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영민? 기품? 존경? (45/159)


45화. 영민? 기품? 존경?
2022.08.04.



 


“스승님의 그 가벼운 심장이 이번엔 누구에게 뛰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부황은 아니길 바랍니다. 너무 빠르니까요.”

“빠르다니요?”

“오래 살아남으셔야지요.”

“!”

오래 살아남으세요, 스승님. 그래야 마지막에 제가 죽이지요. 하지만 부황 편에 붙으면 오래 못 사십니다.

이 말을 하는 건가? 그의 발언에 심장이 콱 막혀오는 느낌이다.

나는 오래 살려고 열심히 발버둥 치는 중인데. 제자는 날 죽이려고 아직도 간을 보고 있다니.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제자놈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지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월무궁에 꾸미고 싶은 곳이 있다면 미리미리 말해주시지요.”

“갑자기 월무궁은 또 왜 그러시는지…….”

“혼인까지 몇 해 남았다지만 제대로 수리하고 건축하려면 몇 해는 넉넉히 잡는 게 좋으니까요. 스승님과 제가 혼인하면 밖이 시끄러워질 겁니다. 공개적으로 혼인하지 않고 입을 막더라도 몇몇 중요 대신과 황실 사람들은 알 테고, 그 몇몇 사람들은 우리를 괴롭게 하겠지요. 그때가 되면 월무궁 밖으로는 나가기도 싫으실 테니 보금자리를 꾸민단 기분으로 잘 꾸며 두세요.”

뭐야…… 내가 들어갈 감옥이니 내 취향대로 해준다는 건가. 왜 그렇게 들리지.

* * *

난데없이 13황자와 린화가 혼인할 뻔했던 사건은 그렇게 황제와 13황자가 남긴 묘한 말로 끝이 났다.

다행히 이후로는 비교적 별사건 없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는 이전처럼 제자에게 의미 없지만 열심히 수업해주었고, 제자는 무난하게 내 강의를 들었다.

가끔씩 그가 딴생각하는 게 티가 나긴 했지만 어쩌겠는가. 그는 어차피 공부하려고 내 수업을 듣는 게 아닐 텐데.

그래도 제자가 너무 내 수업을 듣지 않는 티가 날 때면 참지 못하고 미약한 복수를 하긴 했다.


“전하. 깜짝 쪽지 시험을 쳐도 되겠는지요?”

“안 됩니다.”

“송구하오나 전하. 제자인 전하껜 선택의 여지가 없사옵니다.”

“…….”

일부러 책의 구석구석에서 글귀를 찾아 시험 문제로 내어도 제자는 다 알아맞히긴 했다. 그렇더라도 시험을 치면서 기뻐할 변태는 없으니 복수가 분명 되긴 되었을 것이다.

다행히 제자도 이 정도 수준의 치졸한 복수는 인상을 조금 찌푸릴 뿐 그대로 넘어가 주었다.

선안은 9황녀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는데, 9황녀가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처음에는 ‘우리 황녀 전하’로 시작한 호칭이 ‘우리 영특하신 황녀 전하’를 거쳐 ‘나의 황녀 전하’로 바뀐 게 그 증거였다.

반면 린화와의 사이는 완벽하게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원래도 사이가 나쁘긴 했지만 그래도 말을 안 섞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요즘 린화는 문안하러 갔다가 날 마주쳐도 눈조차 마주치려 들지 않는다.


“네가 언니잖니. 먼저 다가가 보기라도 해보거라.”

“그래. 어차피 모든 일이 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느냐. 승자의 여유라도 보여 봐.”

부모님이 이런 식으로 떠미는 바람에 딱 세 번 먼저 말을 걸어보긴 했으나, 세 번 다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그 이후로는 나도 부모님이 무어라 말하건 린화에게 말을 걸지 않아서, 지금은 내 시비와 린화의 시비마저 사이가 멀어질 지경이었다.

그래도 비교적 무난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 즈음. 보문 공주가 온단 소식이 들려왔다.

* * *



‘보문 공주…… 보문 공주. 어땠더라?’

회귀 전에도 보문 공주는 화음의 명절인 12월 1일 동초일에 찾아왔다.

그녀는 태월 사람으로, 태월에서는 황위와 거리가 먼 황족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외국에 사절로 돌아다니는 관례가 있었다.

특히나 보문 공주는 예전에도 여러 번 이곳에 다녀간 적이 있기에, 처음 보문 공주가 동초일을 기념해 여기에 온다고 할 때 그녀의 방문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이 시기 방문한 보문 공주는 두 가지 예상하지 못한 제안을 한다. 하나는 황제의 막냇동생을 후궁으로 보내겠단 것이고, 다른 하나는 13황자를 자신의 남편으로 삼아 태월에 데려가고 싶단 제안이었다.

후궁 이야기는 뜻밖이기는 하지만 크게 놀랄 만한 건 아니었다.

후궁으로 보내겠단 황제의 동생은 얼핏 귀한 신분 같지만, 아니, 실제로도 귀하긴 하지만, 사실 태월 선황제의 말단 후궁 소생이라 입지가 우리 쪽 13황자 같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태월 황제의 생각은 이랬다. 지난번 화음 황제가 운월과 태월 사이에서 우리 편을 들었고, 운월 황제는 화가 나서 족자를 보내 화음 황제를 모욕했다.

지금 화음과 운월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 이걸 계기로 화음과 태월이 손을 잡아 버리자!

이에 태월 황제는 그리 친하지도 않고 좋은 가문에 시집 보내기도 애매한 힘없는 자기 이복동생을 이쪽에 후궁으로 보내고, 비슷한 처지인 13황자를 데릴사위로 태월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우리 화음에서는 혼처를 구하고 정하는 건 부모의 일이라 여기고 있기에, 보문 공주의 제안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지만 이건 중요한 게 아니고……

어쨌든 공주의 제안에 황제와 대신들은 긍정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결국 황제만 태월의 공주를 후궁으로 들이고, 13황자와 보문 공주의 혼인은 성사되지 못했다.

보문 공주의 혼담이 진행되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사건이 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황후와 13황자가 둘 다 혼인을 원하지 않아서 이런저런 계책을 세워 혼담을 엎은 것 같다.

13황자는 복수를 원하니 태월로 가기 싫어서 엎었을 거고.

황후는 보문 공주가 혼담을 전하면서 ‘상황을 보고 화음에서 지내도 좋다’고 한 부분이 마음에 안 차서 엎었겠지.

자기 딸을 황제로 올려야 되는데 13황자가 나중에 보문 공주와 태월을 등에 업고 돌아오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나랑은 크게 상관없는 사건이었지.’

나는 그저 13황자의 스승이자 이국사였을 뿐이었으니까. 13황자의 냉대에 화가 난 보문 공주가 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잠깐 나를 이용하려 하긴 했지만, 소용없단 걸 알고 빠르게 그만두었다.

문제는 회귀 전과 달리 지금은 내가 13황자와 혼담이 오갔단 건데……. 게다가 그 혼담은 지금 보류된 채 정체되어 있다. 아예 엎어진 게 아니라.


‘혹시 나한테 불똥이 튀진 않겠지?’

잠깐 궁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긴 했어도 황제와 황후가 엄히 입단속을 했기에 대다수는 그 일을 헛소문이라 여기고 있다.

진실을 아는 몇몇 황족들도 굳이 남의 나라 공주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진 않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공주가 돌아갈 때까지는 계속 주시하고 지내야겠다.’

 

* * *

화음에는 겨울에 두 개의 큰 명절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동초일이고 다른 하나가 신년일이다.

황궁에서는 동초일에는 백성들에게 인사를 받고 신년일에는 황친들에게 인사를 받는데, 여기서의 ‘백성’들이란 권세가 높은 명문세가 가주와 그 식속들을 일컫는다.

이 동초일 행사에 초대를 받느냐 받지 못하느냐, 초대장이 몇 장이느냐에 따라 사실상 사대부들의 권세와 명예가 갈린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요씨 가문은 한 번도 이 동초일 행사에 초대받지 못한 적이 없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초대장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회귀 전과 같았다.


“초대장이 네 장이 왔다고요?”

그런데 회귀 전에는 내내 세 장만 오던 초대장이 이번에는 웬일로 네 장이 온 게 달랐다.


“그래. 황후마마께서 이번엔 네 장을 보냈구나.”

“요화가 13황자 전하와 혼담이 오가서 그런가 봅니다. 보류하긴 했지만 완전히 엎어진 것도 아니니까요.”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지만, 나는 동초일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부터 회귀 전과 다른 사안이 나타나자 조금 불안해졌다.


‘부모님 말씀처럼 13황자와 내 사이 때문에 황제가 황후에게 네 장을 보내라 한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초대장이 네 장이라면 추가될 사람은 린화였다. 이에 린화는 난생처음으로 동초일에 입궁하게 되었고, 그 덕분일까. 근래에 내내 뚱하던 얼굴에 오래간만에 웃음기가 어렸다.

부모님은 린화가 표정이 밝아지자 그게 기뻐서, 금으로 된 새 모양 머리 장신구부터 연분홍색의 옷까지 새로 싹 맞추어주었다. 뭐. 입궁해야 하니 안 기뻐해도 옷은 맞추어야 했겠지만.

그리고 마침내 동초일 당일이 되었다.

어머니는 우리 식구가 타고 갈 마차가 예법에 맞는지를 열댓 번은 확인한 뒤에야 마차에 올랐고, 우리 네 식구를 태운 마차는 황궁 측문까지 느리게 이동했다.

측문 앞에 내려서도 한 차례 가벼운 소지품 검사를 받은 뒤에야 우리는 태감의 안내를 받아 연회가 열리는 악무재로 걸어갔다.


“아버지. 늘 이렇게 절차가 까다로워요?”

신이 나서 출발한 린화는 거듭된 검문에 지쳤는지 아버지에게 살짝 물었다.


“관리들은 매일 일하러 오니 올 때마다 검문을 받진 않지. 오늘은 연회날이고 평소 드나들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니 까다롭게 검문하는 거란다.”

아버지가 이런저런 설명을 린화에게 들려주는 사이. 마침내 우리는 악무재에 도착했다.


“이곳입니다, 요 대인.”

태감이 인사를 올리고 그냥 물러 나버리자 린화는 당황했으나, 아버지는 태연히 우리 가족이 있을 자리로 걸어갔다. 매년 초대받아 오니까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주위에서 몇몇 아는 얼굴을 발견하자 린화도 조금 안심이 되는지 한결 차분한 모습을 보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차분해지다 못해 눈에 불을 켜고서 좀 높은 자리를 이리저리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9황녀 전하 얼굴을 보고 싶은가 보네.’

“오라버니. 황녀나 황자들은 여기에 안 와?”

거봐. 맞지. 9황녀에 대한 호기심이 분노까지 눌렀는지, 나한테까지 말을 건다.

마음 같아서야 ‘네가 알아봐’라고 하고 싶지만…… 굳이 다른 가문들이 다 모인 곳에서 동생이랑 싸울 필요는 없겠지.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어.”

“……그 구…… 그분은?”

“재작년엔 오셨는데 이번엔 안 오셨네.”

린화는 노골적으로 실망해서 괜히 입술을 내밀고 작게 투덜거리더니 또다시 물었다.


“오라버니 제자는?”

“그분은 동초일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어. 그러니 이번에도-”

올 리가 없다고 말하려는 순간.


“찾아다녔습니다, 스승님.”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나는 작게 비명을 질렀다. 놀라서 뒤돌아보니 언제 온 건지 제자가 우뚝 서 있었다.

제자를 본 린화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다래졌다. 10년 이내 본 얼굴 중 가장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래. 잘생겼지. 쟤가 어마어마하게 잘생기긴 했어.


어머니 역시 두 번째 보는 건데도 제자의 찬란한 외모가 감당하기 힘든지 괜히 아버지의 팔을 붙들었다. 하지만 놀란 와중에도 나와 아버지와 박자를 맞추어 인사는 올리셨다.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반면 린화는 다급히 질문부터 했다.


“오라버니, 이분이 누구셔?”

조금 전 제자가 날 ‘스승님’이라 부르고 내가 ‘전하’라고 부르는 걸 봤으면서. 내가 자기를 제자에게 소개해주길 바라나 보다.

어차피 소개를 안 해줄 수도 없는 상황이라 나는 바로 대답해주었다.


“전하. 이쪽은 제 누이인 린화입니다. 제 누이는 처음 보시지요. 린화, 여기는 13황자 전하셔. 인사드려.”

린화는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완벽하고 우아하게 인사를 올렸다.


“13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요 이국사의 누이인 요린화입니다. 13황자 전하를 뵈어 영광입니다. 오라버니께 늘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영민하고 기품 있는 분이라고요. 존경하여 늘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드디어 만나 뵐 수 있다니. 너무 기쁩니다.”

그런데 인사가 왜 저리 길어.


“그래.”

넌 너무 짧고!


“스승님. 계속 여기 계실 겁니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