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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먹 좀 대신 갈아 줘 (26/159)


27화. 먹 좀 대신 갈아 줘
2022.06.02.


나는 제자가 지금 농담을 하는 건가 싶어서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

6황자 역시 호기심이 이는지 화내는 것도 잊고 나와 13황자를 보고 있었다.

선안은 내게 황자와 혼담이 오간단 이야기를 들어서인가. ‘혹시? 혹시? 혹시?’ 하는 표정으로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나는 주저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13황자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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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스러워 죽을 것 같았으나, 이런 모습도 9황녀가 보면 마음을 접게 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제자는 자기가 내게 손을 내밀어 놓고서는, 내가 그 손을 잡자 흠칫했다. 설마 그냥 내밀어 본 거였나? 잡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나?

손을 내밀기에 잡았는데 상대가 더 놀라자 나는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13황자는 그 짧은 사이 평정심을 되찾은 후였다. 그는 놀란 적이 없다는 듯 원래 우리 자리로 느긋하게 걸어가기까지 했다.

2황자 무리와 거리를 둔 다음에는 바로 손을 뗐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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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친한 사이라지만 지금 스승님은 저와 한 편입니다. 저쪽에 가서 놀면 안 됩니다.”

그래도 13황자가 이렇게 말해준 덕에 내가 선안에게 한 짓거리는 친구끼리의 장난이 되어 버렸고, 6황자는 항의할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6황자는 뒤늦게 혀를 찼으나, 나와 선안이 절친한 걸 알다 보니 이제 와 따지기도 난감한지 그냥 돌아섰다.

나는 3황자의 시선을 느꼈지만, 그쪽은 일부러 쳐다보지도 않았다.

3황자와 맺어질 마음은 언감생심 이미 없다지만 그가 나를 실망한 눈으로 바라보는 걸 굳이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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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이국사가 생각보다…… 좀 치사하구나.”

요요화가 난데없는 3황자의 등장에, 비열한 역할을 완수하고도 시무룩해 하는 사이.

9황녀는 요요화의 바람대로 숨은 채 이들의 궁술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측근 궁녀 화린에게 혀를 차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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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치사해. 저기 저 헌헌한 공자가 활을 잘 쏘고 자기가 질 것 같으니 가서 아예 밀쳐 버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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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사께서 은근히 경쟁심이 강하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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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 강해도 공정하게 해야지.”

9황녀가 혀를 차며 수풀 더미에서 빠져나오자, 화린은 얼른 황녀의 옷에 묻은 이파리들을 떼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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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구경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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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차이가 너무 나. 열셋째가 조금 잘하긴 하지만 썩 잘하는 것도 아니고. 둘째 오라버니랑 요 이국사가 너무 못해. 반면 헌헌한 공자는 참으로 잘하는구나.”

9황녀는 펄럭거리는 하얀 겉옷을 입고 머리에는 긴 장식 줄을 달고서 우아한 사슴처럼 활을 쏘던 사내를 떠올리자 흥미가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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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내가 이국사의 친구라 했던가?”

9황녀는 여기 오기 전 황제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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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들이 이젠 철이 들었어. 형제끼리 친하게 지내려고 같이 궁술 놀이도 하면서 어울리나 보더라. 거기에 요요화와 이국사의 친구인 선씨 가문 적자까지 합류했다지. 젊은이들은 참 서로서로 잘 어울려.

요요화를 통해 슬쩍 언질을 받은 황제가 일부러 흘린 말이었으나, 9황녀는 설마 황제가 요요화에게 자신과의 혼담을 막으란 황명까지 내렸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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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씨 가문 적자.”

9황녀는 중얼거리고서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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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인가 알아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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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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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이국사가 생각보다 너무 치졸하지 않으냐. 안 그래도 아바마마나 어마마마나 다 이국사는 안 된다고 말리고 계시는데.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할 상대가 그렇게 치졸하면 어떡해? 회임했단 거짓말이 새어나가기라도 하면 내 체면도 상하는데.”

 

* * *

압도적으로 2황자 편에게 패배한 궁술 놀이를 하고 집에 돌아온 뒤.

나는 3황자와 나를 발길에 차이는 돌처럼 바라보던 13황자를 떠올리자 마음이 아주 갑갑해졌다.

13황자는 나와 3황자 때문에 내기에서 졌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자기도 실력을 드러내지 않았으면서.

게다가 13황자는 내기에 져서 달갑지 않은 마음을 감추고 싶지도 않은지, 6황자가 ‘모여서 다 같이 식사나 하자’는데 바쁘다고 쌩하니 가버렸다.

황자들 중 가장 한가한 13황자가 바쁘다고 하면 누가 믿기나 할까.

나는 그가 황위를 노리니 아주 하루하루가 바쁘리란 걸 알지만, 다른 황자들은 13황자가 삐져서 돌아갔다고 여겼다.

거기에 3황자가 ‘오랜만에 활을 계속 쏘았더니 숨이 차다’면서 들어가 버리자, 순식간에 인원이 넷으로 줄어 버렸다.

결국 그렇게 넷이서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다가 저녁이 될 무렵 집에 돌아왔는데…….

집에 돌아오고 나니 다시 13황자의 그 냉랭한 표정이 신경 쓰인다.

그 탓에 나는 침상에 엎드려 계속 그 일만 생각하다가 그대로 깜짝 잠들고 말았다.

그대로 새벽까지 내내 잤으니, 당연히 린화한테 가려던 계획은 엇나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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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에 린화를 찾아갈 수는 없겠지.’

결국, 시각을 확인한 다음 나는 그냥 도로 누워 잠들었다.

아침에는 늦게 일어나 급하게 입궐 준비를 하느라 역시 린화를 보러 가지 못했다.

하지만 나쁜 소식만 있진 않은 법이어서, 나는 월무궁에 가다가 황제에게 불려가 기쁜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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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주었다 요 이국사. 9황녀가 어제 짐에게 회임 이야기는 거짓말이었다며, 자기가 철이 없었다 하더구나.”

9황녀가 내 찌질한 모습을 보고 정이 떨어졌구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다.

나는 안도해서 넙죽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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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송합니다, 폐하.”

게다가 내 계획은 완전하게 다 먹혔다. 황제가 내게 일어나라 손짓하면서 선안에 대해서도 물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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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황녀가 이국사와 함께 온 선씨 가문 적자에게 관심을 보이던데. 정확히 그자가 누구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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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편 선씨 가문의 선안입니다. 지금 선 가주님의 친조카이지요. 신과는 동갑으로, 중과까지는 합격했고 대과를 준비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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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안. 선씨 가문이라. 괜찮지.”

황제가 선안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9황녀가 회임이 거짓말이란 말만 한 게 아니구나 싶다.

나와 혼인하겠다고 졸랐던 것처럼 이번에는 선안과 혼인하고 싶다고 조른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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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한 거겠지?’

그러나 일이 잘 풀리자 안도가 되는 한편, 화를 내던 린화가 생각나서 마음이 좀 착잡해진다.

젠장. 그 망아지를 어떻게 달래주지?

난 미래를 알고 있는데, 그 미래에 너는 금실 좋은 다른 사내와 혼인하고 그 사내는 선안이 아니었단 말을 하긴 어렵잖아?

* * *

황제와 독대를 마치고 월무궁으로 가는 길.

나는 이번에도 13황자가 길목에서 날 기다리는 건 아닌가 싶어 주위를 내내 살피며 걸었으나, 13황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도하기도 잠시. 홀로 걷고 있자니. 궁술 놀이 때 그가 내 손을 잡고 간 일이 떠오른다. 나는 괜히 그가 잡았던 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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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그날은 왜 그랬던 거지?’

가장 이상한 건 자기가 손을 잡자고 내밀어 놓고서 막상 내가 손을 얹으니 소스라치게 놀라던 점이었다.

대체 제자는…… 그 새끼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어.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월무궁 앞에 도착했다.

월무궁은 앞도 안도 여전히 허전하구나. 7황자에게 맞은 태감도 보이지 않고 궁녀 기양이도 보이지 않네.

나는 풀이 종아리만큼 올라온 앞뜰을 지나쳐 수업하는 방 앞으로 갔다.

월무궁의 게으른 태감은 오늘은 아예 자리까지 비워서, 나는 방 앞에 서서 직접 안에 대고 고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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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 요요화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들어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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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오시지요.”

다행히 바로 안에서 대답이 들려와서, 나는 문 앞에서 기다릴 일 없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제자는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서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내가 들어오자 책을 내리며 힐긋 날 바라보았다.

하루 동안 심신에 안정을 찾았는지 표정이 평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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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표정을 관리하는 건지 구분이 가지 않지만 나도 역시 평온한 척 꾸벅 인사를 하고 내 자리로 걸어갔다.

그러고서 자리에 앉는데. 13황자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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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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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궁술 놀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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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의 지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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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소개받고 싶으셨습니까?”

선안을? 왜? 전에 봤을 땐 그런 말 없었잖아?

13황자가 말하려는 요지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내가 떨떠름해서 13황자를 쳐다보자, 13황자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질책하는 시선 같기도 하고 호기심 어린 시선 같기도 하고?

하여튼 아리송한 시선이라 멀뚱멀뚱 같이 바라보고 있자니, 13황자가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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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누님이 찾아와 회임 이야기는 거짓말이라 하고 갔습니다. 원래도 믿지 않았지만요.”

안 믿었으면서 나한테 그 차가운 소리를 뱉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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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누님이, 스승님이 궁술 놀이에 데려온 친구가 누구인지 꼬치꼬치 캐물어 보시더군요. 저는 잘 모르는 사람이라 했더니, 어떤 사람인가 스승님께 물어봐 달라고 몇 번이나 거듭 부탁하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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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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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째 누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친구를 데려왔다고, 미리 말씀해주시면 좋았을 텐데요.”

질책……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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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자는 겁이 많아서요. 스승님께서 계속 둘째 형님, 여섯째 형님을 만나더니, 이젠 명문가 친구까지 데려가 노시는 걸 보고 이번에는 그렇게 파벌을 만드시는 건가 염려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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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께 괜한 심려를 끼쳐드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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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으셔서 더 심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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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생각을 잘못하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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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주둥이를 한 대 때렸으면 좋겠네. 13황자는 내가 그냥 예의를 차리느라 한 말에 도도하게 대답하더니, 서랍에서 수업할 책을 꺼냈다.

그 모습을 몰래 흘겨보다가 나도 내 책을 꺼냈다.

하지만 수업에 들어가기 전. 13황자가 또다시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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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형님과 있을 땐 표정을 조심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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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책을 펼치다가 쳐다보자, 13황자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벼루에 물을 부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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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셋째 형님을 보자마자 표정이 무너지시더군요. 예전에 마음을 두었든 어쨌든 스승님은 곧 저와 혼인할 몸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사내 셋이서 치정 관계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시거든 앞으로는 표정 관리에 더욱 힘써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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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말에 반사적으로 입이 떨어지자, 13황자는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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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다급히 턱을 올리고서 책으로 입가를 가리자, 13황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먹을 들어 직접 갈기 시작했다.

13황자 궁녀랑 태감은 어디 간 거야! 왜 애가 먹을 직접 갈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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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님 일이 해결되었으니 곧 우리 혼담도 다시 진행되겠군요.”

애가 제자리에서 먹만 갈고 있으니 자꾸 이상한 생각을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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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하게 되면 여기서 몇 해는 제자와 함께 지내게 되실 텐데. 마음에 드는 방이 있는지 미리 둘러보시지요. 제자는 어머니도 외가도 없으니 신방을 꾸며줄 사람이 없습니다. 미리 언질을 주시면 지금부터 조금씩 꾸며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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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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