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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친절하게 해주세요 (65/159)


65화. 친절하게 해주세요
2022.10.13.



 
제자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네.”

놀랍도록 성의 없는 대답이었다. 대답에서 아예 영혼을 빼냈구먼.

저 대답을 들으니 아주 약간이라도 좋은 대답을 기대한 내가 멍텅구리로 여겨진다.

하긴. 내가 쟤랑 뭘 했다고 적의가 그사이에 가라앉겠어?


“너무 건성이신데요.”

작게 툴툴거리자 제자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지만, 이번에는 희망을 품지 않았다.

그 사이 제자는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디 가세요?”

놀라서 묻자 그가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집에요.”

아 물론 집에 가셔야지요. 잠시 대꾸하지 못하고 있자니 그가 문가로 혼자 걸어갔다.

나는 얼른 제자를 따라 나갔다.

아버지는 본당 계단 앞에 서 있다가 우리가 나오자마자 얼른 다가와 물었다.


“벌써 가십니까?”

“그래.”

제자는 오만하게 한 마디로 대답하고서 외문으로 걸어갔다.

그 뒤에 대고 혀를 내밀려 했으나 아버지가 손으로 막아서 그러지 못했다.


“배웅하고 오거라.”

오히려 아버지가 작게 속삭였기 때문에 마지못해 그를 뒤 따라가야 했다.

내가 따라오는 걸 뻔히 알 텐데도 조금도 멈춰서 기다려주지 않는 제자놈을 왜 배웅해야 하는진 모르겠지만.


“스승님.”

그러다 문간에 다 도착했을 때. 제자가 한 발만 문밖으로 내민 채 반쯤 몸을 돌려 나를 보며 불렀다.

얼른 그 앞으로 다가가자 그가 잠시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가 말을 이었다.


“연회장에서 스승님의 누이와 친구를 보았습니다.”

“린화랑 선안이요?”

이름은 상관없다는 듯 제자는 대답을 생략하고 말을 이었다.


“연회장 밖에서 만나 둘이 따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더군요. 스승님의 동생은 울고 친구는 난처해하다가 먼저 떠나는 등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까?!”

그 말에 돌멩이로 머리를 콩 찍는 듯한 커다란 충격이 왔다.

린화와 선안이 만날 거란 걱정을 하긴 했는데. 결국 둘이 만났구나! 심지어 따로 만나서 얘기까지 했어! 그것도 안 좋게!

난처해서 입을 벌리고 있자니, 제자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올라갔다.


“주고받는 대화도 일부 들었지만, 어차피 아실 이야기일 듯하니 전하지 않겠습니다.”

“!”

아까보다 더 큰 돌멩이가 내 머리를 콩 내려찍고 가는 듯하다.

제자는 두 번 연이어 내게 충격을 주자 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짓고서 돌아섰다.

그가 돌아서자마자 나는 곧장 내 방으로 돌아갔다.


“전하께서 뭐라고 하시니?”

아버지가 쫓아오며 물었지만, 이런저런 대화를 할 심적 여유가 없었다.


“요화야. 전하께서 왜 오셨다니?”

어머니까지 합세해 물었으나 나는 대답 대신 내 방으로 돌아가 문을 닫았다.

부모님에게 선안과 린화 이야기를 했다간 두 분은 제대로 잠도 주무시지 못할 거다.

나는 침상에 앉아 무릎에 이마를 괴고 눈을 감았다. 아이고 골머리야.

* * *

이런 상황에서 린화에게 또 찾아가고 싶진 않았지만, 제자가 전해준 말이 신경 쓰였다.

대답을 듣기가 무섭지만 어쨌든 무슨 일이 있는지 알기라도 해야 대비를 할 수 있겠지.

애써 마음을 다잡고서 다음 날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서 린화의 처소로 갔다.


“소가주님!”

린화가 사가에서 데려간 궁녀 월채는 속도 모르고 나를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얼른 오셔요. 소주께서 소가주님을 보면 좋아하실 겁니다.”

월채는 사가에 있을 적에는 나에게 이렇게 사근사근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직속 주인인 린화가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떠나 지내고 있으니 나에 대한 이들의 반발심이 살그머니 줄어든 모양이었다.


“도련님, 폐하께서 신년일에 우리 소주께 여러 가지 선물을 보내셨어요. 처음에는 별로 관심을 안 주시는 것 같았는데요, 지금은 아니에요. 새로 들어온 후궁 중에 폐하의 성은을 입은 건 우리 소주뿐이에요.”

월채는 신이 나서 떠들다가 안채 문 앞에 서 있는 태감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아직 이곳 태감과 그리 가까워지진 않은 듯했다.

태감은 모른 척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침전 안으로 들어가자 이전처럼 작은 난로 앞에 앉아 있는 린화가 보였다.


“요요화.”

린화는 나를 보자 이전보다 차분하게 일어섰다. 전에는 원비가 무시한다며 보자마자 울먹이더니. 황제가 린화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졌나 보다.


“신년일 잘 지냈어?”

나는 일단 모른 척 말을 건네면서 린화의 곁으로 다가가 긴 의자에 걸터앉았다.


“부모님이 네가 없으니까 서운해하시더라.”

린화는 내 말에 잠시 눈을 내리깔고 입을 꾹 닫았다. 린화 역시 부모님 곁을 떠나서 처음으로 보내는 명절이 마냥 기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월미가 찻잔을 가져와 내게 건네며 말했다.


“이 찻잔은 폐하께서 우리 소주께 선물해주신 거예요.”

새하얀 호랑이가 조각된 찻잔에서는 쑥 같은 향이 올라왔다.


“나도 어제는 어머니랑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었어.”

린화가 난롯가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중얼거렸다.

나는 찻잔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후 후 불면서 린화에게 선안에 대해 물어볼 적당한 시기를 골랐다.

그런데 린화와 몇 마디를 나누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을 즈음.


“소주, 9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월채가 안으로 들어와 내 노력을 모래성처럼 부쉈다.

나는 식겁해서 린화를 곁눈질했다.

제자에게 어제 선안과 린화가 이상한 분위기였다는 소리를 들어서인가. 9황녀가 방문했단 이야기를 들었을 뿐인데 내 심장이 다 쿵쿵 뛰었다.

9황녀가 왜 온 거지? 어제 선안이랑 린화가 둘이서 이야기하던 걸 알아내고 왔나?

뭐 오해 같은 걸 하고 온 걸까? 린화에게 ‘선안 근처에도 오지 마라’ 이렇게 경고라도 하러 왔을까?


“들어오라 해.”

나와 달리 린화는 태연하게 지시했다.

문이 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온 9황녀는 나를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외쳤다.


“요 이국사!”

“황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린화 쪽을 너무 의식하지 않으려 애쓰며 9황녀에게 얼른 인사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리를 비켜주는 게 좋은지 아니면 불안해도 사태를 지켜보는 게 좋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요 이국사까지 같이 있다니 참으로 잘 됐군. 얼른 앉게.”

그 대답은 손님인 9황녀가 집주인인 린화를 대신해 해주었다.

아이고. 나는 힐긋 린화를 보았다. 린화는 사교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가 나는 얼른 이리저리 운반할 수 있는 조그만 의자로 가서 홀로 뚝 떨어진 곳에 앉았다.

9황녀는 아까 내가 앉아 있던 자리에 앉으며 밝게 물었다.


“이국사는 요 귀인을 보러 왔나 보군. 누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지?”

다행히 9황녀는 화난 목소리가 아니었다. 린화와 선안이 신년일에 따로 이야기한 일을 모르거나 알더라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네, 동생이 걱정되어서요.”

일단 안도하면서도 나는 린화를 연신 힐긋거리며 물었다.


“9황녀 전하께서 린화를 찾아주셔서 놀랐습니다. 제 누이와 교분이 생긴 건지요?”

“신년일 행사 때 처음 이야기를 나누었다네. 요 이국사는 내 은인이고 요 귀인께서는 요 이국사의 누이이니 앞으로 잘 대해줄 생각이야.”

9황녀는 발랄하게 대답하고는 린화를 쳐다보며 동의를 구했다.


“그렇지요, 귀인?”

“어머 그럼요.”

린화 역시 싹싹하게 대답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아직까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다행이야. 9황녀는 린화가 선안을 짝사랑한 일을 모르는 눈치고, 린화는 9황녀 앞에서 그런 내색을 할 생각은 없어 보여. 린화는 눈치가 좋으니 그럭저럭 잘 넘어가겠어.’

“요 귀인은 이국사 같은 오라버니가 있어서 좋겠어요. 나도 요 이국사 같은 오라버니가 있으면 좋을 거 같아요. 아름답고 듬직하고 성품도 좋고 머리도 좋잖아요.”

9황녀가 내 칭찬만 좀 덜 한다면.


 

* * *

요화가 수업 시간이라며 나가자 9황녀는 자기도 이만 가겠다면서 곧장 따라 나갔다.

홀로 남겨진 린화는 창문 너머로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도 않는구나. 날 보러 온 것처럼 해서는 내 방에서 둘만 실컷 떠들다 가버리고.”

월채는 얼른 새 찻잔을 가져다 린화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렇게 조금씩 친해지는 거지요. 9황녀는 황후의 딸이니 소주께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될 겁니다. 가까워져서 나쁠 게 있나요?”

린화는 딱 잘라 코웃음 쳤다.


“황후의 딸이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나라는 태월처럼 황녀들에게 공무를 보게 하는 나라가 아닌데. 황녀라 해도 혼인해 궁을 떠나면 어차피 남들과 똑같다. 황후에게 자식이 없는데 다음 대 황제가 이복자매인 9황녀를 얼마나 챙겨줄까.”

월채는 말없이 부지깽이를 가져와 난로의 숯을 뒤집었다.

월우는 요화와 9황녀를 배웅하고 돌아와 월채의 곁에 서며 물었다.


“그런데 도련님은 왜 갑자기 소주를 찾아오신 걸까요?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셨는데 9황녀 전하 때문에 말하지 못하신 거 같아요.”

린화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또 선안 오라버니와 둘이서 내 얘길 했겠지.”

 

* * *

나는 선한궁을 떠나 조금 걸어가다가 운화원 부근에서 9황녀와 헤어졌다.


“오늘도 수업 잘하라, 이국사.”

9황녀는 운화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게 씩 웃어 보였다. 더이상 내게 이성적인 호감은 없지만 중매쟁이로서의 호감은 남으셨나 보다.

다행이지. 내 아이를 회임했단 말만 안 하면 좋은 분 같아.

음. 흥분하면 생각 안 하고 거짓말부터 뱉고 보는 버릇은 있는 것 같지만.

어쨌든 9황녀가 운화원 안으로 들어가면서 더 보이지 않게 되어서, 나도 마음 놓고 돌아서서 월무궁으로 걸어갔다.

황제의 송 태감에게 붙잡히곤 하는 요주의 길목까지 무사히 지나가자 오늘따라 더욱 빈한해 보이는 제자의 월무궁이 드러났다.

오늘도 월무궁 궁인들은 그림자도 안 보이는구나.

다른 태감들이야 게으름 부려서 그렇다지만 기양이…… 걔는 간자이면서 이렇게 게을러도 되나 싶다.

어쨌든 궁인들이 안내해주지 않아도 서재에 혼자 들어갈 수는 있지.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나는 평소처럼 문을 열고 들어가서 평소와 같은 자리에 있는 제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내 자리로 걸어간 다음 한마디를 덧붙였다.


“어제는 제가 걱정되어서 오셨던 거지요? 감사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염려해주신 덕분에 완전히 쾌차하였답니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고. 그냥 어제 제자가 우리집에 다녀갔으니 준비한 인사치레였다.

나는 의자에 앉아 서책을 꺼냈다.


“제자에게 은혜를 입으셨군요, 스승님.”

그런데 책을 펼치고 있자니 무표정하게 내 인사치레를 넘기던 제자가 희한한 말을 꺼냈다.

책을 누르고서 쳐다보자 제자가 자기 서책을 내려놓더니 날 보며 물었다.


“생각해보니 이번뿐만이 아니군요. 이 제자가 스승님을 여러 번 치료도 해드렸고 간호도 해드렸지요.”

나는 문진을 서책에 올려 두고서 그를 너무 미친 인간처럼 쳐다보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제자가 난데없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

결국 그 감상을 짧게 내뱉자 제자가 의자 깊숙이 앉으면서 놀리듯 물었다.


“슬슬 은혜 갚을 때가 되지 않았을까요?”

뭐지 저 신통방통한 적반하장은? 나는 멍하게 제자를 쳐다보다가 아무것도 못 들은 척 다시 서책을 보았다.


“오늘은 110쪽 할 차례네요.”

그러고서 중얼거리는데, 의자가 땅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드니 제자가 내 앞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기어코 내 책상 앞까지 다가온 제자는 책상에 두 손을 올리더니 착한 척 웃으며 물었다.


“은혜는 언제 갚으실 건지요?”

어제 집까지 찾아왔는데 내가 그냥 배웅하고 보내서 화났나? 왜 갑자기 작정하고 시비 거는 거지?

황당해서 그를 빤히 쳐다보자, 제자가 손을 올리더니 내 머리를 콕 눌러서 눈을 내리게 하며 재촉했다.


“응? 스승님. 제자의 은혜를 어떻게 갚으실 건지요?”

그냥 이러고 돌아갈 줄 알았으나 제자는 내 문진까지 옆으로 굴리면서 대답을 기다렸다.

어제 나랑 헤어지고 나서 돌아가는 길에 유동백이랑 한판 싸우기라도 했나? 왜 하루 사이에 기분이 이리 나빠 보여?

하지만 제자가 내 문진을 들어서 책에 자국을 내면서까지 버티자 어쩔 수 없었다.


“전하. 스승의 은혜라고 아십니까?”

나도 적반하장으로 가는 수밖에.


“?”

“신은 평소에 전하를 열심히 가르치고 있으니, 매번 스승의 은혜를 전하께 드리는 거나 다름없지요. 전하는 제 은혜를 어떻게 갚으실 생각이세요?”

“…….”

슬쩍 그의 손을 피해서 올려다보니 제자가 기막히단 표정을 하고 있다.

그 사이. 나는 그가 가져간 내 문진도 도로 뺏어 들었다. 문진을 움켜잡고서 바라보자 제자는 헛웃음을 뱉더니 내 책상에서 손을 떼며 비꼬았다.


“평소에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그러면 이 제자도 은혜를 갚아야지요. 어찌 갚을까요? 뭘 원하십니까? 목숨이라도 드릴까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조금만 더 친절하게 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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