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천생연분일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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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천생연분일 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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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천생연분일 리가
2022.07.28.
황후가 입단속을 시켰는지 황제가 입단속을 시켰는진 모르겠지만, 소문은 궁궐 밖을 넘어가진 못한 모양이다.
그로부터 이틀 동안 나는 집 안에서 머무르며 머리 치료에만 힘썼는데, 린화는 여전히 자신과 13황자의 혼담이 계속될 거라 여기는 눈치였고 이는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틀 뒤 입궐해서 보니 궁인들 역시 내 쪽을 거의 쳐다보지 않았다.
몇몇이 쳐다보려 시도하기도 했으나 그럴 때면 옆에 있던 궁인이 옆구리를 세게 치는 거로 보아, 역시 입단속을 강하게 한 모양이다.
안도하며 걸어가기를 일각 정도. 나는 이번에도 월무궁 초입에서 황제의 측근 태감에게 잡혀 황제와 독대하러 가게 되었다.
‘젠장. 폐하가 부를 때마다 꼭 일이 생기는데.’
그리고 역시나. 좀 언짢은 얼굴로 날 부른 황제는 이번에도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아쉽게 되었구나, 요요화. 네 동생과 13황자의 혼담이 진행된다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을 텐데.”
황제가 날 곤혹스럽게 만드는 데는 딱 한 마디면 충분했다.
여기서 내가 ‘그러네요 아쉽네요’라고 했다가 황제가 진짜 아쉽다는 줄 알고 다시 나를 자기 측근으로 부르려 하면?
내가 린화와 13황자의 혼담에 펄쩍 뛴 건 황제의 측근이 되기 싫어서였다. 린화와 13황자의 혼담이 엎어져도 황제가 나를 자기 측근으로 부르려 든다면 아무 소용 없었다.
그렇다고 황제가 언짢아하는데 ‘전 좋네요, 감사합니다’라고 하면? 황제에게 노여움을 사겠지.
황제가 13황자에게 폐위될 운명이긴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직 몇 해가 남아 있다. 그동안은 납작 엎드린 채 황제에게도 미움을 사서는 안 된다.
즉, 황제의 저 말에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할 수도 없어. 그러면 황제 말을 무시하는 게 될 테니까.
‘아. 황실 인간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다 제멋대로일까.’
그때. 대답을 궁리하며 머리를 빠르게 굴리는데, 황제의 책상에 놓인 거대한 족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에 왔을 때는 못 본 족자였는데, 다른 족자 그림들과 달리 형태가 뭉뚱뭉뚱한 것이 참으로 독특한 모양새였다.
그걸 보자마자 나는 머리에 번뜩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저 이야기를 하면 되겠다!’
내 기억이 맞다면 황제는 지금 저 족자에 대한 일로 아주 골머리를 앓고 있을 테니까. 내가 저 이야기를 꺼내면 화제가 그쪽으로 넘어갈 거야.
우리 화음은 거대한 섬 하나를 통째로 차지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리고 화음의 인근에는 우리 화음만큼 거대한 섬이 두 개 있고, 중소규모의 섬이 여덟 개가 있다.
그런데 거대한 섬 하나와 중소규모 여덟 개 섬은 화음처럼 단일국가지만, 거대한 섬 하나는 두 개 나라가 동서로 나뉘어 통치 중이었다.
이 나라가 태월과 운월인데, 경쟁하며 발전하다 보니 두 나라 모두 부강했다. 화음에서는 당연히 두 나라 모두와 적당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써왔다.
그런데 회귀 전 어느 시기에, 황제는 태월과 운월이 크게 싸웠을 때 태월을 편들었다. 저 족자는 그 직후 운월에서 보내온 것으로, 당연히 좋은 뜻일 리가 없다.
하지만 무척 애매모호한 그림이라 뜻이 명확하지 않다 보니, 황제는 대신들에게 그림의 속뜻이 무엇인가 알아보라 지시했다.
아무도 쉽게 대답하지 못하던 중, 황후의 부친인 행부의 격일사(행부의 최고 관직)가 여기에 그럴듯한 답을 내고, 그 일로 황제는 크게 기뻐한다.
황제는 운월에 서신을 보내면서 그 해석을 적어 보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고, 그 일로 화음은 한 차례 망신을 당했다. 물론 당시 나는 뒷방 황자의 스승일 뿐이라 그 일에 대해 주워듣기만 했지 족자를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때 들은 족자의 형태가 지금 황제 책상의 족자와 똑같았다.
아직 황제가 족자를 해석하란 말을 대신들에게 돌리지 않았으니, 지금 시기는 막 족자가 도착해서 황제가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겠지.
그렇다면 아직 격일사가 엉터리 해석을 하기 전일 테고. 하면 내가 이 족자의 진짜 뜻을 알려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면 화음이 비웃음당할 일도 없고, 내가 격일사와 비교해 너무 눈에 띄지도 않을 거고, 황제도 족자에 대한 일에 정신이 팔려서 굳이 이 사안에 대한 내 감상을 캐묻지 않을 것이다.
“화음의 지도로군요.”
“뭐라?”
“그 족자요. 화음 지도를 희한한 모양으로 그렸습니다, 폐하. 신기하네요.”
“격일사 말로는 이건 딱따구리라던데.”
“!”
하지만 황제는 이미 격일사에게 엉터리 해석을 들은 후였다.
“딱따구리의 특성을 이용해 우리가 태월을 편든 행위를 조롱하기 위해 운월에서 보낸 그림이라더군.”
아이고…… 이번 생에도 폐하는 운월에 한 번 망신을 당하시겠군.
회귀 전 소문으로 듣기론 ‘황제가 대신들에게 족자 해석을 맡겼다’던데. 아무래도 이 지시 자체가 공개적인 게 아니었나 보다. 관련한 이야기가 들어온 게 없는데 이미 격일사가 해석을 하고 갔다니.
그러나 어쩌겠는가. 말단 이국사인 내가 행부 최고 관직의 해석에 지금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아 그런가요? 그러면 격일사 말씀이 옳겠지요. 다시 보니 딱따구리 같기도 합니다.”
나는 바로 수긍했다. 다행히 황제 역시 골치 아픈 족자 이야기가 오가자, 나와 13황자의 혼담 같은 사소한 일에는 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듯 손을 내저어 나가라 지시했다.
됐어. 이 정도면 됐어. 나는 안도해서 얼른 인사를 올리고 빠르게 황제의 서재를 빠져나왔다.
* * *
다행히 나와 제자의 혼담은 계속 진행되기 시작했다.
다음날. 송 태감은 우리 가문에 찾아와 사주단자를 받아 갔다.
다른 대갓집들은 요란하고 떠들썩하게 사주단자를 주고받지만, 송 태감은 몇몇 태감들만 데리고 조용히 찾아왔다.
아마 혼인하기까지의 모든 절차가 이런 식으로 쉬쉬하며 진행되겠지. 내가 회임한 후 남장을 벗기 전에는 말이다. 물론 내가 회임하는 것보다 도주하는 게 더 먼저겠지만.
그러나 부모님은 신부가 자꾸 바뀌어대는 바람에, 사주단자를 가지러 온 행렬이 소박하다 못해 단출한 데까지는 신경 쓸 겨를도 없으셨다.
“요화의 사주단자가 확실한가? 린화가 아니라?”
“예, 예. 요 대인의 사주단자입니다.”
“정말로 요화가 맞는가?”
“아무렴요. 요 대인, 요 이국사, 요 소가주님이 맞습니다.”
몇 번이나 송 태감이 거듭 말한 뒤에야 어머니는 내 사주를 적어둔 종이를 작은 보석함에 담아와 송 태감에게 내밀었다.
“해석 날짜는 앞으로 닷새 뒤입니다. 가마를 보내 모시러 오겠습니다.”
송 태감이 떠나고 나자 어머니가 착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물었다.
“네가 한 거니?”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서 반만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무슨 수로 그랬겠어요. 어머니 아버지, 린화에게 다 거절해 달라고 애원했는데도 계속 거절당한걸요. 13황자 전하께서 나서 주신 거예요.”
사실 13황자도 처음에는 나서지 않으려 했지. 소문이 도니까 나서 주긴 했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해. 그런 소문이 돌아도 13황자는 조금 기분 상하고 마는 정도로 넘어갈 수도 있었는데. 왜 굳이 황제와 황후를 거론하는 위험까지 감수하면서까지 나서 준 걸까?
‘……역시 맛있는 건 제일 마지막에 먹는 유형 아니야? 나에 대한 복수는 제일 마지막에 해야 하니까 그때까지는 살려두겠다, 이런 식으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심지어 언제 온 건지, 린화는 완전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자 린화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넌 나한테 한 번을 져주지를 않네. 네가 정말 미워. 정말로.”
말을 마치자마자 귀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놀라서 린화를 세게 밀어냈다. 린화는 풀썩 뒤로 넘어졌다.
귀에 손을 가져다 대고 보니 축축한 피가 묻어 나왔다. 저 미친 망아지가 내 귀에 자기 손톱을 세게 박아넣은 것이다.
“너 미쳤어?”
나는 화가 나서 린화에게 큰 소리를 냈으나, 린화는 말없이 일어서서 자기 치마를 툭툭 털더니 돌아서서 가버렸다.
어머니는 내 귀를 뜯은 린화에게 화를 내야 할지, 린화를 패대기친 나한테 화를 내야 할지 몰라 잠시 바로 대응하지 못했다.
뒤늦게야 어머니가 이마를 감싸자 수길 어멈이 다급히 “마님!” 하고 외치며 어머니를 부축했다.
한숨이 나온다. 회귀를 했는데 가족들과의 사이는 회귀 전보다 더 멀어지고 있었다.
* * *
화음에서는 사주단자를 교환하고 나면 양가 부모님과 예비 신랑 신부가 한자리에 모여 사주 전문가의 풀이를 듣는 자리를 가진다.
이때 누구의 집에서 모일지는 혼인하는 가문마다 사정에 따라 다르게 한다. 하지만 황실이 상대라면 무조건 궁전에서 모여야 했기에, 닷새 뒤 나와 부모님은 함께 입궐했다.
황제와 황후에게 인사를 올린 어머니는 처음으로 13황자의 얼굴을 보자 넋을 놓고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몇 번 13황자를 본 적이 있어서인지 괜찮았지만, 어머니는 봐도 봐도 13황자의 얼굴이 신기한지 연신 눈동자가 돌아갔다.
나중에는 그러다가 나를 묘한 눈길로 바라보았는데, 그 눈빛은 ‘네가 이래서 자꾸 전하를 사모한다 했구나!’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후에는 사주를 분석하는 학자가 나타나 나와 13황자의 사주를 적은 종이를 펼쳐 들었다.
학자는 내가 남장을 하고 있는데 사주에는 여인이라고 나와 있는 게 놀라운지 잠시 눈썹을 치켜올렸으나, 황제가 헛기침을 짧게 하자 얼른 표정을 관리했다.
그러고서 유심히 나와 13황자의 얼굴과 사주 종이를 쳐다보면서 “음…… 음……” 하고 탄식하더니, 마침내 종이를 다시 보석함 안에 집어넣고서 입을 열었다.
“폐하. 13황자 전하와 요 이국사는 천생연분이십니다.”
웩.
“두 분 다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지만 부족한 기운이 하나씩 있어 혼자로는 대성하지 못하십니다. 하지만 서로가 그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으니, 13황자 전하와 요 이국사가 혼인하게 된다면 그 앞길은 탄탄하고 거칠 게 없사옵니다. 그 과정에서 비록 여러 가지 소리가 나올 수도 있겠사오나 두 분이 함께라면 그런 일시의 어려움도 곧잘 이겨내실 수 있습니다.”
솔직히 궁금하다. 사주단자를 교환했을 때 ‘이 둘은 혼인하면 서로를 쥐어 파먹고 살 운명이니 혼인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해주는 전문가가 있긴 한가?
난 아직 사주가 안 맞아서 혼인을 깼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물론 대부분은 사주단자를 무사히 교환한 후에야 정혼 사실을 알리곤 하니 알려지지 않았을 뿐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황제는 조금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다행이군.”
반면 황후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는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전히 착잡한 기색이 남아 있었으나, 그래도 잘 살면 되었다 싶은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였다.
“하지만 두 분은 혼인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사주 전문가가 내 의구심을 손수 채워주겠다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돌연 말을 바꾸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황후가 질색해서 바로 물었다. 사주 전문가는 고개를 조아리고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