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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황후의 자충수 (37/159)


38화. 황후의 자충수
2022.07.11.


내 표정을 본 3황자는 난감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이런.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야 전에 봤으니까?”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3황자가 씁쓸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말게. 오랫동안 함구해온 일이고, 앞으로도 나는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할 생각이 없거든.”

“전하…….”

“그건 우리 둘만의 추억이니까.”

장난스럽게 웃은 3황자는 그러다 내 이마를 보더니 눈이 커다래져서 물었다.


“이마는 왜 그런가?”

벼루에 맞은 부위는 머리카락으로 덮어두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알아차리기 어렵다. 하지만 3황자는 눈썰미가 좋았다.

내가 얼른 그 부분을 손으로 가렸으나 3황자는 이미 상처인 걸 확인했는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디 넘어졌나?”

“아닙니다. 저기. 네.”

억울하다 억울해. 벼루에 맞은 건데 넘어졌다고 말해야 한다니. 내가 덜렁대는 사람 같잖아. 3황자의 앞에선 진중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데.


“안색이 창백한데.”

“괜찮습니다. 잠깐 피로해서 그래요.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께서 염려해주시니 너무 황공합니다. 전하가 알아봐 주시니 이제 힘이 나는 거 같아요. 전하가 목소리가 좋으셔서 그런가 봐요.”

나는 침착하게 대답하고서 얼른 균형을 잡고 섰다. 3황자 앞에서 비실비실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까스로 회귀 전 3황자에 대한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가 날 걱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나도 모르게 또 휩쓸리고 말 거다.

나는 이제 3황자를 사모하지 않는 요요화니까. 절대로 그러지 않을 거다.


“집으로 돌아가는가?”

“아니요. 월무궁에 갑니다. 13황자 전하를 공부시켜야 하거든요.”

“그럼 바래다주겠네. 쓰러질 거 같군.”

하지만 3황자가 그 말을 하는 순간. 가까스로 다리에 준 힘이 풀렸다. 너무 놀라서 나는 바보 같은 반응을 보이고 말았다.

멍하게 쳐다보자 3황자가 걱정스럽게 자기 이마를 살짝 문질렀다.


“머리. 많이 다친 거 같아서. 혹시라도 가다가 쓰러지면 안 되지 않나.”

“그, 그래도 전하께서 절 바래, 바래다주신다고요? 전하께서요? 그럼 저는 숨을 못 쉬는데요. 하지만 저기, 저, 저는 괜찮은데요. 괜찮습니다.”

다급히 말해도 3황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나는 3황자와 함께 월무궁으로 걸어가게 되었다.

혹시 그가 날 부축해주겠다고 할까 봐 조금 기대했으나, 3황자는 그러진 않았다.


‘저러니까 날 몰라본다고 생각했지.’

하긴. 3황자는 원래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따뜻한 성품이지.

내가 여인인 걸 모르더라도, 어린 시절에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3황자는 쓰러진 이국사를 보면 누구에게나 이렇게 대해주었을 것이다.

3황자를 따라 조심조심 걷고 있자니 그가 잠깐 베푼 친절에 바보처럼 굴었던 자신이 떠올라 속이 쓰리고 수치스러워졌다.

이제 3황자에게 마음을 다 접었는데. 왜 그렇게 바보같이 굴었을까.

그 생각을 하자마자 나는 월무궁에 다 다르기 전. 멈춰서서 3황자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바래다주시면 됩니다. 이제부턴 혼자 가겠습니다.”

“아직 더 걸어가야 할 텐데.”

3황자는 염려하듯 말했으나 나는 얼른 고개를 젓고서 아까 그가 한 말을 핑계로 삼았다.


“말뿐이지만 13황자 전하와 혼담이 오가고 있으니까요.”

3황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리하게.”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3황자는 인사를 하고서 둘이 걸어온 길을 홀로 걸어갔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가 태감 하나 데리고 있지 않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뭘 어떻게 해줄 수 있을까. 그가 길을 가다가 넘어질까 봐 뒤에서 보이지 않게 될 동안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한참을 그 뒷모습을 바라본 뒤에야 나는 힘없이 돌아섰고, 월무궁 정문 앞에 서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제자를 발견했다.


“!”

언제부터 저기 있던 거지? 어디부터 본 거야?

제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부터 심장이 요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까 황제에게 린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큼 떨리고 있었다.

3황자와 헤어질 때 제자가 저기 있었던가?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3황자가 참으로 잘생겼단 것 외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니, 진정해 진정해. 어쩌면 제자는 내가 혼자 멀뚱히 서 있으니까 뭐 하나 싶어서 지켜보고 있던 걸지도 몰라. 나는 오랫동안 3황자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잖아?

그래. 제자는 내가 3황자랑 여기까지 온 걸 못 봤을 거야. 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서 나는 주춤주춤 제자 앞으로 걸어갔다.


‘봤어! 확실하게 봤어!’

그러나 제자의 눈빛을 보자마자 가까스로 가라앉힌 마음이 또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자의 눈은 한겨울 칼바람 같았다. 제자는 내가 3황자와 있던 걸 확실하게 본 게 틀림없었다.

원래도 제자는 수시로 3황자 이야기를 하며 빈정거렸다. 그런데 내가 3황자와 나란히 걸어오는 걸 대놓고 보았으니, 그가 또 얼마나 빈정거릴지.


‘하지만 제자는 아직 내가 여인이란 걸 모르니까 크게 문제 삼진 않을 거야…… 아마도.’

자꾸 올라오는 불안한 생각을 꾹 누르고서, 나는 제자에게 친절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13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날이 점점 추워지는데 나와 계셨군요.”

“제자는 가벼운 사람을 싫어한다고 몇 번이나 거듭 말씀드렸을 텐데요.”

“!”

화났잖아! 이미 화나 있잖아! 애써 진정시킨 마음이 제자의 말 한마디에 뒤엎어졌다.

제자는 멍해진 나를 일말의 감정조차 없어 보이는 눈으로 내려보다가 휙 몸을 돌리며 말했다.


“몇 번을 말해도 들으시질 않으니. 오늘은 스승님의 얼굴을 보기 싫군요. 돌아가시지요.”

미움을 사지 않으려 했는데 또 미움을 사게 생겼어! 죽음으로 향하는 빠른 길이 뚫려버린 것만 같아서, 나는 다급히 제자에게 뛰어가며 말했다.


“전하. 오해십니다. 저는 3황자 전하와 그냥 우연히 마주쳐서 같이 걸어온, 제가 여기 이마, 이마 아파서요. 3황자 전하께서 데려다주신 것뿐입니다. 가볍고 무겁고 할 거 하나도 없었어요.”

“돌아가세요.”

“하지만 며칠째 수업도 하지 못하였는걸요. 전하, 화 푸세요. 네? 그냥 같이 온 것뿐이고-.”

제자를 따라 정문을 넘어가려 했으나, 그의 긴 팔이 내 앞을 정통으로 가로막았다.

멈춰서서 바라보자 제자가 다시 한번 딱 잘라 말했다.


“돌아가세요.”

그러고서 보내는 시선은 평소 날 바라볼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냉정했다.


“전하…….”

체면 불고하고 힘없이 그를 불러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제자는 내가 자기를 가여운 척 부르자 더욱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아예 내 면전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쾅 소리가 나며 거대한 문짝이 단호하게 월무궁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아 버렸다.

우두커니 선 커다란 문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나는 결국 힘없이 돌아서야 했다.


‘어쩌지. 또 미움을 사게 생겼어…….’

 

* * *

신화려가 요요화의 수업을 거부한 건 사실 처음이 아니었다.

첫 번째 삶을 살 때. 그는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스승을 당혹스럽게 여기면서도 수업은 열심히 들었다.

나이가 어리다 해도 요요화는 높은 성적으로 급제한 인재였다. 듣기로는 요요화의 학당 또래 중 요요화가 최초로 급제하였다고 했다.

신화려는 요요화에게서 많은 걸 배우려 노력했다.

두 번째 삶에서는 요요화의 수업을 거부했다.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하던 스승에게 최초로 배신당한 직후 그의 증오심과 혐오감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았다.

신화려는 요요화를 온 힘을 다해 무시했고, 이 수업 거부는 여섯 번째 삶까지 계속되었다.

일곱 번째 삶부터 그는 반복되는 시간에 조금 지루해져서 다시 요요화의 수업을 다시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는 요요화의 수업을 비교적 잘 들어왔다. 매번 질리지도 않고 자신을 배신해대는 스승을 분석하고 파악해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오늘은 요요화의 얼굴을 침착하게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멍청한 스승이라도 오늘 자신을 보면 무언가 이상하단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신화려는 태감과 궁녀가 방치해둔 뒤뜰로 걸어가 낡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찬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거의 일각 가까이 우두커니 서서 3황자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스승을 눈에서 지워내려 노력했다.

그러나 잘되지 않았다.

열다섯 번째의 삶에서 신화려는 ‘또다시’ 자신을 배신한 스승에게 물었다.


-스승님. 왜 절 죽이려 하십니까? 스승님은 언제나 제 스승일 거라고, 미워도 스승님의 제자는 저뿐일 거라고 하셨잖습니까.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열네 번의 죽음 동안 스승은 독주를 건네는 이유에 대해 대답해준 적이 없었다.

그는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 시기의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기막힘이 더 컸다.

하지만 관계 개선에 힘써본 탓인가. 열다섯 번째의 배신 때 스승은 최초로 그에게 이유 비슷한 말을 했다.


-전하가 죽어야…… 그분이 삽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물론 열여섯 번째의 죽음 앞에선 전혀 다른 이유를 말했으니, 그게 진짜였는지, 아니면 열다섯 번째 독살 시도와 열여섯 번째 독살 시도의 이유가 제각각이었는지는 신화려도 알 수 없다.

하지만 3황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요요화의 모습은 그의 좋지 못한 기억을 헤집었다.


‘날 보며 웃어도 믿어선 안 된다. 사모한단 속삭임에 넘어가지 마라. 그 사람은 똑같다. 변하지 않아. 스승님은…… 이번에도 날 배신한다. 매번 그리했듯이.’

 

* * *



“그게 무슨 소리냐. 폐하께서 13황자를 누구와 짝지어주려 해?!”

날카로운 호통이 황후의 침궁 안을 매섭게 후려쳤다. 황후의 측근 궁인들은 허리를 최대한 숙이고서 황후의 분노에 휩쓸리지 않으려 애썼다. 황후는 찻잔을 움켜잡고서 헛웃음을 뱉었다.


“하. 미치겠군.”

조금 전, 황제 곁에서 일하는 그녀의 사람 하나가 찾아와 황제가 요요화에게 제안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요화의 누이동생을 13황자와 혼인시키고, 요요화는 관직에 남아 황제의 측근이 되라는 제안이었다.

황후는 주먹으로 탁자를 쾅 내려쳤다.


“절대로 안 될 일이지!”

요요화와 13황자를 혼인시키려는 건, 이후에 요요화가 남장을 풀더라도 오랫동안 남장한 세월이 기니 대신들의 반발이 클 거고, 이로 인해 황태자비가 되지 못할 거란 계산 때문이었다.

요요화는 약점이 되어 13황자의 발목을 잡을 거였다.

그런데 요씨 가문의 적차녀가 13황자와 혼인한다면 그녀의 계책은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요씨 가문 적녀를 아내로 얻은 13황자는, 황후가 굳건한 황자들을 다 쳐냈을 때 황태자 자리를 어부지리로 얻어갈 것이다.

요요화는 요요화대로 황제의 측근이 되어 자신의 가문에 도움이 될 터. 13황자에게 세력을 두 개나 붙여주는 셈이니, 이렇게 되면 요씨 가문을 13황자와 붙이려 한 그녀의 계책은 자충수가 되어버렸다.


“절대로 안 돼.”

황후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를 설득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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