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또 스승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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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또 스승님입니까
2022.06.23.
“……죄송해요. 지금 속이 너무 안 좋아서요. 이런 말을 하려던 건 아니에요.”
정말이다. 태어날 때부터 남장하고 살았기에 이게 불편하다거나, 남장을 풀고 싶다거나, 부모님을 원망한다거나 이런 마음이 있진 않다.
“응.”
그러나 어머니는 내 말을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재차 차근차근 말했다.
“정말이에요. 어머니를 원망하는 게 아니에요. 그저 남장을 시킨 건 부모님인데, 제게 남장을 시켜 놓고 여인과 사내 간의 평범한 관계를 따르길 바라시니까. 그게 좀 화가 났어요.”
“으응. 그래. 그래.”
어머니는 재차 대답했지만, 역시 내 말을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어머니는 그런 모습으로 머뭇거리다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프다니 쉬거라. 의원은 전하께서 불러 주셨지?”
“네.”
“그래. 어미가 죽을 들여보내라 할게.”
“감사해요.”
“그래.”
어머니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문 닫히는 소리가 나며 드디어 방 안에 침묵이 찾아왔다.
하지만 지금의 조용한 공기는 월무궁의 그 방보다 더욱 삭막하고 불편했다.
* * *
부모님과 싸울 때의 가장 큰 단점은 이겨도 죄책감이 든단 점이다.
“……못 쉬겠어.”
어머니가 보내 준 죽을 먹은 뒤. 억지로 침상에 누워 잠을 청하려 해보았지만, 어머니가 날 바라보던 시선이 떠올라서 조금도 눈을 붙이기 어려웠다.
뭐, 그렇지 않더라도 내내 월무궁에서 자다 와서 또 자려니 잠이 안 오는 거기도 하지만.
결국, 반 시진 가량을 버티다가, 나는 침상에서 일어나 의복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갔다.
‘선안에 대한 일이나 해결해야지.’
그래도 잠은 못 자도 반 시진 누워 있던 효과가 있는지, 아니면 어머니가 보내 준 죽 덕분인지 처음 집에 도착했을 때보다는 걸을 만했다.
나는 곧장 선씨 가문으로 찾아갔다.
“또 왔습니까.”
하지만 이번에도 선안이 갇힌 창고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선안의 종형인 선현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또.
“또 선안을 보러 왔군요.”
참으로 시의적절하게 잽싸게도 온 걸 보자, 나는 이 새끼의 행적이 의심스러워졌다. 혹시 내가 자기 집에 찾아오면 알리라고 하인에게 명령이라도 내려두었던 걸까?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적진에서 할 수는 없기에 나는 적당히 웃으면서 응수했다.
“네. 친구가 위험에 빠졌으니 구해야지요.”
선현은 내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나보다. “위험이요?” 하고 빈정거리더니 픽 웃고서 한심한 인간을 대하는 말투로 말했다.
“내가 분명 며칠 전 안이 아기의 얼굴까지 보여주었을 텐데요. 선안은 자신이 한 짓에 책임을 지는 겁니다. 그런데 위험이라니요. 꼭 안이가 모함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표현하는군요.”
“그럼요. 선 소가주 말이 옳습니다. 하지만 안 한 짓에 책임을 지면 안 되지요.”
내 말에 선현은 고개를 위협적으로 기울이더니 가볍게 웃으며 추방령을 내렸다.
“선안의 친우라 여겨 곱게 말하였더니 안 되겠군요. 남의 집안일에 그만 신경 쓰고 나가시지요, 요 공자.”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나갈 거라면 난 여기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집안일에 끼어드는 것 같다면 미안합니다, 소가주.”
나는 최대한 부드러워 보이도록 웃으면서 선현의 추방령을 거부했다.
“하지만 여긴 안이의 집이기도 하지요. 안이와 대화를 나누게 해 주시지요.”
내가 자기 명령에 따르지 않자 선현의 표정이 단번에 차가워졌다.
“허락받지 않고 남의 집에 머무르는 건 범죄입니다, 공자.”
선현이 이렇게 나오자, 창고 앞을 지키고 선 덩치 큰 하인 둘이 위협적으로 내 주위를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선현의 명령만 있다면 나를 들어 올려 문밖에 패대기라도 칠 모양새들이었다. 참으로 위협적이었다.
그래도 내가 나가지 않고 버티자 선현이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먼저 시비를 걸어온 건 요 이국사입니다. 요씨 가문에선 우리가 이국사를 밖으로 던져 내치더라도 이 일을 문제 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걸까. 창고 위쪽 창살 달린 작은 창문에서 선안이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괜찮으니 그만 가게!”
그 소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선현이 출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내게 미소 지었다.
“들었지요? 선안도 집안일에는 끼어들지 말라는군요. 그만 나가시지요.”
나는 나가는 대신 품 안에서 패를 하나 꺼내 선현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하. 뇌물?”
선현은 내가 돈이라도 쥐여준다고 여기는지 기막히단 투로 중얼거리면서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다. 곧 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다.
“이건……!”
선현은 대번에 패를 알아보고서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반면 선현의 하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믿을 수 없단 눈길로 계속 나를 보는 선현에게, 나는 아까의 그처럼 미소 지으며 알려주었다.
“폐하께서 선안에 대한 일을 확실하게 조사해 보고하라 친히 ‘황명’을 내리셔서요. 유감이지만 이건 더이상 집안일이 아니랍니다, 소가주.”
“!”
지나치게 깐죽거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는 그의 손에서 다시 소중한 패를 가져와 품 안에 집어넣었다.
황제가 집어던진 벼루에 이마를 맞고서 얻어낸 기회와 패이다. 이걸 얻기 위해 황제의 분노를 정통으로 들이받았는데. 절대로 그냥은 못 넘어가지!
“황명. 황명입니다, 소가주.”
일부러 속삭이듯 거듭 알려주자, 선현은 나를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 노려보다가 손을 휘저었다.
그 신호를 받은 하인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창고 문을 열어주었다.
“나와라 선안!”
선현이 거기에 대고 외치자 마침내 오랜만에 보는 친구가 거지꼴이 되어서 비틀비틀 걸어 나왔다.
“요화……!”
날 보자 감격해 달려드는 선안을 피하고서, 나는 그에게 둘이서만 얘기하자는 눈짓을 보냈다.
* * *
“아니,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갑자기 황명이라니?”
선안은 자신의 거처로 나를 데려가면서 옆에서 자꾸 불안한 듯 물어왔다.
“자네 혹시 황명을 사칭하고 그런 건 아니지? 응? 아니라고 해줘. 아니지?”
“사람을 뭘로 보고.”
“자네로 보니까 묻는 거야. 폐하가 수사를 맡겨도 자네한테 맡길 이유가 없지 않나.”
거처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선안은 냄새나는 얇은 겉옷을 벗으면서도 나를 계속 쳐다보았다.
나는 건넌방으로 간 다음, 그가 옷을 갈아입도록 긴 발을 내려 공간을 차단하며 사정을 이야기했다.
“내가 자네와 9황녀 전하가 이어지도록 힘썼으니 당연히 내게 맡기신 거지. 폐하께선 몹시 화나셨네. 하지만 이 일이 오해이길 바라고 계셔. 나는 폐하께 자네는 나와 달리 아주 정숙한 사람이라 말씀드렸고, 폐하께선 기회를 주셨네.”
“요화…….”
“그러니 똑바로 말해보게. 자네 혼담을 막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누구일 거 같나?”
“…….”
나는 선안의 가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고 선안도 아마 알아들었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선안은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종형을 공격하려다가 덩달아 가문 단위로 황제에게 벌을 받으면 그의 부모에게도 불똥이 튀니, 쉽게 입을 열기 어렵겠지.
하지만 선현이나 그의 친척 중에 범인이 있다면 그들은 불똥이 튀는 걸 감안하면서까지 선안을 싫어하고 있다. 선안도 마음을 굳게 먹고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켜야 했다.
“이봐 안이.”
“응.”
“난 이 일을 두고 목숨을 걸었네.”
“뭐?!”
선안이 갑자기 발을 걷고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나는 놀라서 녀석의 이마를 짝 때려버렸다.
“아! 뭐 하는 건가!”
나는 다시 발을 빼앗아 내리고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폐하께 자네에게 아이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 이건 사람을 잘못 보고 황녀 전하께 추천한 나의 과오라고 말씀드렸네. 그리고 내가 벌을 받겠다고 했지.”
“요화! 왜 그런 짓을!”
“난 그 애가 자네 애가 아니라고 확신하거든.”
선안의 성품 때문에 확신하는 게 아니다. 회귀 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회귀하면서 몇 가지 사건들이 알던 것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지만, 이 일은 내 회귀에 영향을 받을 일도 아니고 받을 시간도 없었다. 당연히 허위다.
선안은 침묵했다. 그래도 꿋꿋이 기다리자 잠시 뒤, 의복을 갈아입고 깨끗하게 세수까지 한 그가 발을 걷고 차분하게 방을 건너왔다.
아까와 달리 몹시 진중한 얼굴로 선안은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 주었으니 나도 숨길 수 없겠군. 실은 나와 부모님은 친가에서도 외가에서도 처지가 좀. 애매하다네.”
“처지가 애매하다니?”
“내가 전에 술 먹고 자네한테 우리 외가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했지? 어디까지 이야기했어?”
“어. 음. 글쎄.”
회귀 전에 얻은 정보이다 보니 이걸 어디부터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좋을지 모르겠다. 다행히 선안은 내가 바로 대답하지 못하자 알아서 좋게 해석하고 넘어갔다.
“하긴. 술 취해서 말했다니 횡설수설했겠지. 내 외가인 유씨 가문은 네 말대로 음지에서 활동해. 그런데 규모가 좀 커.”
거기까지는 나도 안다.
“하지만 사람은 자기에게 없는 좋은 걸 가지고 싶어지잖나. 외가는 돈과 힘, 권력을 쥐고 나니 명성을 가지고 싶어졌어. 하지만 그건 어렵지.”
“음. 그렇지. 명문가는 몇 세대에 걸쳐 이루어지니까.”
“맞아. 그래서 유씨 가문은 가장 빠른 방법을 선택했네. 적장녀에게 어마어마한 거액의 혼수를 들려서 명문 선씨 가문의 삼남과 혼인시킨 거지. 그 사이에서 태어난 게 나고.”
나는 멍하게 선안을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자네 처지가 왜 애매하단 건가?”
“선씨 가문에서는 재산 때문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혼인을 허락했지. 어머니가 가져온 혼수가 가문 전 재산보다 배로 많거든.”
“그 정도인가?”
“응. 하지만 막상 혼인을 시키고 나니, 어머니의 출신이 마땅치 않은가 봐. 그래도 조부님이 살아계실 적엔 좀 나았는데. 백부가 가주가 되면서부터는 분위기가 많이 나빠졌어.”
“선씨 가문은 그렇다 쳐도. 외가에서는 처지가 왜 애매한데?”
“외조부님은 어머니도 나도 아주 아껴 주신다네. 하지만 어머니의 형제자매들은 달라. 혼인 직후에는 괜찮았네. 하지만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사이가 틀어졌어.”
“왜?”
“다 같은 외종형제 아닌가. 그런데 나만 명문가 자제가 되어 사대부 공자들과 어울리고 자기들과 다른 길을 가는 게 싫은 거지.”
“이런.”
이쪽 집안도 개판이로구먼. 회귀 전에는 이렇게 꼼꼼한 가족 상황에 대해 듣지는 못했는데. 듣고 나니 참으로 황당하다.
선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외조부에게는 정실부인 소생은 우리 어머니뿐이거든. 나머지 형제자매는 모두 서출이지. 이 일 때문에 내 외종형제들은 외조부님이 가주 자리나 재산 상당수를 어머니와 내게 물려주는 건 아닐까 염려하고 있어.”
“이야. 이거 참.”
X나 꼬였네. 그래도 친구의 집안일이다 보니, 차마 험한 말을 하지 못하고 나는 탄식만 계속 뱉었다.
“가문 어른들이 모든 걸 갖춘 손주를 만들려다가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는 손주를 만들어 버렸군.”
내가 중얼거리는 말에 선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지.”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다가 머리가 아파서 쪼그려 앉으며 욕을 뱉었다.
“젠장.”
“왜 그래? 어디 아픈가?”
“난 범인이 선씨 가문 사람일 거라 생각했네. 예를 들어 자네 종형제인 선현 같은 사람. 그런데 자네 말을 듣고 보니 의심 가는 사람이 하나둘이 아니잖아?”
선안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렇지.”
선안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린화가 날 볼 때마다 이를 내밀고서 으르렁거리는 건 약과란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린화가 갑자기 예쁜 동생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러면…… 음. 솔직히 선씨 가문과 유씨 가문 둘 다 의심스럽지만. 일단 유씨 가문부터 조사해보고 오겠네. 선씨 가문에 대한 조사는 자네가 해 줄 수 있겠나? 내가 가면 자네가 또 창고에 갇힐까?”
“자네가 폐하께서 주신 패를 보였으니 또 가두진 않을 거야. 증거가 있다면 그것부터 없애려 하겠지. 하지만 내가 조사를 하진 못할 거야. 옆에 종형네 하인을 붙이던가 해서 아무것도 못 하게 막겠지. 차라리 나도 자네랑 같이 가겠네.”
선안이랑 같이? 나는 잠시 생각해보다가 거절했다.
“아냐, 자네는 여기 있는 게 낫겠어. 유씨 가문은 자네랑 내가 친구인 걸 가주님 외엔 모르잖아. 그런데 자네랑 같이 가면 친구인 걸 알 거 아냐. 범인이 그쪽에 있다가 조치를 취하면 어떡해?”
“어디 갈 건데?”
* * *
천금수화.
내가 조사를 위해 찾아온 곳은 전에 선안과 함께 유 가주를 만난 그 화려한 도박장이다. 혼자 오고 싶은 곳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렇다고 유씨 가문에 찾아갈 수는 없으니까.
‘유 가주를 만나려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하지?’
나는 소매 안쪽으로 선안이 유 가주를 만날 때 쓰라며 챙겨준 패를 만지작거리며, 두 번째 와도 익숙하지 않은 도박장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만만해 보였을까.
“귀여운 도련님이네. 혼자 왔어?”
난데없이 호객 중이던 한 점원이 내 쪽으로 와서는 팔 한쪽을 잡고서 어느 놀이판 쪽으로 끌어당겼다.
“저쪽 가서 놀아봐봐. 초보자가 놀기엔 가장 쉽고 판돈도 낮아. 게다가 재밌어.”
“아니요. 됐어요.”
“놀러 온 거잖아. 괜히 큰돈 걸고 어려운 놀이 하다가 돈 잃지 말고. 저거부터 해봐.”
“아니요. 저 놀러 온 거 아니고-.”
그런데 점원에게서 팔을 빼내려 끙끙거리며 유 가주에 관해 물어보려 할 때였다.
“스승님.”
나지막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 점원의 어깨를 잡고 밀어내 내 팔을 빼냈다.
누군가라곤 했지만 날 스승님이라 부를 인간은 하나뿐이었다.
‘또 너냐!’
“또 스승님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