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붉은 비녀 푸른 비녀 (52/159)


52화. 붉은 비녀 푸른 비녀
2022.08.29.



 
제자의 무서운 눈길을 피해서 집으로 돌아온 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냈다. 하지만 저녁 시간 즈음이 되자 점차 불안한 생각이 방울방울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짜로 내가 여인이란 걸 아는 거 아냐?’

회귀 전 제자가 날 여인으로 본 적이 있던가? 조금이라도 그런 내색은 없었는데. 이번에도 혼담 이야기가 나오기 전에는 그런 내색이 없었지.

하지만 나와 달리 제자는 여러 번의 회귀를 겪었다고 했다. 어쩌면 그 많은 회귀 중 한 번은 내가 여인임을 알았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내가 여인인 걸 안다면 제자가 내 비밀을 지켜줄 필요가 있나? 남장을 밝히는 것만으로도 나는 맥없이 고꾸라질 터였다.

그러나 회귀 전, 제자는 나를 스승으로 두고서 황위에 오를 때까지 그 여정을 굳이 굳이 데려갔다. 이런 걸 보면 내가 여인이란 걸 모르는 것도 같은데…….


“린화 아가씨 때문에 그러세요?”

내가 턱을 괴고서 계속 상념에 잠겨 있자 수길댁이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짭조름한 장아찌 반찬을 가져다주면서 물었다.


“아. 그렇지.”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서 수길댁이 두고 간 장아찌를 해서 밥을 먹었다.

그러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불을 정리해 주러 온 시비 월섬의 머리에 매달린 단정한 비녀를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제자 앞에 여인용 장신구를 가져가 볼까? 제자 반응을 보면 걔가 내가 여자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나는 다음 날 아침 부모님에게 문안 인사를 갔을 때. 어머니와 둘만 남기를 기다렸다가 슬쩍 부탁드렸다.


“어머니. 저한테 그 방울 달린 비녀 좀 빌려주실래요?”

“비녀를? 왜?”

“전하 앞에서 꽂고 있어 보려고요.”

어머니는 심각한 오해를 한 표정으로 변했다. 하지만 괜찮다. 어차피 비녀를 안 빌려도 오해하고 계시니까.


“염려 말거라. 네가 얼마나 고운데. 전하는 네가 남장 푼 모습을 보시면 부끄러워서 말도 못 거실 거다.”

“제 제자 얘기하시는 거 맞죠?”

어머니는 나를 한번 째려본 다음 방 안으로 들어가 예쁜 장신구 몇 개를 꺼내 늘어놓으셨다.


“그냥 아무거나 빌려주시면 되는데요.”

이렇게 본격적일 필요는 없는지라 나는 손을 내저었지만, 어머니는 직접 내 머리에 장신구를 하나하나 대어 보시고서 푸른색의 깔끔한 비녀를 건네셨다.


“이게 가장 잘 어울리는구나. 이걸로 가져가거라.”

“고마워요.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쯤에 다시 드릴게요.”

“괜찮으니 가져가거라.”

나는 어머니에게 받은 비녀를 품 안에 잘 넣어 챙겼다. 그리고 입궐해 제자와 마주 앉았을 때, 제자가 서책을 펼치는 사이 나는 비녀를 꺼내 책상에 놓아보았다.

그러나 제자는 자기 서책을 챙기고 붓에 먹을 묻히는 데만 바쁘지, 비녀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여길 좀 봐라. 여길 봐.

보다 못해서 나는 일부러 비녀를 잡고 살짝 흔들었다.

비녀의 끝에 달린 방울이 작게 울리자, 제자는 그제야 귀한 시선을 들었다. 그러더니 제자는 내가 쥔 비녀를 발견하고서 물었다.


“비녀는 왜 가져오셨습니까?”

나는 제자의 반응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하지만 제자는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이에 나는 일부러 비녀를 머리 가에 대어 보면서 들뜬 척 물었다.


“이거 제게 어울립니까?”

“이렇게 보아선 모르겠군요.”

하지만 제자는 여전히 반응이 거의 없었다. 이에 나는 하나로 묶은 머리를 돌돌 말아 비녀로 고정한 다음 묶은 부위를 제자에게 보이며 물었다.


“이러면요? 어울립니까?”

나는 그러고서 얼른 제자의 표정을 보았다. 그러나 제자는 여전히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얼굴이 반질반질한 계란 같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제자는 진심이 한 줌도 담기지 않은 듯한 말투로 말했다.


“잘 어울립니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내가 요란스럽게 물어대니 마지못해 대답한다는 어투였다.

저 반응을 보아서는 제자는 내가 여인인 걸 아는지 모르는지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결국 시무룩하게 비녀를 빼서 옆에 두고 내 서책을 펼쳤다.


“오십 쪽 봅니다.”

 

* * *

수업을 끝낸 뒤. 나는 힘없이 비녀를 챙기고 책상 위를 정리했다.

그 사이 제자는 책상을 정리하지도 않고 어딘가로 가버렸다. 그러나 별로 행방이 궁금하지 않아서, 나는 그냥 하던 정리를 마저 했다.

그런데 정리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니 문이 열리며 제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특이한 건 들어오는 제자의 손에 붉은 보석이 박힌 비녀가 들려 있단 것이었다.

뭐야. 네 비녀가 더 예쁘다고 자랑이냐. 나는 뚱하게 그 비녀를 한 번 제자를 한 번 쳐다보았다.

작별 인사를 해야 할지 아니면 비녀가 예쁘다고 인사치레를 해야 할지 헷갈렸다.

하지만 그냥 지나치자니 아까 내가 먼저 비녀를 보여주었고, 이에 나는 감탄하는 척 비녀를 보며 말했다.


“비녀가 참 예쁩니다.”

그러고서 이만 가겠다고 인사를 올리려는데, 그 비녀가 난데없이 내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비녀로 찌르나 싶어 두 손으로 얼굴을 막아도 공격이 없기에 손을 내리고 쳐다보니, 제자가 미쳤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손을 내리고서 당황해서 비녀와 그를 번갈아 보자, 제자가 비녀를 가져가라는 듯 재차 손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아…… 머리 묶어 드릴까요?”

혹시 혼자서 비녀를 못 사용하나 싶어서 묻자, 제자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아닌가? 일단 비녀를 얼른 받아들자, 제자는 손을 바로 내리고 자기 책상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드리겠습니다. 스승님은 이 색이 더 잘 어울립니다.”

“예?”

나는 당황해서 떠밀듯 도로 제자에게 비녀를 건넸다.


“괜찮습니다!”

“왜요. 제자가 드린 비녀는 더럽습니까.”

하지만 제자의 표정과 과대해석이 들어간 반응을 보자 무서워져서, 도로 비녀를 낚아채듯 가져와 끌어안아야 했다.


“이, 이걸 왜 제게 주십니까?”

그렇지만 제자에게 비녀를 덥석 받아 가자니 영 끌리지 않아서 재차 묻게 되었다.

제자는 아까 ‘예쁘네요’ 할 때만큼이나 건성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자는 붉은색을 좋아합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

나는 할 말을 잃고서 제자를 바라보았다. 제자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왜요. 제가 묶어 드릴까요?”

“아니요! 감사합니다!”

나는 놀라서 꾸벅 인사하고 달아났다. 제자는 그저 비녀를 주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내가 진 기분이다

* * *

제자가 준 비녀를 만지작거리면서 집에 돌아올 때까지만 해도 내 머릿속에는 파란 비녀와 붉은 비녀만 둥실둥실 떠다녔다.

어머니는 내가 푸른색이 잘 어울린다고 하셨는데. 제자는 붉은색이 더 잘 어울린대. 그 말은 둘 중 하나는 색감이 엉터리란 건데…….

그러다 집에 도착했는데 집 안이 어수선했다. 일꾼들은 평소처럼 일하고는 있었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연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심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져서 나는 바로 본당으로 가보았다. 본당 앞에는 린화의 측근 시비인 월미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본당 계단을 올라가기도 전에 안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월미는 울먹거리다가 나를 보자마자 달려와 애원했다.


“소가주님. 우리 애기씨 좀 도와주세요. 이러다 애기씨 죽겠습니다!”

“무슨 일이냐?”

“아까 궐에서 태감이 왔습니다. 전에 온 그 태감이 아니고 다른 태감이었어요. 후궁을 선발해야 하니 후보 명단을 작성해야 한다면서 우리 아가씨에게 정혼자가 없는지 물어봤습니다.”

“벌써?”

“네.”

한 번 더 그릇 깨지는 소리가 안쪽에서 들려왔다.


“아니, 근데 아버지는 왜 벌써 저리 노하셨어? 린화가 후궁 하겠다고 떼쓰고 있어?”

“애기 씨께서 없다고 바로 대답해 버리셨거든요.”

“!”

“애기씨가 직접 얘기하시니 태감도 좀 놀라 했습니다. 보통은 직접 나서서 얘기하지 않으니까요.”

와. 요린화, 아주 용맹하게 미쳤는데?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월미는 내게 다시 애원했다.


“도련님, 우리 애기씨 좀 도와주세요.”

거기에 내가 대꾸하기 전. 방 안쪽에서 아버지의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올 거 없다! 방에 가서 쉬어라!”

혼내는 와중에도 대화 소리는 다 듣고 계시나 보다.

월미는 나를 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도련니임. 우리 애기씨 좀 도와주세요.”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도 린화가 후궁이 되는 건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이미 린화가 태감에게 정혼자가 없다 해버렸는데. 아버지가 린화를 부른 것도 혼내려 부른 거지 설득하러 불렀겠느냐?”

지금 내가 방 안에 들어가 봤자 린화는 자존심이 상해서 더 분노할 거고 사태는 더 안 좋아지면 안 좋아졌지 가라앉지 않을 거다.

린화가 화나서 내게 성질을 부리면 나도 같이 성질을 부릴 거고, 그러면 아버지는 분노가 폭발해서 반 시진 화낼 거 한 시진 화낼 테니까.


“도련님…….”

“네가 나중에 잘 달래주거라.”

나는 본당에 들어가지 않고 내 거처로 돌아갔다.

린화 혼은 부모님이 내시겠지만 나 역시 허탈했다. 기껏 난균에게 사람을 보냈는데. 심부름꾼이 난균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공문이 나오다니.


‘빨리 나올 거라 짐작하긴 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더 빠르잖아.’

 

* * *

밤새 아버지와 린화가 싸우는 소리, 그릇 깨지는 소리로 집 안은 내내 시끄러웠다.

물론 그 소리가 내 거처까지 또렷하게 들린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분위기는 여기까지 흘러와서 내 처소의 하인들도 얼마나 조심조심 돌아다니는지 몰랐다.

그렇게 린화의 후궁 선발을 막으려던 나와 부모님의 노력은 린화의 말 한마디에 무너졌고, 마침내 후궁 선발식 날이 다가왔다.

* * *

이틀간 린화의 얼굴도 안 보려 한 아버지지만, 린화가 요씨 가문 이름을 걸고 선발장에 가서 다른 규수들에게 망신당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신가 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적이나 입고 가라!’며 딱 이틀 화내셨지만, 결국 상인들을 불러 값비싼 비단을 산 다음 가문에서 일하는 침모와 밖의 바느질공까지 총동원해 린화를 위한 옷을 짓게 하셨다.

그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섬세하게 세공한 장신구들을 가져와 린화의 옷에 맞추어 주셨다.

그 결과 린화는 번데기를 찢고 나온 나비처럼 껍데기만큼은 무척이나 아름다워졌다.


 
그런 압도적인 자태로 린화는 후궁 선발 날. 요씨 가문을 상징하는 마차를 타고 입궐했다.

아직까지도 난균이는 오지 않았다,

* * *

후궁 선발은 외지인이 볼 수 없는 행사라, 나는 린화가 입궐한 후에도 월무궁으로 가서 평소처럼 수업을 해야 했다.

하지만 린화가 신경 쓰이다 보니 제대로 수업하지 못하고 계속 헛소리만 하게 되었다.

이게 너무 눈에 띄었을까? 열 번째 헛소리를 하다가 아차 싶어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자니, 제자가 건성인 투로 말을 건넸다.


“오늘 스승님의 동생도 후궁 선발에 나섰다 들었습니다.”

“네.”

숨겨봤자 이상할 거 같아서 며칠 전에 흘리듯 말했는데. 아직 기억은 하고 있구나. 나는 한숨을 내쉬고서 털어놓았다.


“잘하고 있나 신경이 쓰이네요.”

마음에 안 드는 시험을 치른다고 성질을 부리진 않겠지. 집에서야 망나니처럼 굴지만 그래도 규수와 부인들을 만나는 사교 행사에서는 품위 있게 군다니까.

하지만 이게 어머니 주장이다 보니 영 신뢰가 안 가네.

나는 고개를 젓고서 무의식중에 책장을 또 넘겼다. 그러고서 어디까지 수업했나 헷갈려서 책을 뒤적거릴 때였다.


“한번 보고 오시겠습니까?”

제자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나는 놀라서 제자를 쳐다보았다. 아니, 진짜 놀랐다.


“못 보잖아요?”

이건 황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러나 제자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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