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13황자가 분노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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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13황자가 분노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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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13황자가 분노한 이유는
2022.09.22.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13황자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에 쟤가 왜 있는 거지?
아니, 왜 있는진 알겠다. 내 앞에는 청양이 있고 13황자 옆에는 유동백과 운귀, 초감이 있으니…… 자기 패거리끼리 모이는 날이구나.
젠장. 나는 왜 하필 오늘 여기에 와서!
“스승님.”
혼란스러운 머리를 뚫고 제자의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청양이 스승님의 이상형인지요?”
인사랑 아는 척 다 생략하고 다짜고짜 저 말부터 묻는 본새를 보아라. 자기의 분노를 끌어모아 한마디에 쫙 압축시켜 놓은 것이 아주 진액 중의 진액인 질문이다.
어디서부터 들은 걸까?
“예? 아닌데요?”
나는 일단 잡아뗐다.
“어라 요형, 아깐 내 이모라도 소개시켜 달라면서.”
눈치 없는 척하는 눈치 빠른 놈이 옆에서 히죽거리면서 끼어들었지만, 나는 제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서 눈빛으로 진실을 왜곡하려 시도했다.
“아닙니까?”
“그럼요, 전, 아니, 제자님.”
나는 눈을 최대한 동그랗게 뜨고서 쑥스러운 척 웃으며 말했다.
“제 이상형은 제자님인걸요.”
“주군 스승은 사기꾼이네요.”
옆에서 암살자가 날 모욕했으나 나는 그래도 꿋꿋하게 제자만 바라보았다. 아무리 청양이 무서워도 이 제자놈만 할까.
생각해보니 눈을 동그랗게 뜨는 거로도 부족한 듯해서, 나는 눈썹도 끝을 축 내리고서 최대한 가련한 표정을 지어내려 애썼다.
하지만 제자는 빙그레 미소 짓고서 내 노력을 대번에 쳐내버렸다.
“이젠 거짓말까지 하시는군요. 제가 바로 뒤에서 다 들었는데도 말을 바꾸시다니.”
그뿐만 아니라 제자는 내 입을 잡아당겨 버리고 싶다는 듯 쳐다보기까지 했다.
큰일이다 큰일이야. 안 그래도 호색하니 마음도 몸도 가벼우니 어쩌니 하는 온갖 말을 다 듣고 있는데. 하필 바람둥이 행세를 하다가 딱 들통나버릴 줄이야.
나는 빠른 고민 끝에 일단 현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지금은 제자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있을 듯하니, 우선 자리를 비킨 다음 제자의 분노가 가라앉기를 기다려야겠다.
그러고 나서 차분하게 이야기를 해보는 거다.
‘청양 저놈이 나한테 자꾸 시비를 걸면서 길을 막고 안 비켜주기에 일부러 헛소리를 지껄여서 떨어뜨리려 하고 있었어요’ 하고 말이다.
“제자님.”
판단하자마자 나는 배시시 웃으며 꾸벅 인사했다.
“저는 선약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고서 얼른 돌아서려는데 어깨 위로 제자의 팔이 올라왔다.
흠칫해서 쳐다보자, 제자는 나를 자기 쪽으로 좀 더 끌면서 물었다.
“스승님. 누구와 선약이 있으신지요?”
“선, 선안이요.”
“그렇군요. 선안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 그게. 그. 천, 천금, 천금수화요.”
“그렇군요.”
제자가 따뜻하게 미소 짓는데 어째 더 불길하다. 그러다 제자는 나를 더욱 가까이 끌어당기더니 내 귀에 대고서 조곤조곤 속삭였다.
“방금 이 제자가 거기서 오는 길입니다, 스승님.”
“!”
굳어 있는 내 어깨에서 팔을 내리며 제자는 실망스럽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제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또 거짓말을 하시는군요. 정말 지치지도 않으십니까.”
그러고는 제자는 내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서 내 어깨를 다시 감아 자기 쪽으로 당기고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설마 데려가서 죽이려고?
“전, 제자님? 제자님? 어디 가는 건가요?”
나는 그의 팔에 나무늘보처럼 매달린 채 기겁해서 물었다. 그가 날 끌어안은 자세는 친근하기 짝이 없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제자의 기세는 아주 서늘하기 짝이 없었다.
이대로 제자를 따라갔다가는 회귀 전만큼도 못 살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러나 제자는 대답 대신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주위에는 제자의 패거리들이 신기한 동물을 구경하듯 제자에게 붙들려 잡혀가는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청양, 이 사태의 주범인 청양이 유동백에게 얄밉게도 물었다.
“거 주군이랑 저 형씨랑 너무 딱 붙어 이동하는 거 아닌가?”
* * *
제자가 대체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건가. 나는 벌벌 떨면서 따라갔다.
그러나 제자가 도착한 곳은 평범하고 무난한 음식점이었다. 게다가 주위에 사람들도 많아서 누군가를 독살할 만한 곳도 아니었다.
‘진짜 여기?’
당황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자니 제자는 음식 이름이 씌워진 나무판을 내밀었다.
“고르시지요.”
“이건 왜…….”
“제자가 골라드릴까요?”
영문은 모르겠지만 독살하려는 건 아닌 듯해서, 나는 일단 제일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골랐다.
“이야 야무지게 제일 비싼 거 골랐네.”
옆에서 자꾸 청양이 시비를 걸어댔지만, 나는 못 들은 척하고서 제자의 눈치만 살폈다.
그러나 제자는 막상 여기로 날 데려와 놓고서는 내가 음식을 고르고 나자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점원이 음식을 가져와 우리가 앉은 탁자에 내려놓고 간 뒤에도 제자는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뭐 자기들끼리 은밀한 계략과 암투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거 맛있네요. 여기가 요즘 제일 맛집이래요.”
“우리 가게가 더 잘하는 거 같은데.”
“아 유 형, 유 형 가게엔 자주 가잖아요. 그 가게 얘기 좀 그만 해요.”
그냥 이런 이야기나 나누고 있다.
장차 황실을 뒤엎고 황제를 폐위시키는 미래 황제와 공신들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모습들이었다.
나는 조용히 식사하면서 그런 이들을 좀 신기해서 바라보았다.
‘회귀 전에 내가 제자의 측근들이랑 교류하게 된 건 도저히 발을 뺄 수 없게 된 뒤였지. 그땐 이미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있는데다 나는 반강제로 합류하게 된 거라 저들하고 잘 어울리진 못했어.’
게다가 내가 합류할 당시엔 제자의 수하들은 이미 다 분위기가 제법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자의 수하들은 당시보다 다 나이가 어려서인가. 좀 더 밝고 장난이 심해 보였다.
특히 암살자인 청양은 회귀 전에 나랑 만났을 때는 속내를 알기 어려운 독사 같은 이미지였는데.
지금 보니 독사가 아니라 그냥 조그만 물뱀 같다. 물뱀도 독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그렇게 불편한 식사가 끝났을 즈음. 나는 제자의 눈치를 살폈다.
그가 이제 나를 따로 불러서 면박을 줄지, 아니면 공개적으로 면박을 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어느 쪽이든 두렵고.
“스승님.”
마침내 제자가 입을 열자 나는 입가를 닦다가 손수건을 내리지도 못하고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이제 돌아가시지요.”
그런데 제자는 뜻밖에도 날 여기까지 불러 놓고서는 그냥 가라고 말했다.
나야 좋긴 하지만 왜? 제자가 그냥 이렇게 보낼 리가 없는데?
“예? 저 밥만 먹었는데요?”
분명 뭔가 함정이 있을 것 같아서 내가 묻자, 옆에서 청양이 또 끼어들었다.
“그래, 어떻게 밥만 먹고 보내? 차도 한잔해야지.”
나는 아니란 뜻으로 빠르게 고개를 젓고서 제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제자는 정말로 가라고 손짓할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제자의 눈치를 보면서 주춤주춤 일어나도 날 붙잡지 않기는 마찬가지. 제자는 정말 나를 이대로 보내줄 듯했다.
다행이야. 쟤가 밥이 맛있었나 봐.
밥 먹으면서 자기가 너무 과한 반응을 보였다는 걸 알아차린 거겠지?
나는 그제야 안도해서 꾸벅 인사하고서 부리나케 식당 밖으로 달아났다. 그리고 다른 데로 새지 않고 곧장 집으로 돌아갔다.
* * *
요요화가 떠나고 나자 식사하는 내내 헛소리만 하던 청양은 실쭉 표정을 바꾸더니 화려에게 물었다.
“주군의 스승님은 여기에 왜 데려오셨던 겁니까? 전 주군의 스승님도 우리와 합류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밥만 먹이고 그냥 보내시네요.”
유동백과 운귀, 초감 역시 궁금해서 화려를 쳐다보았다.
간만에 모두가 모이는 모임에 13황자가 스승을 챙기기에 그들도 새 동료가 합류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밥만 먹이고 보내다니. 그들로서도 화려의 행동이 이해 가지 않았다.
“청양.”
“네, 전하.”
“고모나 이모 있나.”
그러나 화려가 한 대답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었다.
“예?”
청양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 화려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입가를 닦으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있어도 없다 해라.”
“예에?”
청양은 잠시 13황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다가 뒤늦게 황자의 스승이 자신에게 쏟아부었던 말을 떠올리고서 헛웃음을 뱉었다.
“아니 전하. 전하 스승님이 한 말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
화려는 부정도 하지 않았다. 청양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슬쩍 물어보았다.
“주군. 혹시 제게 화나셨습니까?”
“네게 화난 게 아니다. 내 스승에게 화난 거지.”
“아 혹시 고모 이모 얘기 때문에 그러십니까? 뭐. 헛소리를 좀 하시긴 했지만요. 제가 먼저 쫓아갔습니다. 아마 그래서 둘러대신 거 같은데요.”
“쫓아가다니?”
“전하의 스승 아닙니까. 전에 마주치기도 했고, 그냥 좀 놀린다고 쫓아갔지요.”
청양은 웃으면서 말하다가 화려의 표정을 보고서 얼른 젓가락을 쥐었다.
화려는 이중 가장 나이가 어리지만, 평소에는 제일 감정을 잘 통제해 연장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오늘은 무표정한 얼굴과 굳은 눈매에서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그 불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니, 이들 역시 어느 지점에서 화려가 기분이 상했는지 통 짐작하기 어려웠다.
스승이 바람둥이이면 자신의 체면이 상한다고 여기는 걸까? 아니면…….
유동백과 운귀는 그런 화려를 미심쩍게 바라보았다.
* * *
다음날. 입궐할 준비를 하긴 하는데, 하루 사이에 제자의 성질이 좀 가라앉았을까 고민하느라 영 손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래도 마지못해 준비를 하고는 있는데. 아버지가 들어오더니 조심스럽게 내게 부탁했다.
“요화야. 린화가 입궐한 지도 이제 칠일 가까이 되었으니 한번 찾아가 봐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아이고. 첫날엔 첫날이니 가봐라, 둘째 날엔 이틀이니 가봐라, 사흘짼 사흘이니 가봐라. 하나만 하세요.”
아버지는 내 말에 괜히 헛기침을 하다가 버럭 소리 지르는 시늉을 했다.
“너도 네 애가 생기면 어떤 기분인지 알 거다. 반대여도 린화한테 가보라 했을 거야.”
“어휴.”
“어쩔 수 없지 않으냐. 너야 말단 관직이니 행동이 좀 자유롭지만 이 아비는 품계가 높단 말이다. 아비가 린화를 자주 찾아가면 오해받기가 쉬워.”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두 팔을 들었다.
“알았어요. 오늘은 한번 찾아가 볼게요.”
어차피 지금은 13황자를 보러 가기도 두렵다. 차라리 좀 일찍 입궐해서 린화를 먼저 보고 나면 용기가 샘솟아서 13황자를 볼 두려움이 가라앉을지도 모른다.
린화는 내 전투력을 올려주는 능력이 있으니 말이다.
“그럼 오늘은 좀 일찍 입궐할게요.”
나는 그렇게 심드렁한 기분으로 평소보다 좀 이른 시간이 입궐했다.
하지만 내무부에 찾아가 린화의 거처가 선한궁이란 걸 듣자 나 역시 걱정이 치밀어오르기 시작했다.
선한궁이라면 원비 궁이잖아? 원비는 7황자 친모고. 7황자는 나랑 13황자를 증오하는 황자…….
‘와. 린화 살아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