 올 수 있으니까.
그런데 2황자는 아주 쓸데없는 배려를 하고 말았다.

“그렇군. 그러지. 아, 열셋째도 부르면 좋겠어.”
나는 차를 마시다가 사레가 걸려 기침하고 말았다.
몇 번 콜록거리다가 2황자를 보니, 2황자는 마구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나. 열셋째는 형제자매들과 어울리지 못하지 않나. 하지만 자네를 잘 따르는 모양이니, 이럴 때라도 불러야지. 몇 번 같이 어울리다 보면 다들 열셋째를 좀 더 편안하게 챙기게 될 걸세.”
아이구…… 아이구…… 아이구야.
경악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2황자는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사람이 다섯이로군. 패를 갈라 놀려면 짝수여야 하는데. 한 사람을 더 불러야 하나? 누굴 부르지?”
조마조마해서 뒷말을 기다렸으나, 2황자는 누구를 부를지 즉석에서 결정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선안을 궁궐에 부를 수 있다는 데 만족하고서 그에게 작별 인사를 올리고 나왔다.

‘2황자가 누구를 부를까? ……하긴. 누굴 부르든 상관없지. 3황자 전하만 아니면 되는데, 3황자 전하는 몸이 약해서 이런 놀이에 참여하는 일이 없잖아.’
* * *
이틀 뒤. 나는 아침 일찍 선씨 가문을 찾아가 선안이 옷 입는데 잔소리를 퍼부었다.

“너 예쁜 옷 없나? 너무 칙칙해!”

“장신구 좀 달지 그래? 너무 수수해.”

“그 색은 자네를 못 살리는 거 같아. 다른 것도 입어봐.”

“뭘 귀찮아하는 거야? 옷은 다 시비들이 입혀주는데.”

“머리를 좀 더 단정하게 묶으면 어떨까?”

“아니, 좀 흐트러진 게 나은 거 같기도 해.”
선안의 시비들은 내가 말하는 대로 선안을 치장해 주면서도 재미있는지 자기들끼리 키득키득 웃어댔다.
반면 선안은 처음에는 의욕에 차 내 지시를 따랐지만, 옷을 서른 벌째 갈아입을 때쯤 분노해 폭발하고 말았다.

“그만해! 아무리 그래도 내 얼굴이 이 이상 잘나지진 않네!”

“나랑 비교하니까 자신감이 없지. 저 옷을 입었을 때의 자네와 이 옷을 입었을 때의 자네를 비교하도록 해.”
시비들이 마구 웃어대기 시작하자, 선안은 머리를 감싸 쥐고서 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결국 다섯 번 정도 옷을 더 갈아 입어주었고, 나도 그때는 만족해서 손을 뗐다.

“좋아. 이 정도면 아주 헌앙해. 미장부가 됐어.”

이후 시간을 확인하고서 나와 선안은 얼른 입궐했다.
선안은 처음 궁궐 안쪽까지 들어오는 게 신기한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면서 날 쫓아왔다.

“참으로 넓고 아름답군. 밖에서 볼 때도 멋졌지만 내부는 더 멋진걸?”

“대과 때 와 봤지 않나.”

“그땐 변두리에만 들어왔잖나. 게다가 장소가 한정되어 있어서 구경할 수도 없었다고.”

“급제만 하게. 질릴 정도로 볼 걸세.”

“응.”

“황녀 전하와 혼인해도 질릴 정도로 볼 걸세.”
화음에선 혼인한 황자와 황녀는 첫 아이가 세 살이 될 때까지 궁궐에서 지낸다. 황제에게 손주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선안은 내가 9황녀 이야기를 꺼내자 얼굴을 붉히고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우리는 우현각에서 가장 가까운 궁술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웬걸. 나름대로 일찍 온다고 일찍 왔는데도 이미 2황자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일찍 오기로 다들 말이라도 맞추었는지 13황자와 6황자도 도착해 있었다.

“2황자 전하, 6황자 전하, 13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지각한 게 아닌데도 괜히 죄를 지은 기분에 나는 얼른 차례로 인사했다.
그러면서 슬쩍 13황자를 보니, 다행히 이 난데없는 모임을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마도.

‘표정 변화가 없으니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겠지,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믿기 힘든 소리가 들려왔다.

“3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
2황자가 초대한 마지막 손님이 3황자였어?
나는 눈을 부릅뜨고 반사적으로 제자를 쳐다보았다. 제자도 날 보며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주 선뜩한 눈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