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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서! (53/159)


53화.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서!
2022.09.01.



 


“후궁 후보들을 시험할 때 사용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지대가 평평한데 좀 낮아서 인근 언덕에 올라가면 내려다볼 수 있지요.”

와. 그거참 괜찮은 생각 같기는 한데…….


“그래도 돼요?”

위치 선정에서부터 올라가면 안 된단 감이 세게 오는데?


“원래는 가면 안 됩니다.”

제자는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누가 보면 내가 가자고 한 줄 알겠네.

제자가 내게 시험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다는 것처럼.


“…….”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떻게 할까.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동생 상태를 보고 올까? 아니면-.


“살짝 다녀오면 되겠지요?”

제자는 말없이 미소 짓고서 불길하게 돌아섰다.


“따라오시지요.”

 

* * *

제자가 날 데려간 곳은 화연천 근처에 있는 언덕으로, 말이 언덕이지 비탈이 꽤 심해서 보통 사람은 올라갈 염두도 내기 힘든 곳이었다. 그냥 좀 낮은 절벽 같은 곳?

덕택에 올라가는 건 힘들었지만 마음은 편안해졌다. 좋아. 이런 곳이라면 들키기 쉽지 않겠어.

동생을 후궁 선발에 보낸 모든 오라버니가 다 이런 언덕에 다닥다닥 붙어서 선발 과정을 보려 든다면 그것도 곤란하지.


“여기인가요?”

언덕 위에 도착해서 묻자 제자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제자의 옆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널찍한 공간에 색색의 알록달록 화사한 의복들이 보였다. 이번 후궁 선발을 위해 한껏 차려입고 온 규수들의 의복 같았다.


“시작했나 보네요.”

후궁 선발은 진행 중인 듯 규수들은 바둑판에 한 칸 한 칸 들어간 것처럼 줄지어 서 있었고, 가장 상석의 의자 두 개에는 황제와 황후가 앉아 있었다.

나는 린화가 입고 간 옷 색깔로 한 차례 규수들을 구분해내고, 이어 얼굴을 살펴 린화의 위치를 알아냈다.


“저쪽이 제 동생입니다, 전하.”

나는 친한 척 제자에게 린화 위치를 알려주고서 목을 쭉 내밀었다.

우와…… 잘 안 보이네. 얼굴은 구분이 가는데 그 이상은 모르겠다. 눈에 안 띄는 걸 보면 사고는 안 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린화를 넋 놓고 바라보다가, 나는 이럴 때가 아니다 싶어 두 손을 모으고 천지신명께 기도드렸다.

그러자 언덕에 올라온 후 내내 날 방치하던 제자가 옆으로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스승님께선 동생이 꼭 후궁이 되길 바라나 보군요.”

“예? 아닌데요?”

“그럼 이 기도하는 손은 무엇이지요?”

“떨어지라고요.”

“!”

제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린화와 나, 꼭 모은 내 두 손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아주 웃긴다. 자기는 형 누나들을 가두고 귀양보내고 했으면서. 뭘 그렇게 놀라워하는 거야?

그렇게 얼마나 오랫동안 린화에게 방해 염원을 보냈을까? 서서히 팔이 아파질 즈음 제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스승님은 동생과 사이가 좋은 줄 알았습니다.”

후궁 선발이 끝나려면 아직 먼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나는 팔이 아파서 손을 내리고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제자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도로 시선을 내리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냥요.”

그 대답을 들으니, 제자가 왜 나와 린화 사이를 좋게 착각하고 있었는지 알 거 같다.


‘회귀 전엔 사이가 좋긴 했지.’

그때도 초반은 사이가 나빴지만, 제자가 린화에게 관심이 없었다니 우리 자매 사이를 시간별로 구구절절 알진 못할 거 아냐. 그러니 후반부 사이 정도만 알고서 저러겠지.

하지만 이런 걸 아는 척할 수는 없었다.


“별로 사이 안 좋아요.”

이에 나는 별거 아니란 투로 대답하고서 다시 린화를 쳐다보았다. 후궁으로 발탁되지 말아라 말아라……!

그러고서 아까 하던 기도를 마저 하려는데 나쁜 기도를 해서인가. 발밑의 흙이 움푹 패면서 아래로 떨어지는 바람에 갑자기 발이 옆으로 삐끗하고 몸은 균형을 잃고 기우뚱했다.


“!”

시야가 뒤집히면서 X 됐단 생각이 드는 그 순간. 누군가 내 허리를 잡아주었다.

나는 휘청거리면서 무작정 손에 닿는 걸 잡고 뒤통수를 바닥에 찍지 않으려 애썼다.

다행히 다리가 욱신거리긴 했으나 몸이 더 뒤로 넘어가진 않았다.


‘죽을 뻔했네.’

나는 안도해서 발밑으로 펼쳐진 까마득한 내리막길을 살폈다. 와 씨. 여기서 떨어졌으면 진짜 또 죽을 뻔했어.

심지어 시신은 후궁 선발 중인 규수들 발밑으로 굴러갔겠지. 이게 무슨 망신이야?

하지만 곧 안도감은 싹 사라졌다. 내가 붙잡은 게 제자의 허리란 걸 깨달은 것이다.

자세가 얼마나 열렬하던지 부모님이 보았더라면 기겁해서 비명을 지를 정도였다.


“!”

나는 놀라서 손을 놓았다. 하지만 붙잡은 게 없어지자마자 다시 몸이 기우뚱해서, 결국 다시 제자를 붙들고 말았다.

그 상태로 꾸역꾸역 붙어 있자니, 머리 위로 짧게 한숨이 내려앉았다.

곧 제자는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서 뒤로 이동해 안쪽에 내려주었다.

두 발이 땅에 안전하게 닿자, 나는 그제야 조심조심 제자의 허리를 놓고 고개를 푹 숙여 사죄했다.


“송구합니다, 전하. 떨어질까 봐 붙들었어요.”

참으로 다행하게도 제자는 화난 기색은 없었다.


“잘하셨습니다. 여기서 떨어지면 무슨 망신입니까.”

아닌가? 화난 건가? 내가 자길 잡은 게 짜증 나나 보네. 아 거참 미안하네요 미안해.

나는 민망해서 제자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린화를 저주한 역효과는 또다시 발휘되고 말았다.


“아!”

아까 발치의 흙이 무너지면서 발목이 접질리는가 싶더니. 두어 걸음 뒤로 갔을 뿐인데 발목을 망치로 꽝 내려친 통증이 나면서 한쪽 무릎에 힘이 풀린 것이다.


‘하늘이 린화를 돕는구나!’

결국, 나는 이번에는 아주 제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옆으로 넘어져서 머리를 부딪치진 않았지만, 나는 난감해서 다리를 쳐다보았다.

아까의 엄청난 통증을 상상만 해도 아찔해졌다. 그 상태로 이 가파른 언덕을 내려갈 수 있을까?

막막함에 나는 잠시 멍하게 언덕배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아무리 고민해 보아도 혼자 내려가긴 힘들 듯해서 나는 민망하지만 제자에게 부탁했다.


“전하. 제가 다리를 삐끗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혼자 내려가기가 좀 곤란한데요…….”

제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거기에 내가 도와줄 사람을 좀 불러와 달라고 “사람 좀”까지 말하려는 순간.

제자가 등을 보이며 거의 동시에 말했다.


“업히세요.”

“!”

나는 제자의 말을 듣자마자 내가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얼른 제자의 등에 뛰어내리듯 올라갔다.


“윽.”

너무 세게 올라갔는지 제자가 작게 신음할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제자를 붙든 채 놓지 않았다.

아까 나는 제자에게 ‘사람 좀 불러주세요’라 말하려 했고 제자는 거의 동시에 ‘업히세요’라고 했다.

내가 제자 말을 들었으니 제자도 내 말을 들었겠지. 그럼 민망할 거 아닌가. 민망하면 나한테 화풀이할지도 모르니, 그의 말이 옳은 것처럼 매달리는 거였다.

다행히 제자는 날 떼어 놓는 대신 미약하게 신음하며 말했다.


“꿈틀대지 마시고 좀 제대로 붙으시지요.”

 

 

* * *

그렇게 제자에게 업힌 채 언덕을 내려오고 있을 때였다.

걱정한 바와 달리 제자가 날 업고서도 가파른 비탈길을 쉽게 쉽게 내려가는 모습에 안도하고 있는데, 뜻밖에도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이 내 눈길을 잡았다.


‘저 사람!’

나는 놀라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가, 그 사람이 덩달아 고개를 돌리려 하자 얼른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서 제자의 등에 잠든 척 늘어졌다.

하지만 심장은 두근두근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아까 지나간 그 사람은 나중에 13황자의 수족으로 활동하는 측근 무림인 청양이기 때문이었다.

말이 좋아 무림인이지, 유동백에게 듣기로는 암살자라지. 하여튼 무시무시한 놈이다.

몇 번 억지로 저놈을 따라갔다가 못 볼 꼴도 많이 봤고.


‘그런 놈이 왜 여기 있지? 벌써 제자가 청양도 회유했나? 아니면 청양이 궁전을 어슬렁거리며 다니다가 제자한테 회유되나?’

그때였다.


“스승님.”

조용히 걸어가던 제자가 갑자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혹시 내가 청양을 보고 놀란 걸 알아챘나?’

나는 심장이 뚝 떨어지는 감각에 놀라서 양처럼 대답했다.


“네에……?”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였다.


“…….”

그게 이상했나. 불러 놓고서 제자가 한참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이 조용히 닥치고 있기를 한참. 언덕을 반 정도 내려왔을 즈음 제자가 중얼거렸다.


“심장이 빨리 뜁니다. 아십니까?”

이 제자놈. 내 심장 박동까지 세는 건가.

제자의 심장 언급에 내 심장은 불려서 기쁘다는 듯 더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박동이 목의 혈관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전하 심장이요?”

그래도 모른 척 슬쩍 발뺌해보자 제자가 픽 웃는 소리를 내고서 정정해주었다.


“스승님 심장 말입니다.”

“그, 그걸 세고 계십니까?”

“안 세도 느껴집니다.”

“!”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아까 지나간 사람 때문인지요?”

이미 심장이 최고 속도로 뛰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니라면 제자의 저 말을 듣자마자 내 심장 박동은 분명 더 빨라졌을 거다.

제자의 말에 나는 몹시 뜨끔했으나, 이미 심장이 빠르게 뛰던 터라 별 차이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어쩌지? 아까 청양이 지나쳐 갈 때 너무 긴장했더니 제자가 역시 이상하게 여기는 거 같은데? 그때 자세를 바꾸지 말았어야 했나?

너무 긴장했더니 목덜미로 식은땀까지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몇 달간 계속 같이 수업하면서 조금씩 찾았던 안정을 뚫고 공포가 다시 새어 나오려 했다.


“스승님?”

그러다 제자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순간.

나는 ‘나 죽었소!’ 외치면서 제자의 등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송구합니다. 전하께 업혀 있으려니 너무 부끄러워서요. 내색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게 티가 나버린 모양입니다.”

“!”

“전하께서 절 업고서도 듬직하게 내려가시는 걸 보니 심장이 터지겠습니다. 이게…… 연정이란 걸까요?”

내 말이 통한 건가 무시된 건가.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바로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그럴듯하게 여기는 것도 같고……?

그래도 혹시나 해서 나는 일부러 제자의 귀 근처에서 계속 종알거렸다.


“이 심장.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심장. 왜 자꾸 이렇게 티를 내나 모르겠습니다. 얘가 전하께 자꾸 자기 존재를 알리네요. 전하. 전하. 제 심장이 전하께 말을 걸고 싶은가 봅니다.”

“…….”

“뭐라고 하는지 들리세요? 쿵…… 쿵…… 쿵…… 연모해…… 연모해…… 이러나요?”

효과가 있었나. 아까 날 추궁할 때는 유난히 나긋나긋하게 말하던 제자가 딱 잘라 차갑게도 대답한다.


“안 들립니다.”

“하지만 전하가 얘 뛰는 소리까지 다 세셨다면서요.”

“심장을 아이 부르듯 하지 마시지요. 소름 돋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가 혼자 의지라도 가진 것처럼 전하만 보면 날뛰지 않습니까. 인격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으니 그러지요.”

작게 제자가 이 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게 싫은가 보다.


“아이라 부르지 마시라 했습니다.”

얼마나 싫은지 아예 대놓고 말하는 모습에, 나는 기뻐서 밝게 물었다.


“부끄러우신가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엉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놈의 제자가 나를 그대로 놓아버린 것이다.

철퍼덕 주저앉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올려다보자, 제자는 나를 차갑게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경고했다.


“그 입을 한 시진은 닫고 계셔야 할 겁니다, 스승님. 한밤중에 태감들이 스승님을 찾으러 여기 올라오길 바라는 게 아니라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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