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관심은 이쪽 말고 저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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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관심은 이쪽 말고 저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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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관심은 이쪽 말고 저쪽으로
2022.09.26.
선한궁은 월무궁과는 당연히 비교도 되지 않았으며, 6황자의 성환궁보다도 더욱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6황자의 생모보다 7황자의 생모 품계가 높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으나, 세련된 건물을 보자 궁티 나는 제자의 월무궁이 떠올라 마음이 아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자가 나더러 원하는 대로 월무궁을 꾸며도 좋다고 했지. 내 돈으로라도 좀 궁색한 기운을 벗겨내면 어떨까. 법에 걸리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사람 일이 참. 하필 선한궁 본전 앞에 원비가 의자를 내어놓고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니 이 겨울에 왜 밖에서?’
원비는 나를 보더니 바로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군데 태감이 들여보냈지?”
껄끄러운 마음을 숨기고서 나는 공손하게 인사했다.
“원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13황자님의 이국사인 요요화라 합니다.”
원비는 한번 “13황자?”라고 되묻더니 곧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요요화. 아아. 그래, 네가.”
마치 ‘아아 그래 네가 내 아들이 싫어하는 바로 그자로구나.’라고 생각하는 어조였다.
거기에 내가 뭐라고 답하겠는가. 나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가식적으로 웃고만 있었다.
그러고 있자니 원비가 재차 말했다.
“우혜전에 들어온 요 귀인이 요씨였지. 네 누이인가 보군.”
“예, 마마.”
이미 알면서 왜 그러세요.
“누이를 보러 왔나?”
“예, 마마. 철없고 미숙한 동생이라 걱정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부디 마마께서 너그럽게 동생을 보아주셔서 철없는 아이가 잘 적응하게 도와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원비를 향해 필살기 같은 미소를 지었으나, 원비는 그리 감흥이 없는지 들어가 보아라 손짓만 했다.
나는 꾸벅 인사하고서 얼른 그녀의 좌편으로 이동했다.
선한궁은 본전을 사이에 두고 우측으로는 황손이 지내는 공간이, 좌측으로는 다른 후궁들이 지내는 공간이 있었다.
그사이에는 높은 담이 있어서 본전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7황자의 거처와 린화의 거처는 아예 교류조차 할 수 없는 구조였다.
이런 구조가 린화를 보호할 수 있을까? 7황자가 자기 분노를 린화에게까지 보내진 않았으면 하는데…….
하긴. 7황자가 안 보내도 원비가 보낼지도 모르지만. 원비가 제발 7황자보다는 좀 더 그릇이 넓기를 바란다.
회랑을 따라 걸어가자 또 다른 안뜰이 나오고, 그 안뜰을 둘러싼 ㄷ자 모양 건물이 나타났다.
태감과 궁녀들은 여러 개의 건물을 오가며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중 누구를 불러야 하나 고민하고 있자니, 태감 하나가 내 쪽으로 다가와 꾸벅 인사하고서 물었다.
“실례합니다, 대인. 누구신지요?”
거기에 내가 대답하기 전. 린화를 따라 사가 궁녀로 입궁한 월미가 "소가주님!" 하고 외치며 다가왔다.
태감은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차리고서 원래 하던 일을 하러 갔다.
대신 이번에는 월미가 아까 태감이 서 있던 자리로 와서는, 날 보자마자 울먹이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보자마자?
“잘 지내고 있느냐?”
그래도 모른 척 물어보자 월미는 더 울먹였다.
“도련님…….”
심장이 철렁한다.
“잘 못 지내나 보구나.”
월미는 주위를 빠르게 살피더니 빠르게 부인했다.
“아닙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얼른 들어오세요.”
그러고는 안쪽을 손으로 가리키고서, 자신은 먼저 중앙의 건물에 종종걸음으로 뛰어가면서 외쳤다.
“소주! 소가주님 오셨습니다!”
겨울이라 꼭꼭 닫아둔 문을 월미가 열어주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작은 화로 앞에 앉아 있는 린화가 보였다.
린화는 날 보더니 책을 내려놓고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린화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며칠 사이에 애가 볼이 홀쭉해져 있었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나는 놀라서 린화에게 다가가 홀쭉한 볼을 양손으로 감쌌다.
“볼살 다 어디 갔어?”
린화는 “원비가”까지 말하다가 월미에게 눈짓했다. 신호를 받은 월미는 문을 꼭 닫은 다음 창문들까지도 철저하게 확인했다.
와. 얘가 눈치도 많이 보네? 원비가 그새 잡았나?
문이 전부 닫히자 린화는 다시 평상에 앉으며 그제야 말을 이었다.
“원비가 내 인사도 안 받아줘.”
“뭐?”
“아예 말도 못 섞어 봤어.”
나는 린화의 옆자리에 앉았다.
린화는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설빈은 처음부터 자기 거처를 따로 받았으니 누구에게 잘 보이거나 할 필요가 없어.”
설빈이 그 태월에서 온 장공주이지. 처음부터 빈으로 시작하는구나. 파격적이네.
“단 미인은 순비 거처에서 지내게 됐는데, 순비마마는 봉호에서부터 성품이 보이잖아. 워낙 순하셔서 문제 될 게 없어.”
맞지. 순비는 실제로도 순한 성품이다.
“순비 밑에는 현 귀인도 있긴 하지만 그 사람은 말이 험해도 먼저 시비 거는 사람이 아니라 데면데면 지낼 뿐 그쪽도 괜찮아. 그런데 원비마마는…… 아예 날 무시해.”
“오해는 아닐까?”
나는 오해가 아니라 확신하면서도 일단 좋게좋게 말해보았다. 여기서 ‘어떡해. 원비가 너 진짜 싫어하네. 너 이제 X 됐다’라고 말하기도 좀 그렇지 않은가.
린화는 내가 자기 말을 안 믿는다고 생각하는지 버럭 소리 질렀다.
“내가 이런 거나 오해하겠어? 아예 날 없는 사람 취급한다니까?!”
“이런.”
“그뿐인 줄 알아? 원비네 태감은 내무부에서 물건을 받아와서 나누어줄 때 교묘하게 나한테 보낼 물건을 줄여.”
“이런.”
“폐하도 날 찾아오지 않아. 난…… 난 폐하가 바로 내게 올 줄 알았는데.”
“어이구.”
린화는 점점 더 펑펑 울기 시작했다.
“그뿐이 아니야. 신참 후궁이 셋인데, 설빈이랑 단 미인은 둘이서만 놀아. 날 끼워주지 않아.”
“그건 또 왜?”
“입궁 첫날에 나는 다른 윗전들이랑 있었거든. 그런데 그 둘은 불러주는 데가 없어서 자기들끼리 있었나 봐. 밤새 그러고 났더니 그사이에 정이 쌓여서 지금은 둘이 딱 붙어 지네.”
이거 참. 복합적으로 가관이로구먼.
“아이고.”
혀를 차고 있자니 린화가 내 손을 움켜주며 물었다.
“요요화. 네가 좀 도와줘. 어떻게 해야 해? 내가 잘해보려고 해도 뭐 폐하 얼굴을 보든가 원비마마가 날 무시하지 않든가 해야 하잖아.”
언니답게 도움을 척척 내놓을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안타깝게도 나 역시 별다른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도 모르겠어. 내가 폐하를 불러올 수도 없고 후궁들한테 너랑 놀아주라 할 수도 없잖아.”
물론 원비가 린화를 무시하는 건 7황자 때문인 것 같아서 좀 안쓰럽다. 그렇지만 내가 7황자에게 잘못을 해서 화가 나거나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 잘못으로 7황자가 화나 거라면 내가 가서 사과하면 된다. 그러나 7황자가 화난 건 13황자에게서 말을 빼앗지 못해서이다. 내가 어떻게 해볼 여지가 없었다.
린화는 울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지내셔?”
“네 걱정 하시지.”
“부모님한텐 잘 지낸다고 해. 걱정하시잖아.”
“솔직하게 말하는 게 안 낫냐?”
“아니야. 부모님한텐 잘 지낸다고 해. 그리고 네가 날 도울 방법을 좀 찾아봐. 응?”
지금 상황이 서럽긴 한지, 린화는 의외로 13황자와 옷감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원비에 대한 걱정이 13황자에 대한 분노를 누른 모양이다.
그보다 어쩐다…….
린화와 헤어져 월무궁으로 걸어가는 길, 나 역시 걱정이 치밀었다.
회귀 전 쌓은 자매간의 정이라던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린화가 그냥 뒷방 후궁이 되는 거라면 그걸로 인해 가문에 해가 되진 않을 거다. 하지만 원비가 나서서 린화를 괴롭힌다면 가문에 해가 갈 수도 있었다.
원비가 그냥 내무부 물건을 모자라게 주거나 하는 식에서 그친다면 그나마 낫지만, 누명을 씌운다거나 했을 때 린화가 그걸 방어해내지 못한다면 곧장 우리 가문에 타격이 오니까.
'제자가 원비랑 7황자를 언제 쳐내더라.'
회귀 전 기준으로, 제자가 본격적으로 이를 드러내는 건 두 해쯤 지나서였다.
지금 황자와 황녀들은 3황자 때문에 상당수가 혼약만 해두고 혼인은 못 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외국에 나가 있는 1황자비가 건강해진 사내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는 게 1년 후인데, 이때부터 암암리에 황위 전쟁이 벌어졌지.
지금 1황자가 황위를 못 이을 거라고 여겨지는 게 그의 재목 때문인데, 데리고 온 사내아이가 아주 똘똘하고 명석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2황자비가 드디어 회임을 하게 되는데, 이후 태어난 게 또 쌍둥이 남자아이들이었다. 게다가 둘 다 훤칠한 것이 아주 귀여워서 황제가 아주 예뻐하지.
1황자와 2황자에게 영리하고 건강한 사내아이들이 셋이나 생겨버렸으니, 황위를 노리던 이들에게는 거대한 걸림돌이 여러 개 생긴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자 황후와 후궁들의 친정들은 황제에게 다른 황자와 황녀들이 정혼만 하고 혼인을 하지 못하는 게 가엾다고 하소연하게 되고, 황제는 마침내 3황자를 건너뛰고 4황녀부터 혼인해도 좋다고 허락을 내린다.
그러면서 본격적인 황위 전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제자가 7황자를 쳐낸 건 지금으로부터 3년인가 4년 사이 정도였던 거 같다.
‘너무 늦어. 삼사 년이면 어떤 일이 벌어질 줄 알고. 삼사 년이면 원비가 린화를 괴롭히다가 우리 가문에 해를 입힐 수도 있어.’
제자가 자기 측근들을 불러 모으는 속도가 회귀 전보다 빨라지긴 했지만, 그렇더라도 7황자를 쳐내는 속도가 더 빨라질 것 같진 않은데.
7황자는 자충수에 걸려 무너지는데, 그 무리한 자충수가 지금 시기에는 나올 수가 없는 수이니 말이다.
‘어쩐다…….’
같은 이치로 내가 지금 나서서 7황자를 쳐내는 것도 힘들지. 13황자가 7황자를 쳐낸 방도를 안다 한들, 지금은 이용할 수 없는걸.
그렇다고 원비나 7황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하기에는 나는 그저 말단 이국사일 뿐이다.
그런데 생각에 잠겨서 얼마나 오래 걸어갔을까. 월무궁으로 가는 길에 막 접어들었는데 황제의 측근 송 태감이 길목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송 공공 아니십니까.”
오늘은 황제가 날 찾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른 척할 수 없어 말을 걸자, 송 태감은 반색하며 말했다.
“오셨군요, 요 대인. 요 대인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폐하께서 요 대인을 데려오라 하셨거든요.”
그 반가워하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벼루를 맞은 부위가 욱신거렸다. 반사적으로 구겨질 뻔한 표정을 통제하고서 나는 눈치 없는 척 물었다.
“저를요? 왜요?”
전에야 9황녀와 선안 일로 황제를 계속 만났다지만 지금은 아무 일도 없지 않나?
린화 때문도 아닐 거다. 린화는 황제 얼굴도 구경하지 못했다고 했는걸. 게다가 원비의 무시로 끙끙 앓고 있는 애가 벌써 사고를 칠 리도 없고.
두려움에 자꾸만 표정이 굳으려 하자, 송 태감이 나지막하게 웃으면서 내 팔을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오늘은 화난 일로 부르는 게 아니시니까요.”
화난 일로 안 불렀을 때도 린화와 13황자를 혼인시키고 나는 자기 측근이 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으니 문제지요…….
어쨌든 황제가 부르는 데 안 갈 수는 없는지라, 나는 송 태감을 따라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꾸었다.
‘어쩌면 황제한테 린화 얘기를 살짝 꺼내 볼 수 있을지도 몰라.’
* * *
황제의 서재에 들어가자 송 태감은 차를 올리겠다면서 혼자 돌아갔다. 황제는 평소처럼 책상 앞에 홀로 앉아 있었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올리고서 황제의 앞에 공손하게 서서 그가 날 왜 불렀는지 이야기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황제가 책상 뒤에서 나오더니 내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와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거라.”
의아해서 받고 보니 작은 보석 알갱이를 엮은 줄이 몇 가닥 달린 머리 장신구였다.
“무엇입니까?”
당황해서 묻자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태월에서 설빈을 보낼 때 짐에게 보낸 선물 중 하나이다. 목련 모양 장신구이지. 이걸 보자마자 네 생각이 났다. 과연 잘 어울리는구나.”
아니…… 왜 장신구를 보고 내 생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