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네가 왜 여기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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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네가 왜 여기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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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네가 왜 여기 계세요?
2022.09.05.
요화가 13황자와 티격태격하며 언덕을 내려가는 사이.
그들을 스쳐 지나갔던 청양은 아까 13황자의 등에 업혀 있던 이를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날 보고 놀라는 거 같았는데?’
암살자인 청양은 샅샅이 따져보면 이목구비는 단정하지만 존재감이 없어서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 편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이런 특성이 강점이라 생각해 스스로도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복색을 하고 지나가는 행인처럼 돌아다녔다.
‘날 보고 왜 놀랐지?’
그런데 화려하게 생긴 이가 자신을 보고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뭐 하십니까?”
운귀는 청양을 데리러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내 13황자가 내려간 방향을 보고 있던 청양은 그제야 몸을 돌리며 운귀에게 다가가 괜히 슬픈 소리를 냈다.
“주군이 날 무시하고 지나갔어……!”
“얼른 오기나 하십쇼.”
운귀가 청양을 데려간 곳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빈 전각 하춘재였다.
하지만 운귀가 이 만남을 위해 내부를 깨끗하게 정리해 둔 터라 가구 위에는 먼지 하나 앉아 있지 않았다.
청양이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안에서 차를 마시던 초감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아는 척했다.
청양은 초감 근처에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물었다.
“유동백은 또 없군. 아니, 자기 가문 도박장에서 모일 때만 나오는 거 같은데. 그놈 사실은 우리 상대로 장사하는 거 아닌가?”
초감은 웃으면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두 시진 뒤. 13황자가 나타나자 청양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주군. 아까 업고 가던 이가 누구입니까?”
13황자는 방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인사를 생략하고 청양이 묻는 말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업고 가던 이라니.”
“전하 등에 업혀 있던 그 아리따운 이 말입니다.”
13황자는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내 스승님이시지. 아리따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다 13황자는 청양의 눈이 호기심으로 다람쥐처럼 변한 걸 보고서 물었다.
“왜 그러지?”
청양은 회귀 전에는 요요화에게 큰 관심이 없었다. 13황자가 자신의 스승이라며 데리고 다니니 몇 번 같이 행동한 적은 있었으나 그게 호기심으로 번지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으면서 저러고 있으니, 아까 요요화의 반응과 겹쳐지며 신경 쓰였다.
“아. 별건 아닙니다. 전하께서 누굴 업어주시고 그러진 않으니까요. 궁금했습니다.”
청양은 웃으면서 고개를 젓고 바로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13황자는 이마를 찌푸리고서 괜히 문가를 돌아보았다.
* * *
“아니, 너는 다리는 왜 또 다친 게냐?”
13황자의 태감이 잡아준 마차에 타고서 집으로 돌아가니, 어머니가 린화가 돌아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질색해서 달려왔다.
“이게 대체 어찌 된 거니?”
“아. 발을 좀 헛디뎌서요.”
“어디서 헛디뎠길래? 옷이 흙투성이 아니냐!”
나는 어머니에게 괜찮다고 연거푸 말하고서 방 안으로 돌아갔다.
“의원은?”
“어의가 치료해줬어요.”
나는 침실에 도착하자마자 침상 위에 앉아 다친 다리를 쭉 뻗었다. 꼼꼼하게 싸인 붕대가 보였다.
초감 솜씨는 아니었다. 13황자가 오늘도 초감을 부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다른 낯선 어의를 불렀다.
‘누구였지? 왜 초감을 안 부르고 다른 사람을 불렀지?’
나는 그 생각을 하다가 괜히 초조해졌다. 내가 의심스러워서 자기 측근을 안 부르고 그냥 아무 어의나 불러줬나? 역시 청양을 보고 놀란 게 13황자의 의심을 북돋웠나?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면 할수록 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단 건 확실했다.
결국 나는 불안한 생각을 그만두고서 침상에 아예 편하게 누워버렸다.
“도련님은 긴장되지 않으신가 봅니다. 저는 린화 애기씨랑 친분이 없는데도 이렇게 떨리는데요.”
사람 속도 모르고 내 시비인 월섬은 따뜻한 차를 타다 주면서 감탄했다.
“떨릴 게 뭐가 있어. 본인이 큰 사고만 안 치면 붙을 텐데.”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가문 이름이 있잖아. 게다가 린화는 입만 다물면 고상해 보이니까.”
월섬은 찻잔을 내게 건네면서 물었다.
“만약 린화 애기씨가 후궁이 되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되다니?”
“집안에 후궁이 있으면 그 덕을 보기도 하지만 덩달아 고생하기도 한다고 들어서요.”
월섬은 좀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사실 월섬 말이 옳다. 그래서 사이가 나빠도 가문에서 후궁이 나오면 원수 수준이 아닌 이상에야 후궁과 가문이 서로 도울 수밖에 없지.
‘걱정이네.’
린화가 후궁이 된다면 다른 사람들과는 싸우든 친하게 지내든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13황자는 절대로 구박하지 말라고 당부해야겠어.
* * *
나는 린화가 돌아오기를 부모님과 같이 기다리려 했으나, 저녁 식사 후 어의에게 받은 약을 먹고 나자 잠이 쏟아져서 견딜 길이 없었다.
“안 되겠다. 넌 들어가서 자거라. 밤이 되어서야 끝난다지 않니.”
이를 본 어머니가 말려서 나는 결국 부모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내 방으로 돌아가 완전히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씻고 의복을 갖춰 입은 다음 본당으로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다.
월강은 내 곁에서 걸어가면서 어젯밤의 일을 슬쩍 알려주었다.
“어제 린화 애기씨가 타고 돌아온 마차에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이 걸려 있었습니다, 도련님. 마님께서 그 문양은 품계 낮은 후궁들이 주로 다는 문양이라 하셨지요. 그걸 보고 나리와 마님은 안도하셨습니다.”
역시 붙었구나. 방해 기도 도중 발밑의 흙이 바스러지는 거 보고서 심상치 않았지.
“린화는?”
“피곤하다고 바로 씻고 주무셔서 마님과도 아직 제대로 이야기해보지 못했을 겁니다.”
월강의 말이 옳았다. 문안 갔다가 마주친 린화는 후궁 선발이 시작할 때의 일부터 끝나기 직전까지의 일을 부모님에게 자랑하느라 바빴다.
얼마나 평소보다 붕 떠 있는지 날 보고서도 도끼눈을 뜨지 않고 자랑하기에 바쁠 정도였다.
“딸기를 갈아 넣어서 만든 음료수가 나왔는데 달고 정말로 맛있었어요. 아무리 밖에서 요리를 잘해도 역시 황실 숙수가 한 요리랑은 비교가 안 되더라니까요? 다른 규수들도 맛있다고 더 마시고 싶어서 얼마나 감탄했는지 몰라요. 하지만 가장 멋진 건 폐하였어요. 아버지, 어머니, 폐하는 폐하인데 어떻게 용안까지 그렇게 출중하실까요?”
부모님은 어젯밤까지만 해도 몹시 걱정하더니, 막상 린화가 후궁에 선발되어 와서 기뻐하는 걸 보자 마음이 놓이는지 흐뭇한 얼굴로 린화의 말을 다 들어주셨다.
어머니는 린화가 황제의 얼굴 이야기만 하자 다른 것도 더 듣고 싶은지 먼저 묻기까지 했다.
“후궁은 전부 몇 명이 뽑혔니?”
“저까지 두 명이요. 하지만 태월에서 온 장공주가 도착하면 같이 입궁한다니 이번 기수 후궁은 총 세 명인 셈이지요.”
아버지 역시 호기심이 이는지 물었다.
“다른 한 명은 누구인데?”
“단주초라는 여자요. 지왕성 쪽에서 이름난 가문 출신이라는데 난 누군지 모르겠어요.”
나도 누군지 모르겠네. 하긴. 회귀 전에는 황제가 후궁 선발을 하지 않았으니 회귀 전 정보가 있더라도 이건 모르겠다.
이후 며칠 동안 우리 가문은 린화의 흥분에 덩달아 휩쓸려 갔다.
황궁에서 온 상궁은 린화에게 궁중 예법을 가르쳤고, 린화는 의외로 제대로 해볼 마음이 있는지 철두철미하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모님도 어차피 후궁이 되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여기는 듯 린화가 가져갈 의복을 맞추느라 분주해지셨다.
하루에도 몇 명이나 되는 비단 장수와 세공사, 바느질공, 상인들이 찾아왔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친구와 지인들은 린화의 입궁을 축하한다는 핑계로 찾아와 얼굴도장을 한번 찍어두려 했다.
* * *
그런데 떠들썩하게 입궁을 준비하는 어느 날이었다. 어머니가 불러서 가 보니 탁자 위에 구름 같고 물결 같은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예쁘네요.”
그걸 보고서 감탄하며 들어올려 살피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가 뜻밖의 말을 건넸다.
“너도 한 필 골라 보거라. 린화 옷을 맞출 때 네 옷도 한 벌 맞춰주마.”
“예? 괜찮은데요?”
나는 별생각 없이 옷감을 내렸으나 어머니는 나지막하게 덧붙였다.
“여인들 의복으로 맞춰주려 그래.”
나는 놀라서 비단을 떨어뜨릴 뻔했다.
“예? 왜요?”
황당해서 묻자 어머니는 펼쳐진 비단을 손바닥으로 쓸면서 말했다.
“나중에 혼인하면 전하랑 같이 있을 때 입거라.”
나는 소름이 돋아서 두 팔을 내저었다.
“아이고오! 됐어요 됐어.”
제자는 내가 선녀처럼 차려입은 걸 보면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인간이었다. 어제 내가 좀 보들보들하게 말하자마자 기겁해서 업고 있다가 팽개치는 걸 보라지.
그런데 그 제자 앞에서 이런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의복을 차려입으라니.
게다가 나는 제자가 나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게 되면 적당히 기회를 봐서 도주할 생각이다. 그런데 이런 의복이라니!
“얼른 골라 보거라. 얼른.”
하지만 어머니는 아예 내 옷도 한 벌 만들리라 작정했는지 굳건한 얼굴로 우기셨다.
결국, 나는 전체적으로는 백색인데 끝에만 금사가 들어간 옷감을 골랐다.
“그럼 이걸로요.”
어머니는 옷감을 들어서 내 턱 밑에 대어 보더니 활짝 웃으며 좋아했다.
“잘 어울리는구나.”
“진짜 괜찮은데요.”
“린화가 새로 맞추는 의복만 마흔 개다. 거기에 하나 슬쩍 끼워 넣어서 마흔한 개를 만들게 할 거야. 마흔 개나 마흔한 개가 무슨 차이겠니. 부담스러워할 필요 없어.”
침모나 바느질공, 시비들을 부를 수 없기에 어머니는 직접 바느질 통을 가지고 와서는 내가 비단을 두르게 한 다음 여기저기에 바늘을 꽂으며 치수를 점검했다.
나는 두 팔을 어색하게 벌린 채 계란 흰자 같은 촉감의 비단에 둘러싸여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한참 어머니가 작업하고 있는데 밖에서 “마님! 마님!” 하고 급한 수길댁의 목소리가 났다.
“무슨 일이냐.”
어머니가 밖을 향해 묻자 목소리가 크게 대답했다.
“잠깐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혀를 차고서 내게 말했다.
“사람들이 자주 오가니 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지는구나. 잠깐 여기 있어 보거라. 금방 다녀오마.”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머니는 얼른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때는 별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상태로 이각을 우두커니 서 있자 점차 팔다리에 쥐가 나면서 짜증이 솟아났다.
그렇다고 그냥 철퍼덕 의자에 앉자니 어머니가 표시해둔 부위 옷감이 바늘 때문에 찢어질까 봐 그러기도 힘들었다.
그때. 문밖에서 드디어 인기척이 들리다가 문 열리는 소리가 나서, 나는 얼른 돌아서며 어머니에게 외쳤다.
“빨리 이 바늘 좀 빼주세요! 팔 저려서 죽겠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어머니의 소리가 없었다.
“어머니?”
의아해서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도 문 앞에 서 있는 이는 어머니가 아니라 제자였다. 나만큼 놀란 듯 눈이 평소보다 더 커다래진 제자.
아니…… 네가 여기 왜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