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제자가 보는 스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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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제자가 보는 스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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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제자가 보는 스승은
2022.06.27.
몸을 돌리자 역시나. 제자가 내 뒤에 우뚝 서 있었다.
제자는 궁전 안에서보다는 좀 더 화려한 의복이었는데, 이 장소 자체가 워낙 화려하다 보니 요란해 보이진 않았다.
제자의 적당히 화려한 차림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이곳 분위기와 어우러져서, 수려한 얼굴인 그를 그나마 눈에 띄지 않게 막아 주었다.
‘혹시 이런 것까지 계산하고서 저런 차림으로 온 건가?’
“전, 제자님.”
반사적으로 ‘전하’라고 부를 뻔했으나 다행히 실수하기 전, 나는 얼른 호칭을 바꾸고 꾸벅 인사했다.
“인사 올립니다. 이런 곳에서 또 뵈니 반갑네요.”
인사를 하고 나자, 뒤늦게 제자의 뒤에 선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제자랑 겹쳐 선 사람이라 여겨서 의식하지 않았는데. 자세히 보니 저 사람도 아는 얼굴이었다.
‘유동백이다.’
회귀 전 제자의 측근 중 하나였다. 억지로 제자와 같은 파벌에 있던 나와도 알고 지내온 작자이고.
유 가주, 태감 운귀, 어의 초감에 이어 유동백까지. 역시 제자는 회귀 전 자신이 아끼던 측근들을 다시 모으고 있는 게 맞나 보다.
그때 측근들을 또다시 모으고 있다는 건…… 제자는 이번에도 황제가 될 생각인가.
하긴. 날 독살한 후 신이 나서 황제 생활을 해야 하는데, 나랑 같이 회귀해 버렸으니 억울하겠지. 이번에야말로 못해 본 황제 생활을 해보고 싶겠지.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자니 제자가 물었다.
“여기는 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이번에도 은신처?”
내가 은신처 구하는 건 비밀 중의 비밀인데. 저놈이 아주 온갖 데 다 소문내는구나. 아주 공문까지 작성해서 뿌리지 그러냐.
“도박장에 도박하러 오지 뭐 하러 오겠습니까.”
나는 일부러 딱 잘라서 선을 그었다. 제자가 자기 측근과 도박장에 와 있는 상황에서 내 친구가 처한 상황을 안줏거리로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 순간. 뜻밖에도 유동백이 선안의 이름을 먼저 거론했다.
“선안의 일로 가주님을 만나러 온 게 아닐까요?”
“유 가주?”
제자가 유동백을 따라 중얼거리는 그 순간, 나는 유동백의 외형이 선안과 비슷한 점이 있단 걸 알아차렸다.
전에는 분위기가 워낙 달라서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유동백과 선안의 얼굴 생김새가 좀 비슷했다.
게다가 유동백…… 유씨…… 선안의 외가가 유씨인데. 혹시 유동백이 선안의 외가 쪽 친척일 수도 있나? 아닌가. 내가 너무 비약해서 생각하는 건가?
“그러고보니 자네도 유 가주의 손자였지.”
차오르는 의문에 대신 답해주듯 제자가 말했다.
“그렇지요.”
유동백은 비밀도 아니라는 듯 조용히 대답했다. 그러고는 아예 내게 대놓고 자기 소개하며 인사까지 했다.
“선안의 외형인 유동백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충격 받았다. 진짜로 유동백이 선안의 외사촌이었다고?
이건 회귀 전에도 몰랐던 일이었다. 회귀 전에도 선안과 친했고 유동백과도 어쩔 수 없이 친분을 유지했지만 두 사람이 사촌지간이란 건 몰랐다. 둘 다 각기 다른 인맥이었으니까.
충격받아 잠시 멍해진 귀로, 유동백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안의 아이를 낳았단 여자가 나타나서 혼란이 벌어지고 9황녀와의 혼담도 물 건너가게 되었다지요. 주군의 스승님은 그 일로 제 조부를 보러 온 모양입니다.”
나는 유동백이 하는 말에 몇 번이나 놀랐다.
유동백이 이미 선안의 아이에 관한 사건을 알고 있다는 데 한 번, 13황자를 벌써 주군이라 부르는 데 한 번, 내가 누군지 아는 데 한 번, 내가 선안을 위해 달려왔단 걸 아는 데 또 한 번.
내게 초심자용 놀이를 추천하러 왔던 점원은 이미 분위기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달아난 지 오래였다.
‘하긴. 유동백은 제자의 정보원이었지. 온갖 정보를 제자에게 가져다 바치는 이였으니 저런 것들을 알 만도 해.’
나는 유동백과 13황자를 번갈아 보다가 가까스로 놀란 마음을 누르고 표정을 관리했다. 하지만 놀란 마음을 누르자마자 이번에는 유동백이 의심스러워졌다.
‘선안의 가짜 아기를 만들어낸 게 혹시 저자 아냐?’
그럴 능력도 있고 동기도 있는 사람 같은데…….
그 순간. 13황자에게 선안의 아이 사건에 대해 들려주던 유동백이 시선을 느꼈는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소인을 빤히 바라보십니까?”
유동백은 나보다 열한 살인가 열두 살인가 많은 인물이었다. 이 때문인지 내게 공손하게 말을 거는데도 눈빛은 훨씬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했다.
나는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실은 유동백을 떠보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앞에 제자가 있으니 그럴 수 없었다. 제자는 유동백을 아끼니까. 내가 그를 의심하는 기색을 보이면 제자가 나서려 할지도 모른다.
“선안과 사촌이라기에…… 신기해서 보았습니다. 전혀 다르게 생겨서요.”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서 일부러 제자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들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얼른 유 가주부터 찾자. 선안의 말에 따르면 유 가주는 선안을 아주 아낀다니 유동백이 이 일과 관련이 있더라도 나서서 도와줄 거야.’
“그럼, 제자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자마자 얼른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서는 내 양어깨를 뜻밖에도 제자가 커다란 손으로 붙들었다.
“제자와 이야기 좀 하시지요.”
“예? 지금요?”
“지금요.”
* * *
아니, 이 제자가 자기 측근이랑 있다가 왜 난데없이 나와 이야기 하자는 거지?
나는 제자와 할 얘기가 단 하나도 없었지만, 거부하지 못하고 그가 이끄는 대로 근처의 빈방에 들어갔다.
방 안에 들어가자, 술주정뱅이를 위한 넓고 거대한 의자가 보였다. 제자는 그 의자에 걸터앉으면서 내게 물었다.
“정말로 스승님의 친구 때문에 여기에 오셨습니까?”
나는 아까처럼 거짓말했다.
“도박하러 왔다니까요.”
제자와 선안 사이에는 악연이 없지만, 유동백이 선안을 미워한다면 제자가 그걸 도우려 할 수도 있다. 선안에 대한 일을 제자에게 다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자는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믿지 않습니다. 스승님은 도박에 재주도 흥미도 없는 분인데, 도박장에 그냥 놀러 올 이유가 없지요. 선안 그자 때문에 온 겁니다. 그렇지요?”
안 믿는다면서 왜 나한테 그걸 굳이 또 물어보는데? 나는 황당해서 제자를 쳐다보다가, 결국 제자가 원하는 대로 말해주었다.
“네, 맞습니다.”
그러자 제자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구기더니, 방금 자기가 한 말을 즉석에서 부정했다.
“하지만 스승님은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나설 분이 아니신데요.”
아 뭐 어쩌란 거야? 나는 더욱 황당해서 제자를 쳐다보았다. 제자는 이제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긴. 선안은 스승님이 9황녀와 이어준 사람이지요. 이번 사건이 정말 선안의 일이란 게 밝혀진다면 스승님도 입장이 난처해질 겁니다. 그렇지요? 스승님은 폐하와 황후마마께 단단히 밉보일 테니 앞날이 밝지 못하겠지요.”
저주 퍼붓는 건가? 제자는 혼잣말인지 뭔지 모를 그럴 말을 계속하다가, 마침내는 혼자 결론까지 내고서 말했다.
“스승님이 선안을 도우려는 건 스승님의 앞날을 위해서겠군요. ……그렇다면 이상할 게 없지요.”
뭐라는 거야? 제자의 말은 정말 이상하게 들렸다. 제자는 내가 선안을 의리로 도울 리가 없다고, 철저하게 부정하기 위해 온갖 이유를 추측하는 듯했다.
그러다 제자는 마침내 납득이 갔는지 좀 속이 후련해진 얼굴로 내게 물었다.
“그런데 스승님은 진짜로 선안이 이 일에 아무 죄가 없다고 믿으십니까? 아니면 그 아이가 선안의 아이가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구하시려는 겁니까?”
“당연히 친구를 믿습니다. 왜 이런 걸 묻는진 모르겠지만요.”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서 문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만 나가봐도 될까? 제자가 대체 날 왜 이런 빈방까지 부른 건지 이유를 모르겠고 시간만 아까워지고 있는데?
이쯤 되니 제자가 날 붙잡아 놓은 사이에, 유동백이 유 가주를 찾아가서 선안을 도와주지 말라고 선수 치기로 한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때. 제자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스승님이 곤경에 처하는 건 이 제자에게도 좋지 못한 일입니다. 이 제자가 스승님을 도울 수 있습니다. 도와드릴까요?”
……평소에도 자주 그랬지만, 이번에도 제자가 말하고 생각하는 흐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처음에는 내가 선의로 친구를 도울 리 없다고 부정하더니. 이번에는 왜 날 돕겠단 거야?
나는 황당해서 제자를 쳐다보았으나, 제자는 태연히 날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이쯤 되자 나는 대체 제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제자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서 날 돕겠단 거예요?’라고 물어볼 수가 없기에, 그냥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제자님. 저는 아까 제자님과 함께 있던 선안의 사촌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님이 절 도울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돌아서는데, 제자가 뒤에서 의외의 말을 던졌다.
“유동백이 한 짓은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다시 돌아보았다. 제자는 긴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스승님 친구에게 이미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유동백은 선안을 싫어합니다. 하지만 선안이 부황의 부마가 되는 건 유동백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황제의 부마는 이런 계통 후계자는 절대로 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로서는 방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
“선씨 가문을 의심해보십시오.”
제자의 말은 그럴듯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말을 듣자마자 귀가 대번에 솔깃해졌다.
하지만 말하는 게 제자이다 보니 의심스러웠다. 나는 바로 대꾸하지 못하고서 경계한 채 제자를 쳐다보았다.
웃긴 건 제자 역시 자기가 제안해 놓고서, 나를 경계하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단 점이었다.
정말…… 정말 궁금하네. 쟤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 *
스승이 짐짓 정중해 보이는 인사를 한 뒤 방 밖으로 나가자,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던 방 안이 순식간에 공허해졌다.
넓은 방에 홀로 남은 화려는 닫힌 문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요요화. 나의 스승.’
수없이 거듭되는 죽음 속에서, 화려가 스승에 대해 내린 결론은 단 하나였다.
내 스승은 믿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로가 원치 않은 사제 간이 된 뒤, 그는 저 어린 스승과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왔다. 정말로 지긋지긋할 정도로 오래.
화려는 자신이 스승 본인보다 더 스승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정보를 토대로, 화려는 바로 직전의 회귀에서 스승을 완벽히 통제하는 데 성공해 드디어 그녀에게 배신당하지 않았다.
51번째의 삶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걸 보면서도, 화려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그는 오랜 삶을 반복하면서, 삶은 생각보다 변수가 많다는 걸 깨달았다. 50번의 삶은 단 한 번도 동일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스승이 이전 삶들과 다른 행보를 보였으나, 화려는 크게 놀라진 않았다. 어떤 식으로 삶이 나아가든, 이미 스승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으니 이번에도 스승을 통제할 수 있다고 여겼다.
스승의 배신은 어차피 정해진 일이다. 스승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를 혐오하고 있으니 언제든 돌아설 것이다. 이 두 가지 사안을 염두에 두고 있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저 배신의 화신 같은 인물이 친구를 구하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도박장을 돌아다닌다고? 저 배신자 중의 배신자가?
‘……스승님. 이번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