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맨날 화가 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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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맨날 화가 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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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맨날 화가 나 있어
2022.08.11.
회귀 전에는 동초일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던 제자가 왜 이번에는 여기 참석한 걸까.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물어볼 수도 없어서 홀로 호기심을 누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살금살금 다가오는 게 시야 너머로 보여서 돌아보니 린화였다. 아니 얘가, 얘가?
“린화, 너 아버지랑 어머니는 어쩌고 혼자 와?”
놀라서 얼른 끌어오며 묻자 린화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흩어졌어.”
“뭘 어떻게 했길래 흩어지는데?”
“있어 그런 게.”
린화는 말하면서 힐긋 13황자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13황자는 여전히 린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 대우에 린화는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면 린화에게 그 ‘무시’가 황족들의 기본 태도란 걸 알려주어야겠다. 고관대작이나 권세 높은 황족들끼리가 아니라면 누굴 대하든 무시가 기본 태도라고 말이다.
같은 형제자매들끼리도 어머니 신분이나 황제의 총애에 따라 무시하는데, 저들 눈에 일반 사람이 들어올 리가.
“그럼 여기 있어. 이따가 부모님한테 같이 가게.”
“응.”
시무룩해진 탓에 평소보다 조금 얌전해진 린화를 내 옆에 딱 붙이고서 나는 황후가 서 있는 쪽을 확인했다.
아직 황제가 오지 않아서인지 황후는 인사말 할 준비를 하지 않고 뒤에 선 태감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황제랑 황후가 엇비슷한 시간에 나타나는데. 오늘은 웬일이지? 회귀 전에도 이랬던가?
‘달리 기억나는 건 없는데. 그냥 보문 공주 관련해서 밖에 생각나는 게 없어. ……그러면 괜찮겠지 뭐.’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린화 앞에서 13황자에게 아첨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조용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자니 낯익은 여자가 황후 곁으로 다가가는 게 보였다.
청순한 미녀이지만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인상의 여자는 분명 보문 공주였다.
나는 힐긋 13황자를 보았다.
‘그래도 보문 공주한텐 관심을 보이려나?’
거절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와 혼담이 잠깐이나마 제대로 오간 건 보문 공주뿐이었으니까. 회귀 전 기준으로 말이다.
하지만 13황자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띤 채 정면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린화는 린화대로 보문 공주에 대해 모르다 보니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지, 13황자를 한 번 쳐다보고 13황자가 따뜻한 시선을 보내는 게 대체 어디인가 확인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시선이 닿은 곳에 있는 게 소처럼 건장한 태감이란 걸 확인하자, 린화는 아예 흥미를 잃고 도로 눈을 내리깔았다.
“재미없어.”
그러고서 작게 중얼거리는 걸 들으니, 린화는 13황자에게 한 번 무시 당하고 나니까 동초일 행사에 흥미가 싹 사라진 모양이다.
근데 어쩌냐. 앞으로도 초대장 네 장 오면 너도 따라와야 하는데?
그러나 린화의 시무룩한 얼굴은 “황제 폐하 납시오!” 하는 소리에 돌연 밝아졌다.
린화는 눈 깜짝할 사이 다시 호기심이 피어난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황후 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황후 곁으로 나타난 황제를 발견하더니 슬쩍 13황자의 옆모습을 확인했다. 알아. 황제가 13황자랑 많이 닮았지.
하지만 지금은 부자 얼굴이 얼마나 닮았나 확인할 때가 아니란다 동생아. 나는 자꾸 눈동자를 움직이는 린화의 등을 뒤에서 잡고서 앞으로 꾹 누르며 인사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다행히 박자에 맞추어서 린화가 허리를 숙이게 할 수 있었다.
린화는 잠깐 영문을 모르고 일어서려 했으나, 주위에서 사람들이 동시에 다 같이 인사하는 걸 알아차리자 눈치껏 계속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일어서라.”
황제의 허락을 받자, 린화는 등을 크게 흔들어 내 손을 떨어뜨린 다음 이번에는 스스로 허리를 폈다.
하지만 허리를 펴자마자, 린화는 아까처럼 황제를 자세히 보느라 목을 쭉 내밀었다.
‘적당히 구경하면 흥이 식겠지. 이제 내버려 두자.’
오늘은 어차피 관직에 오르지 않은 이들도 많이 참석하는 날이라 황제도 대신들을 대할 때만큼 까칠하게 굴진 않으니까.
나는 린화가 황제를 구경하게 놔두고서 약간 뒤로 물러나 섰다.
그 사이. 황제는 건성으로 몇 가지 덕담을 던지고 있었다.
“또다시 한 해가 가고 무사히 겨울을 맞이했구나. 올해도-.”
안 들어도 상관없는 말이기에, 나는 황제가 연설하는 말을 열심히 듣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눈으로 부모님 위치를 확인했다.
황제가 말을 멈추고 자유롭게 움직이는 시간이 되면 린화를 부모님에게 데려다주어야지.
하지만 부모님을 찾아 열심히 돌아가던 머리는 상석에 있는 보문 공주를 발견하고 잠시 멈칫하게 되었다.
황후 옆에 선 보문 공주가 뜻밖에도 린화를 눈을 가늘게 뜨고 보고 있던 것이다. 빤히 탐색하는 시선이었다. 우리 린화는 폐하만 보고 있는데.
그러다 보문 공주는 내 시선을 느꼈는지 약간 고개를 돌려 내 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날 보는 시선은 린화를 볼 때와는 좀 다르다. 날 보는 시선엔 영혼이 없었다.
게다가 보는 시간도 짧아서, 시선은 다시 린화 쪽으로 향했다.
‘아아. 하긴. 보문 공주 입장에선 그럴 만하네.’
저 공주는 아직 자기가 13황자에게 차여서 돌아갈 미래를 모르고 있으니까. 저 공주 입장에선 13황자는 자신의 예비 신랑인 셈이다.
그런데 그 신랑 곁에 웬 아리따운 규수가 가까이 있으니 신경이 쓰이겠지. 린화가 성격은 개차반이지만 얼굴만큼은 참으로 곱고 예쁘니까.
내 동생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렇다.
그러다가 보문 공주는 황제가 연설을 마치자 그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황제에게 후궁 이야기랑 13황자 이야기를 하려나 보네.’
나는 어차피 다 아는 이야기라 거기에 더 관심을 두지 않고 다시 부모님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뒤에서 들린 웃음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았다. 내내 조용히 있던 13황자가 자기 입가를 주먹으로 누른 채 희미하게 입술을 올리고 있었다.
‘뭐야. 쟤가 웃은 건가?’
의아해서 쳐다보자, 13황자가 손을 내리면서 물었다.
“뭘 하시길래 고개를 닭처럼 움직이십니까?”
“닭이요?”
“좌우로 까딱거리고 계시지 않습니까. 뒤에서 보니 영락없는 닭 같습니다.”
뭐야? 내내 조용하더니. 내 뒤통수를 보고 있었어?
황당해서 입을 벌리자, 13황자는 자기가 먼저 날 놀려 놓고서는 정색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찝찝해진다. 혹시 내 뒤통수를 쳐다보면서 내려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닐까.
괜히 내 뒤통수를 손으로 문질러 보고 있자니, 13황자가 픽 웃고서 말했다.
“뭐가 묻어서 본 건 아니니 안심하시지요.”
“그럼요?”
“희한하게 움직여서 본 겁니다.”
거참 안심되네요.
하지만 린화 앞에서 13황자에게 비굴하게 덤비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나는 말을 더 섞는 대신 온순히 웃어 보이고서 다시 부모님을 찾았다.
하지만 13황자가 또 비웃을지도 몰라서 이번에는 목에 최대한 힘을 주고 찾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마침내 부모님을 발견하는데, 딱 그때 맞추어 웅성거리는 소리가 파도처럼 여기까지 흘러왔다.
‘뭐야?’
의아한 것도 잠시. 곧 나는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해냈다.
보문 공주가 13황자랑 후궁 이야기를 황제와 황후 앞에서 하고, 황제가 그 이야기를 저 앞줄에 선 이들에게 한 모양이네.
여기까지는 황제가 힘주어 소리치지 않는 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지만, 저 앞줄은 황제의 목소리가 잘 들릴 테니 말이다.
나는 13황자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누르고서 일부러 영문 모르겠단 표정으로 또다시 목만 까딱거렸다.
‘젠장. 제자놈. 아직도 내 뒤통수 보고 있는 건가. 또 웃어대네.’
그러다 뒤에서 들린 제자의 웃음소리에 도로 목에 힘을 주고 있을 때였다.
“세상에 폐하.”
황후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작게 들려왔다.
연회에 모인 사람들은 황제의 말을 듣기 위해 조용해진 반면, 황후는 아까보다 목소리에 힘을 준 듯했다.
나도 부모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황후를 보았다. 황후는 입가에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황제에게 묻고 있었다.
“이번에는 후궁을 뽑지 않을 거라 하지 않으셨던가요?”
나는 황후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후궁을 뽑다니?
곧이어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월 황제가 친히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보낸다지 않소.”
“네. 보문 공주가 그리 말했지요.”
“다른 후궁들은 입궐할 때 동기들과 함께 들어오지. 그런데 태월 황제의 누이가 홀로 입궁한다면 동기가 없지 않소. 낯선 타국에서 오는 건데, 동기가 없다면 적응하기 힘들 거요. 그러니 한 명이나 두 명쯤 동기를 만들어주는 게 좋지 않겠소?”
여기까지 듣고서야 난 황제와 황후가 나누는 말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태월 황제의 이복동생을 후궁으로 들일 때 화음 출신 후궁도 한두 명 더 뽑겠단 말을 하는 건가?
회귀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회귀 전에는 태월 황제 이복동생만 후궁으로 왔는데?
게다가 황제는 태월과의 사이 때문에 받은 후궁이기 때문인지, 장공주 출신의 귀한 후궁에게 그리 큰 관심도 두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 장공주 출신의 후궁은 자기 나라에서도 의기소침하게 지냈기 때문인지 여기에 와서도 조용하게 지내서, 나중에는 존재감조차 사라졌던 거로 기억한다.
당연히 다른 후궁들처럼 13황자를 괴롭히지도 않았다. 그 덕에 13황자가 황위에 오를 때 숙청당하지 않고 선황제 후궁의 예우를 받게 되었지만…….
그런데 황제는 왜 갑자기 그 후궁에게 동기를 만들어주겠단 거지? 13황자가 중간에 무언가 행동을 해서 미래가 변했나?
유 가주와 선안에 관련된 미래는 나 때문에 변한 게 맞다. 13황자와 나 사이의 혼담 역시 내가 9황녀를 구하면서 변한 미래다.
하지만 황제가 후궁을 추가로 뽑으려는 미래는 대체 어디에서 바뀐 거지?
‘13황자가 뭔가를 했나? 그래서 이렇게 됐나?’
너무 궁금하지만 여기서 13황자를 쳐다볼 수는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황제와 황후의 대화를 놀란 척 듣고 있어야 하니까.
나는 린화처럼, 그리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처럼 이 소식에 호기심을 가진 척 황제만 열렬히 쳐다보았다.
그 순간이었다. 황후에게 무어라 말하던 황제가 고개를 돌리더니 내 쪽을 쳐다보았다.
‘나? 날 보는 건가?’
나는 잠깐 황제가 날 본다고 착각했다가, 바로 진실을 눈치챘다.
아아. 보문 공주가 후궁 얘기를 꺼내면서 13황자와의 혼담 이야기도 꺼냈겠지. 그래서 13황자를 보나 보다. 13황자를 보다가 내가 곁에 있으니 덩달아 잠깐 본 거고.
제자야. 황제가 너한테 할 말 있나 보다. 나는 황제와 눈 마주치기 부담스러워서 얼른 13황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13황자의 표정도 확인하고 싶었으니 잘 됐다.
그런데 13황자는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 내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이 제자놈, 또 뭐가 불만인 건지, 날 보는 시선이 그 짧은 사이에 분노로 얼룩져 있었다.
‘뭐야. 또 왜 그러는데! 왜 또 부리부리하게 쳐다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