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신년일
(64/159)
64화. 신년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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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신년일
2022.10.10.
린화는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금 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부드럽게 울렸으나 음악도 제대로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연회장은 넓었지만, 사람들을 못 찾을 정도는 아니었다. 원한다면 한 자리에서도 이 안에 있는 다른 손님들을 모두 훑어볼 수 있었다.
린화는 술을 반 잔씩 따라 마셨다.
‘화나.’
갓 들어온 귀인인 린화의 자리는 황제에게서 뚝 떨어져 있었다.
반대편에는 황친들이 자신의 식구나 정혼자를 데리고 앉아 있었는데, 하필 린화의 맞은편에 앉은 이가 9황녀였다.
심지어 9황녀 옆에는 린화가 오래도록 사모한 선안이 그녀와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선안은 린화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궁녀를 통해 9황녀에게 음식을 권했고, 9황녀가 그걸 받아서 먹자 쑥스러운 듯 웃었다.
9황녀는 다람쥐처럼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면서 선안과 눈이 마주치면 배시시 웃었다.
“9황녀 전하의 정혼자는 정말 잘생겼네. 어쩌면 저렇게 훤칠할까. 게다가 가문도 아주 좋다지?”
옆에서 설빈이 단 미인에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서는 정혼자가 마음에 드시나 봐. 계속 웃고 계시잖아. 혼인하면 정말 사이가 좋겠어.”
린화는 술을 다시 반 잔 따랐다.
‘뭘 저렇게 실실 웃어대?’
9황녀와 선안이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는 게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9황녀가 생각보다 미인인 점 역시 불만스러웠다. 고귀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니 얼굴이라도 좀 못났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때였다. 선안과 대화를 나누던 9황녀가 갑자기 까르르 웃으면서 그의 어깨를 두드리더니, 뜻밖에도 일어나 린화에게 다가왔다.
선안까지 데리고서.
“무슨 일이신가요?”
이글거리는 마음을 누르고 린화가 묻자 9황녀가 웃으면서 물었다.
“요 귀인께서는 요 이국사의 누이이시죠?”
제법 친근한 어조였다.
“네, 전하.”
린화가 덩달아 친근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9황녀가 다시 까르르 웃었다.
“요 이국사랑 조금 닮았네요.”
그래서 어쩌란 거야? 린화는 속으로 생각했다.
“안 오라버니는 요 이국사랑 가장 가까운 친구이고, 나도 요 이국사와는 친분이 있지요. 요 이국사가 내 생명의 은인이거든요. 그런데 요 이국사의 누이가 여기에 오게 되어서 기뻐요.”
9황녀가 선안의 팔을 다시 가볍게 두드렸고 린화는 그들이 자신의 앞에서 제발 좀 꺼져주기를 원했다. 애정행각은 자기들끼리 저 멀리 떨어져서 하면 안 되는 걸까?
“힘든 일이 있거든 나한테 말해요, 요 귀인.”
9황녀는 퍽 진심으로 말하는 듯했으나 린화는 꼬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쪽이 내 언니와 혼인하겠다고 난리 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된 거면서 뭐라는 거야. 그쪽이 아니었다면 선안 오라버니는 나랑 혼인했다고. 그리고 나와 가깝게 지낼 마음이 정말로 있었다면 연회 전에 찾아왔겠지.’
9황녀는 이미 시간이 있었는데도 린화에게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고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신년일이 되어 선안과 함께 있자 그제야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린화는 9황녀의 사근사근한 태도가 선안을 의식해서 나온 행동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황녀.”
하지만 린화는 그런 빈정거림을 드러내는 대신 같이 마주 보고 웃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 * *
화려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전하. 우산을 쓰고 가시지요. 아직 눈이 내립니다.”
화려가 전각 밖으로 나가려 들자 태감 하나가 다가와 하얀 우산을 내밀었다.
화려는 하늘을 보았다. 오전에 펑펑 내리던 눈은 크기가 줄어들었으나 여전히 줄기차게 흩날리고 있었다.
“고맙군.”
화려는 우산을 받아 들고서 연회 장소를 내려다볼 수 있는 지대 높은 정원으로 천천히 올라갔다.
어차피 그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걸 알면서 억지로 의자에 앉아 있는 건 고역이었다.
“울지 마십시오, 귀인.”
그러다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화려는 우산을 기울여 들고서 시선을 내렸다.
연회장에서 약간 거리를 둔 곳에 스승의 누이와 스승의 친구가 대화하고 있었다.
화려는 무표정하게 그들을 관찰했다.
스승의 누이는 울고 있었고 스승의 친구는 난처한 듯 거리를 둔 채 달래고 있었다. 스승의 친구와 혼인한 9황녀는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가 절 귀인이라 부르다니. 싫습니다.”
스승의 누이는 흐느끼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요화 오라버니와 9황녀만 아니었더라면 원래는 저와 오라버니가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잖아요. 그런데 저는 후궁이 되고 오라버니는 9황녀의 정혼자가 되다니.”
그 말에 스승의 친구가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스승의 친구가 위쪽으로 고개를 들었더라면 화려를 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승의 친구는 이쪽은 쳐다보지 못했다.
“하지만 요화가 소주의 정혼자를 찾는 사이에 바로 선발에 이름을 넣어버린 건 귀인이 아니십니까.”
스승의 친구가 하는 말에 스승 누이가 얼굴에서 손을 내리고 물었다.
“오라버니가 그런 이야기까지 하던가요?”
날카로운 목소리에 스승의 친구는 쩔쩔맸다.
“일부러 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적당한 사내를 찾다 보니 잠시 이야기가 나온 것뿐이지요.”
스승의 누이는 더는 울지 않았다. 팔을 내리고서 폭발 직전의 화산처럼 우두커니 있을 뿐이었다.
스승의 친구는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요 귀인. 9황녀 전하 일이 아니었더라도 제가 요 귀인과 혼인할 일은 없었을 겁니다.”
“부모님께서는 선안 오라버니의 가문에 혼담을 넣을 작정이셨어요.”
“그랬더라면 저는 요화에게 부탁해 혼담을 물러 달라고 했을 겁니다.”
“!”
“저는 요화와 가장 절친한 지기입니다, 귀인. 제게 귀인은 친구의 누이일 뿐이고, 저는 가장 친한 벗과 가족이 될 마음은 없습니다. 기분 상해하지 마십시오. 제게 누이가 있더라도 요화와 혼인하지 못하게 막았을 테니까요.”
스승의 누이는 잠시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물었다.
“제게 마음이 조금도 없으셨어요? 선안 오라버니께서는 제가 세상에서 가장 영리하고 귀여운 아이일 거라 하셨잖아요. 어떻게 저 같은 사람한테 요요화 같은 오라버니가 있는 거냐고 물어보셨잖아요.”
이 거리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를 들어보니 다시 흐느끼는 듯했다.
“저는 귀인께 마음을 둔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스승의 친구는 잠시 주저하더니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제가 그런 말을 한 건 귀인을 마음에 두어서가 아닙니다. 친구의 동생이니 칭찬한 것뿐입니다.”
“!”
“제가 사모하는 분은 9황녀 전하입니다. 혹여라도 남들이 오해할 만한 언동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앞으로는 가족 행사에서 만나더라도 절 따라오지 마십시오.”
칼처럼 말한 스승의 친구는 돌아서서 곧장 사라졌다.
스승의 누이는 잠시 그 자리에 머물면서 우두커니 서 있다가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던지 눈이 머리 위로 쌓일 정도였다.
* * *
“이러다 너까지 혼인하면 집안이 얼마나 적적할까.”
어머니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신년일 손님들이 떠나간 뒤, 식구들끼리만 모여 신년일의 마지막 식사를 함께하고 있자니 린화의 빈자리가 유독 크게 느껴지는 듯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덩달아 걱정이 되었다.
나는 13황자에게 열심히 잘 보이다가 적당한 시기를 보아서 은신처에서 지낼 건데.
영원히 은신처에서 지내진 않겠지만 그래도 상황을 보아가면서 몇 해는 그래야 할 텐데. 그때는 어떻게 견디시려나.
‘죄송해요 어머니. 하지만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그릇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방 안을 울렸다.
조용하긴 하구나. 보통 린화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쪽이었으니 뭐.
‘린화는 선안이랑 마주쳤는데 괜찮을지 모르겠네.’
그런데 식사를 반 정도 마쳤을 때쯤이었다. 수길댁이 들어오더니 어머니에게 말했다.
“마님. 도련님의 친구분이 요 앞에 와 계십니다. 어쩌지요?”
선안 도련님이라 하지 않고 ‘도련님의 친구’라고 하는 걸 보니 수길댁이 이름을 모르는 사람인 듯했다.
어머니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대답했다.
“들어오라 하거라.”
수길댁이 나가자 잠시 뒤. 문이 옆으로 스르륵 열리면서 커다란 사람이 들어왔다.
“!”
제자였다.
예상하지 못한 제자의 등장에 아버지는 밥을 먹다가 뱉었고 어머니는 사레가 들려 기침했다.
나 역시 젓가락을 입에 문 채 멍하게 제자를 쳐다보았다. 아니, 쟤가 왜 여기에?
제자는 아버지와 어머니 쪽으로 고갯짓해 인사하고는 내게 돌아서며 물었다.
“스승님. 바쁘십니까.”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게 쳐다보다가 밖에서 하인들이 들을까 봐 목소리를 죽여서 물었다.
“아니, 전하께서 여기에 왜 오셨어요?”
뒤늦게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차. 나도 일어나야지.
“스승님이 보고 싶어 왔습니다.”
다리에 순식간에 힘이 빠지면서 나는 의자 등받이를 잡고 휘청였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입을 쩍 벌리고서 나와 제자를 번갈아 보았다.
“예?”
왜 이래, 우리 그런 사이 아니잖아? 황당해서 되묻자, 제자는 내 옆자리 의자를 끌어다 앉더니 여기가 제집인 것처럼 말했다.
“아무것도 못 먹고 왔습니다. 뭘 좀 주시지요.”
제자는 나를 보며 말했으나 부모님이 먼저 반응했다. 두 분은 곧장 일어나서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돌아올 때는 두 분 다 양손에 음식 접시를 들고 있었다.
“고맙소.”
부모님이 제자의 앞에 음식을 두고 갔는데도 제자는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누가 황자 아니랄까 봐. 진짜 오만하네.
“전하 전하. 맛있게 드세요.”
하지만 그가 내 목숨줄을 쥐고 있기에 나도 친근하게 웃으며 권했다.
제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숟가락을 들었다.
‘뭐야. 진짜로 밥 먹으러 왔나? 그럴 리가. 자기 수하들도 벌써 몇이나 수중에 끌어들였잖아. 밥 먹으러 왔을 리가 없는데…….’
* * *
“심심해서 왔습니다.”
부모님의 배려로 둘만 남게 되자 제자는 자기의 속내를 한층 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그는 배가 고파서 찾아온 건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한 대답이 더욱 얄미웠다. 굶어서 왔다면 가엾기라도 하지. 뭐라는 거야?
“저한테 오면 안 심심하세요?”
황당해서 되묻자 제자는 내 이마에 손등을 올렸다.
“전하?”
놀라서 굳어 있자니 그가 손을 치우며 말했다.
“열은 내려갔군요. 약은 꼬박꼬박 드셔야 합니다. 스승님은 집에 돌아가면 제대로 치료도 안 받고 약도 안 드시는 것 같더군요.”
그렇게 말하는 제자의 표정은 아까 처음 나타났을 때와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놀라서 물었다.
“혹시…… 제가 걱정돼서 오셨습니까?”
약간이지만 희망도 들었다.
겉으로는 티가 잘 안 났지만 사실 나에 대한 제자의 적의가 한층 한층 내려가고 있던 걸까? 그래서 내가 아프다고 하면 걱정하는 수준까지는 적의가 내려갔나?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숨을 죽이고서 제자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그런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