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파고들어 오는
(61/159)
61화. 파고들어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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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파고들어 오는
2022.09.29.
치미는 당혹감에 나는 장신구를 잠시 멍하게 바라보았다.
“마음에 들지 않나?”
황제는 그럴 리가 없다는 투로 물었다. 내가 왜 대답을 못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어투였다.
무례해 보이지 않길 바라며 나는 장신구를 황제 쪽으로 조심조심 내밀었다.
“신에게는 과분합니다, 폐하.”
황제가 주는 선물은 거절하기도 곤란하다. 하지만 내가 무언가 일을 잘해서 받은 선물이라거나 황제의 총신이어서 받은 선물이라면 모를까.
난데없이 여인용 장신구를 선물 받고서 ‘네 생각이 났다’는 말을 들으니 영 꺼림칙했다.
“과분하다니?”
황제가 13황자와 흡사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가 지나치게 가까이 선 탓에 고개를 들지 않으면 황제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코앞에서 황제를 올려다보는 건 실례가 될 터라 나는 그의 발끝을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신은 사내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주신 건 여인들이 자주 하는 장신구입니다.”
차라리 후궁 중 누군가, 웬만하면 내 동생에게 주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주제넘은 말이니까.
황제가 아무 반응이 없어서 힐긋 올려다보니 그가 입꼬리 한쪽을 올리고 있었다.
내가 여인인 걸 아는데 사내라고 우겨대는 모습이 우스워서 웃는 건가.
왜 웃나 싶어서 잠시 쳐다보고 있자니 황제가 말했다.
“요 이국사는 편견이 강하군.”
놀리는 어조였다.
“예?”
하지만 그 의미를 알기 힘들어 되묻자, 황제는 내 손에서 장신구를 도로 가져가더니 자기 머리 옆에 달고서 두 팔을 펼쳤다.
“어떠냐.”
솔직히 말하자면 진짜로 잘 어울렸다.
내 제자의 얼굴은 천하제일미란 칭송이 저절로 나올 정도인데, 황제의 얼굴은 내 제자와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황자 시절 별명은 국색이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황제에게 치렁치렁한 장신구가 잘 어울린다고 칭송해도 되는 건가?
“잘 어울리지.”
주저하고 있자니, 황제가 다 안다는 투로 말하며 장신구를 도로 떼어 내게 건넸다.
“짐은 네게 그 장신구가 잘 어울린다 여겨서 준 것이다. 우리 ‘사내’ 요요화.”
그러고는 명백하게 나를 놀리는 말을 뱉고서 씩 웃더니 다시 책상 앞으로 걸어가 앉았다.
여인이라고 준 거 아니니 그 핑계 대고 거절하지 말란 거로군.
‘아…… 젠장. 이를 어째.’
* * *
황제가 머리 장신구를 주기는 했는데, 이걸 담아갈 상자라거나 천을 주지는 않는 바람에 나는 장신구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월무궁으로 가야 했다.
아주 우스운 꼴이었을 것이다. 두 손으로 머리 장신구를 떠받들고 다니는 모양새니까.
하지만 황제의 눈과 귀가 사방에 있는 이 황궁 안에서 황제가 준 선물을 한 손에 대롱대롱 들고 가는 건, 황제 앞에 머리를 내밀고서 벼루를 하나 더 던져 달라고 재촉하는 꼴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모습으로 월무궁에 갔으니 당연히 제자는 내 손에 들린 장신구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책상에 장신구를 놓으면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제자가 장신구에 관해 물어볼지 어제 찻집 거리에서 나를 마주친 일에 관해 물어볼지 고민하는 게 훤히 보였다.
내가 서랍에서 우리가 공부하는 서책을 꺼내 펼칠 즈음. 제자가 판단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장신구를 왜 손에 들고 오십니까?”
대답하면 제자가 기분 상해할 걸 알지만 거짓말했다간 걸리기도 쉬운 일이라,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황제 폐하께서 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가 싫어할 게 훤해서 얼른 덧붙였다.
“남, 남는 게 있어서요.”
황제 이야기가 나올 때 한층 어두워졌던 제자의 표정은 남는 걸 받아왔단 이야기에 더한층 갈라졌다.
나는 장신구 따위 아무것도 아니란 것처럼 괜히 툭 손등으로 쳐서 책상 멀찍이 보냈다.
그러고는 제자를 곁눈질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서책을 펼치고 말했다.
“오늘은 90쪽 보겠습니다, 전하…….”
“싫습니다.”
그런데 웬걸. 제자가 대놓고 말했다. 싫다고.
단호하게 튀어나온 거부에, 나는 책을 펼치다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제자가 책에는 손도 대지 않고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예? 왜요?”
너무 얼떨떨해서 대꾸도 못 하고 멍하게 있다가 가까스로 뒤늦게 묻자, 제자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입을 열었다.
“스승님에게 화가 납니다.”
“폐하 선물을 받아와서요……?”
억울해라.
“하오나 전하. 폐하께서 주신 선물을 신이 거절하긴 어렵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나는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다가 참지 못하고 하소연했다. 제자는 눈도 깜빡하지 않았지만.
“제자는 스승님의 그 가벼운 거짓말에 화가 나는 겁니다.”
“제가 무슨 거짓말을 했다고…….”
제자는 그걸 모르겠냐는 듯 나를 바라보더니 아예 의자에서 일어나버리기까지 했다.
그가 밖으로 나가버리는 바람에 나는 혼자 남겨져서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뭐야. 쟤 지금 수업 거부를 하고 도망가버린 거야?
회귀 전에는 없던 일에 나는 입을 벌리고서 닫힌 문을 쳐다보았다.
‘나쁜 놈. 누구는 수업 거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나.’
* * *
황제에게 원하지 않는 선물 하나 받았다고 이렇게 괄시받다니. 나는 떠나지도 못하고 제자가 돌아오기를 한참 기다렸다.
체감상 한 시진은 기다린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제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전하. 기다려도 안 오셔서 갑니다.
수업 시간을 다 채우도록 정말로 제자가 오지 않자, 나는 하는 수 없이 종이에 글을 남긴 다음 제자의 책상에 두고 방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오래간만에 보는 기양은 나를 보고 활짝 웃었다.
“요 대인께 인사드립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아니요. 나는 꾸준히 왔어요…… 그쪽이 오랜만에 일하러 나온 거랍니다.
나는 속으로만 대답하고서 덩달아 웃어 보이다가 어딘가에서 암울한 기운을 느끼고 정색했다.
혹시 제자인가 싶어서 신경 쓰이는 곳을 쳐다보았으나 제자는 보이지 않았다.
“대인?”
기양은 의아한 듯 나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아닙니다.”
나는 결국 적당히 둘러대고서 월무궁 밖으로 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갔을까. 오늘 뭔 날이기라도 한 건지 궁 측문까지는 아직 거리가 반이나 남았는데 하늘에서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자 새똥 같은 물줄기가 뚝뚝 떨어지다가 눈에 한 방울 들어갔다.
나는 눈을 비비고서 얼른 집으로 뛰어갔다.
* * *
궁궐에서 집까지 오는 내내 비를 쫄딱 맞은 데다 속까지 졸인 탓일까.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을 갈아입었는데도 그날 저녁부터 열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밤이 되자 침상이 몸을 끌어당긴다고 느껴질 정도로 사지에 기운이 없어졌다.
설마 회귀까지 해놓고 이렇게 죽는 건 아니겠지.
이불을 두 겹으로 덮어도 몸이 으슬으슬 떨리자 나중에는 이런 약한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결국, 다음날. 도무지 수업하러 갈 여력이 없어서 나는 상태를 보러 온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아버지. 아버지가 월무궁에 들러서 제가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오늘은 수업을 못 한다고 전해주세요.”
“너 괜찮은 거냐? 입술이 새파란데? 의원은?”
“불렀으니 곧 오겠지요…….”
아버지는 영 불안한 얼굴이었으나 그러겠다 하고 나갔다.
나는 닫히는 문소리를 들으며 낚시 그물에 걸린 사람처럼 잠에 낚아채였다.
* * *
화려는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 맞은편의 빈자리를 보고 있었다.
스승은 어제 자신이 당한 복수를 하기라도 하듯 오늘은 입궐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
“…….”
화려는 일어나서 스승이 책상 위에 두고 간 목련 장신구를 집었다.
집어 던져 부수고 싶었지만, 스승의 말마따나 황제가 준 물건을 부수기라도 했다가는 그 뒷감당이 힘들 것이다.
화려는 장신구를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스물다섯 번째의 삶에서 스승은 황제의 후궁이 된 적이 있었다.
그때도 황제는 스승에게 이 머리 장신구를 주었다.
스승은 이걸 머리에 꽂고서 그를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쳐 가며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스승이 스쳐 지나갈 때. 저도 모르게 돌아보면서 머리카락 위에서 흔들리던 이 보석 줄을 본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전하.”
문밖에서 들리는 태감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화려는 장신구를 내려놓았다.
“들어오라 해라.”
화려는 당연히 나타난 사람이 스승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이 열리고 조심스레 들어온 이는 스승이 아니라 스승의 부친인 이행위서였다. (이행위서는 행부의 관직 중 하나)
“황자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다가온 요 가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추어 서서 인사를 올린 뒤 이야기했다.
“송구하오나 전하. 요화가 몸이 좋지 않아 어제저녁부터 앓기 시작하더니, 아침이 되자 상태가 더욱 나빠졌습니다. 의원이 진맥하는 걸 보고 오진 못했지만 얼핏 보기에도 병세가 좋지 못하니 이삼 일은 푹 쉬어야 할 듯합니다.”
화려는 요 가주의 정수리를 내려다볼 뿐 대답하지 않았다.
화려는 요 가주의 말을 믿지 않았다. 스승은 어제 그가 분노하는 걸 보고 나서 일부러 아픈 척 수업을 건너뛰려는 게 분명했다. 그 사람은 그러고도 남을 사기꾼이었다.
“그렇군. 알았네.”
화려의 냉담한 목소리에 요 가주의 이목구비가 실룩였다. 그의 불신을 느끼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화려는 책상 앞으로 걸어가 다시 목련 장신구를 내려다보며 덧붙였다.
“하지만 내일은 꼭 오라고 하게.”
“하오나 전하, 요화는 몸이…….”
“근래에 아프다고 수업을 이미 여러 차례 빠졌지. 그런 것치곤 여기저기 잘 놀러 다니고 있더군.”
“!”
“아프단 말을 믿지 못하겠네. 내일은 오라 하게.”
* * *
이 제자놈. 나쁘고 비정한 놈. 사람이 아프다는데 못 믿겠으니 오라니!
아버지에게 제자의 말을 전해 들은 다음 날. 나는 억지로 채비를 하고서 입궐했다.
하지만 여전히 팔다리는 너무 무거웠고 자꾸 오한이 났다.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땅이 내 다리를 잡아끄는 기분이었다.
약을 두 그릇이나 먹었는데도 전혀 차도가 없다니.
그래도 억지로 월무궁에 가까스로 도착하자, 빨랫거리를 가지고 가던 기양이 날 보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외쳤다.
“요 대인, 괜찮으세요?!”
“하하…… 그럼요 그럼요.”
나는 최대한 멀쩡한 척 기양에게 웃어 보이고서 제자와 내가 수업하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못돼먹은 제자놈은 나한테는 아파도 오라고 해놓고서 자기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목련 장식 하나 받았다가 아주 대단한 화풀이를 받는구먼!
나는 씩씩거리면서 책상 앞으로 가까스로 걸어갔다.
경황이 없어서 실수로 두고 간 목련 머리 장식은 다행히 책상 위에 놓여 있긴 했다.
‘버리진 않았구나.’
나는 안도하면서 장식을 품 안에 넣어두었다. 그러고서 서책을 펼친 다음 제자가 늦게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제자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대신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지고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갔다.
그러다가 세상이 옆으로 뒤집힌단 느낌이 들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걸 마지막으로 의식은 빠르게 멀어졌다.
* * *
수업이 거의 끝나갈 무렵. 화려는 책을 덮고 느릿하게 공부방으로 걸어갔다.
스승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자신의 꾀병이 들통난 데 씩씩거리고 있다가, 그가 내려다보면 또 그 예쁜 눈을 무기 삼아서 상황을 모면하려 애쓸 것이다.
그러나 문을 열자 드러난 건 의자째 쓰러져 있는 스승의 모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