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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화려가 원하는 것 (73/159)


73화. 화려가 원하는 것
2022.11.10.



 
마차 문이 열리자 앞에서 대기하던 내 사내종 월강이 달려와 부축해주었다.


“조심조심 내리셔요 도련님.”

“에구머니나!”

측근 시비인 월섬은 내 어깨에 걸쳐진 용포를 얼결에 받아 들다가 뒤늦게 무언가 알아차리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도련님, 이거 황제 폐하가 걸치는 옷 아닙니까?”

월섬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응. 조심조심 다루거라.”

월섬은 내 대답을 듣자 거의 눈도 뜨지 못하고 옷을 높이 들어 올렸다.

월강의 부축을 받아 내 방에 돌아와 침상에 눕자, 월섬이 용포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이야 신기해라. 이렇게 생겼구나.”

월강이 월섬 곁으로 다가가서 중얼거렸다.


“만져봐. 촉감이 장난이 아니더라.”

월섬이 속삭이자 월강이 내 눈치를 보며 용포를 만져보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사람이 노는 걸 바라보며 호흡을 고르고 있자니, 문이 열리고 어머니가 들어왔다.


“아니 또 실려 왔니!”

어머니는 달려와서는 내 이마에 손을 짚어보고서 월섬을 돌아보았다.


“가서 도련님 먹을 따뜻한 차를 끓여오거라. 월강, 너는 숯을 가져와 좀 더 넣고!”

두 사람이 달려나가자 어머니가 이불을 걷었다.


“자, 안에 눕거라.”

어머니는 아직 용포를 못 본 눈치였다.

월섬이 차를 가져오자 그걸 받기 위해 돌아보다가, 어머니는 그제야 용포를 발견하고서 놀라 찻잔을 떨어뜨렸다.


“세상에 이게 뭐니!”

쨍그랑 소리가 나며 도자기 파편이 흩어졌다.

월섬은 빗자루를 가져와서 얼른 도자기 조각을 치웠다.

어머니는 용포를 입을 벌리고 쳐다보다가, 월강이 숯을 채워 넣고 나가자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가 왜 용포를 덮고 온 거니?”

“좀 복잡해요.”

나는 적당히 둘러대고서 월섬이 주고 간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초감은 유능한 어의였다. 그의 말처럼 시간이 지나자 몸을 따뜻하게 하는데도 손이 떨리고 몸 안에서 찬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러다 어머니의 황망한 표정을 보자, 그냥 둘러대고 말 문제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실은 어머니. 린화가…….”

나는 어머니에게 린화가 9황녀에게 내가 여인이란 이야기를 털어놓은 일, 그 소문이 퍼지면서 안 그래도 나를 싫어하던 7황자가 옳다구나 싶어 달려든 일, 선한궁까지 잡혀가서 위험할 뻔한 일 등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더 입을 크게 벌렸다.


“그때 폐하와 13황자 전하께서 나타나셨어요. 폐하는 제가 단명할 사주라서 혼인 전까지 남장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둘러댔고, 13황자께선 자기 사주가 저랑 잘 맞아서 둘이 혼인하기로 한 거고 자신도 알고 있었다고 같이 말을 맞추어 주셨고요.”

어머니가 이마를 짚더니 비틀거렸다.

나는 얼른 찻잔을 내려놓고 어머니를 붙잡았다.


“괜찮으세요?”

“그러면…… 그러면…….”

“폐하가 둘러댄 핑계를 모두가 믿진 않겠지요. 하지만 폐하가 그렇게 넘어가시겠다니 항의할 사람은 없을 거예요.”

저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지. 항의할 사람은 없지. 문제는…….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제가 소가주 자리를 지킬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 * *



“그게 무슨 말입니까, 린화가 요화가 여인이란 소문을 내다니요!”

요 가주는 그날 저녁 아내에게서 요화가 전한 말을 듣자 크게 호통쳤다.


“우리 린화가 그럴 아이는 아닙니다! 당신도 알잖아요?”

그는 믿지 못하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요화가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겠어요?”

사흠의 짜증스러운 말에 요 가주는 입을 다물었다. 요화 역시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은 혼란에 가득 찼다.


“이 용포를 보세요. 이게 가장 큰 증거입니다.”

사흠이 딸에게서 빌려온 용포를 가리켰다.

요 가주는 의자에 앉아 이마를 감싸 쥐었다.


“허어. 허어.”

그는 연달아 고통스러운 소리를 뱉었다. 두 딸아이가 사이가 나쁜 걸 짐작은 했지만, 여느 형제자매라도 그 정도는 싸우리라 생각했다.

그 역시 세 동생과 자라나면서 무던히도 싸워댔다. 하지만 머리가 굵어지고 나자 싸우는 횟수는 자연히 줄어들었고 지금은 퍽 사이좋은 형제간이었다.

세 남동생 중 누구에게라도 아들이 있었더라면 요 가주가 딸을 남장시키진 않았을 것이다.

동생들은 그보다 먼저 자식을 낳았지만, 그 아이들도 전부 딸이었다.

요 가주의 부모님은 죄다 아들뿐이다 보니 여아를 가지고 싶어 치성까지 드릴 정도였는데, 기묘하게도 그와 형제들은 죄다 딸만 낳았다.

이 일을 두고 요 가주의 어머니는 허탈해하며 말하곤 했다.


-내 치성을 너희가 다 받았나 보다.

“이를 어쩌지요?”

사흠이 요 가주의 팔을 두드렸다.


“내가 린화 이것을 아주 크게 혼내야겠습니다!”

요 가주는 버럭 외치고서 일어섰으나, 아내가 당기는 바람에 도로 앉아야 했다.


“린화는 지금 후궁입니다. 누굴 혼낸단 거예요!”

사흠의 맞는 말에 요 가주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한참 만에야 요 가주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우선 동생들을 불러서 의논해보아야겠습니다. 말만 친척이지 몇 번 보지도 못한 이들에게 우리 가문의 재산을 모두 물려줄 수는 없어요.”

 

* * *

13황자의 스승인 요 이국사가 실은 여인이었는데, 알고 보니 황제가 사주 때문에 남장을 허락한 것이었다!

이 놀라운 소문은 7황자와 14황녀, 9황녀의 궁인들로 인해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이번에는 황후가 궁인들을 매섭게 호통쳐 입을 다물게 만들지도 않았기에 거침없었다.

린화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앞뜰에도 나가지 못하고 방 안을 빠르게 맴돌았다.


“내가 아니야. 내가 아닌데!”

사람들은 린화가 요요화가 여인이란 이야기를 남들에게 소문냈다고 이야기했다.

린화로서는 나름 억울한 일이었다. 린화는 9황녀 외에는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측근 궁녀들에게조차도!


“고정하세요, 소주.”

월미가 린화를 부축해 앉히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어쩌지? 부모님을 내가 대체 무슨 낯으로 본단 말이냐.”

린화는 울먹이면서 벽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문이 벌을 받진 않을 거예요. 폐하께서 두둔해 주셨잖아요.”

월채가 따뜻한 물수건을 가져와 눈물로 얼룩진 린화의 얼굴을 닦아주었다.


“그러면 뭐 하겠어. 이미 소문이 났으니 우리 가문에 소가주 될 사람이 없단 걸 모두 알았을 텐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열심히 모으고 가꾼 재산이 생판 남이나 다름없는 사람에게 넘어가게 됐는데!”

월미는 ‘그런 걸 생각하면 입을 다물고 계셔야지요’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걸 주인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랑 아버지가 내 얼굴도 안 보려 하실 거야.”

린화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었다.

월채가 수건을 들고서 월미를 쳐다보았다.

월미가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소주, 우선 가주님과 마님께 편지를 쓰세요. 제가 그걸 전해드리고 올게요. 사정을 들으시면 두 분도 소주를 용서하실 거예요.”

 

* * *

월미가 린화가 쓴 눈물 젖은 편지를 가지고 갔으나, 사흠과 요 가주는 너무 충격을 받아서 그 편지를 읽어보지조차 않았다.


“받자마자 찢어버리셨어요. 소주가 가문뿐만 아니라 소가주님 인생까지 망쳤다고 화를 내셨어요.”

“언니 인생을 주무른 건 내가 아니라 부모님이야!”

린화는 버럭 소리 질렀다.

월채가 초조하게 린화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아프단 말은 해 봤어?”

린화가 훌쩍이며 물었다.


“네.”

린화는 다시 편지를 쓴 다음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냈다. 하얀 편지 겉봉에 붉은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번져갔다.


“소주!”

월우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걸 드려.”

린화는 피에 젖은 서신을 다시 월미에게 건넸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사흠과 요 가주는 마지못해 서신을 읽었고, 린화가 왜 화가 났는지를 알게 되었다.

린화는 황제가 요화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사내’라서 후궁으로 들일 수 없으니 대신해서 자신을 들인 거라고 했다.

이걸 알게 된 후 언니와 한바탕 싸우고 나서 홧김에 9황녀에게만 그 이야기를 했는데, 9황녀가 모두에게 소문을 내버리고 자신에게 그 일을 덮어씌웠다고 했다.

린화는 죽고 싶은 심정이라면서 부모님의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자신이 혹시라도 죽게 된다면 시체라도 꼭 가문 묘지에 매장해 달라고 해두었다.

자식이 죽음을 운운하며 피를 내어 보냈는데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부모는 없었다.

요 가주와 사흠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주 자리와 재산이 아무리 중하다지만 자식의 목숨만큼은 아니었다.

게다가 혼인은 인륜지대사라 불릴 만큼 한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시집간 남자가 자신의 언니를 사모하고 있단 걸 알았으니 린화가 충격을 받을 만도 했다.


“황궁 내에는 소문을 낸 게 린화란 이야기가 다 퍼졌대요.”

사흠이 걱정스레 말했다.

요 가주는 체면을 불고하고서 궁인들 사이의 소문을 수집했다. 평소 대신들과 궁인들은 왕래하지 않기에 요 가주는 궁인들 사이의 소문에 밝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요 가주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린화의 말대로군. 린화가 소문을 낸 거라고 퍼져 있습니다. 요화에 대해서는 다행히 다들 불쌍하게 여기면 여겼지 그걸로 욕을 하진 않는답니다. 어릴 때부터 남장하고 살았으니 요화가 선택할 여지가 없었을 거라고요. 하지만 린화는 친언니인 요화를 위험에 몰아붙였다고 다들…….”

요 가주가 말끝을 흐리자 사흠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화가 나지만 그래도 자식이니 어쩌겠어요. 우리는 아이들의 편이 되어주어야 해요.”

다음날. 요 가주는 린화를 찾아갔다.

며칠간 제대로 먹지 못해 홀쭉해진 린화는 입술까지 바짝 말라 있었다.

린화는 아버지를 보자마자 울며불며 매달렸고, 요 가주는 린화를 용서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네 언니에겐 네가 꼭 용서를 빌어야 한다. 알았느냐?”

“그럴게요. 꼭 그럴게요.”

린화는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요화에게 보낼 서신을 쓴 다음 월미에게 들려 월무궁으로 보냈다.

* * *



“요 대인.”

문 너머에서 제자의 태감이 나를 불렀다. 나는 제자에게 서책을 읽어주다가 멈추었다.

제자가 말해주길, 요즘 제자의 궁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열심히 일하러 나온다고 했다. 나와 제자 사이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들어와라.”

제자가 대신 대답하자 태감이 얼른 들어와서는 내게 서신을 내밀었다.


“요 대인, 요 귀인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태감이 내가 봉투 뜯는 걸 바라보며 서 있자 제자가 책상을 두드렸다. 태감은 얼른 물러났다.

태감을 보내 놓고서, 제자는 자기는 내가 서신을 꺼내 펼치자 곁으로 다가오더니 내가 앉은 의자에 한 손을 짚고 다른 한 손은 책상에 짚고 섰다.


“…….”

서신에는 린화가 구구절절 미안하다고 사죄하는 내용이 가득했다.


“어쩌실 겁니까.”

같이 서신을 다 읽었는지 제자가 책상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하고서 책상에 엎드렸다가 아차 싶어서 도로 일어났다.

그 사이 린화가 쓴 서신은 제자의 손으로 들어가 있었다.


“이행위서는 스승님보다 막내딸을 더 어여삐 여기시나 봅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닌데요. 둘 중 누구도 버리지 못하시는 거죠.”

제자는 내 대답이 퍽 궁금한지 계속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서책을 펼치고서 제자에게 잔소리했다.


“얼른 가서 앉으세요. 아직 수업 시간입니다.”

“답서를 쓰실 건가요 스승님?”

 

* * *



“안 쓸 건데요.”

퉁명스럽게 대답한 스승이 안 그래도 축축한 붓에 먹물을 더욱 많이 묻혔다.

화려는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는 서책을 한 손으로 들어올려 미소가 올라오려는 자신의 입가를 가렸다.

가족들에게 실망하고 그걸 표현하지 않으려 애쓰는 스승의 모습이 그에게 기묘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이번 일은 그가 만든 판이 아니었으나, 화려에게 좋은 깨달음을 주었다. 화려는 자신이 스승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깨달았다.

그는 수많은 삶을 지나오는 동안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스승을 독차지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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